충청남도 동부 정중앙에 위치한 공주시는 동으로는 세종특별자치시와 대전광역시, 서쪽으로는 예산군과 청양군, 남으로는 계룡시·논산시·부여군, 북쪽으로는 아산시 및 천안시와 접하고 있다.
공주라는 지명은 읍 북쪽에 작은 산의 모양이 공(公)자와 같은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충북과 경기도의 경계를 따라 남서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차령산맥의 일부가 공주의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길게 뻗으며 무성산(613.6m), 국사봉(590.6m), 금계산(574.8m), 갈미봉(515.2m)등을 이루고 있다. 남쪽에는 국립공원 계룡산이 있다. 금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고 유구천, 정안천, 대교천, 용선천 등의 지류가 흐른다. 금강변에는 독락정, 한림정, 금벽정, 벽허정, 사송정, 쌍수정, 안무정, 원산정 등 8개 정자가 있을 정도로 금강은 아름답다.
조선의 문장가 서거정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공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금강의 남쪽과 북쪽에 자리 잡은 공주는 예부터 차령산맥 이남에 산천의 맑은 기운이 쌓여 큰 고을을 이룬 곳으로 여겼다.
충남을 둘로 가르는 차령산맥의 영향으로 장백산의 큰 줄기가 바다를 끼고 남쪽으로 달려 계림에 이르러 원적산이 되고, 서쪽으로 꺾여 웅진을 만나 큰 산악을 이룬 것이 계룡산이라 하였다. 또 한반도에서 한강, 낙동강에 이어 3번째로 큰 금강은 장수 신무산 계곡에서 발원해 진안 용담을 거쳐 무주, 금산, 영동, 옥천, 청주 다섯 고을을 지나 공주에 이르러 금강이 되고, 사비강(부여군에 속하는 금강의 일부)이 되어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공주는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토였으며, 백제가 남하한 고구려 장수왕에 쫓기자 위례성(한성)에서 웅진성으로 천도한 475년(문주왕 원년)이후 538년(성왕 16년) 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기기까지 63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다.
백제 패망 이후 당나라에 의해 웅진도독부가 설치되었고, 고려 때에 와서야 비로소 공주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조선 세조 때에는 진관이 설치되었고 선조 때에는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되는 등 충청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공산성, 4개 문루와 백제 궁궐터 간직 … 인조 피신, 조선 승병 합숙소
한적한 교육도시 공주에 온 나라를 들썩거리게 할 뉴스가 전해졌다.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이다. 이어 2018년에는 공주 마곡사가 두 번째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된 <한국의 산지승원> 7개 사찰에 포함되는 경사를 맞았다.
웅진(熊津)은 백제의 두 번째 수도로 64년간 백제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공산성은 도읍지를 보호하기 위해 축조된 산성으로 현재 사적 제12호로 지정돼 있다. 공산성 앞에는 강물이 흐르고, 뒤로는 깎아지른 절벽이 있어 쉽게 쳐들어 올 수 없는 지형이다.
공산성(公山城)의 축성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백제 24대 왕인 동성왕(재위 479년~511년,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이 축성했다고도 하며 개로왕의 아들인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를 하면서 궁궐과 성을 쌓았다고도 한다. 또 이전부터 이미 성책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축성 당시에는 웅진성,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으로 불렸다.
금강변 해발 110m의 야트막한 야산 기슭에 쌓은 공산성은 애초 토성으로 축조됐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석성으로 개축됐다. 공산성의 둘레는 약 2660m에 달하며, 성벽의 폭은 약 3m이다. 성 모습은 장방형의 산성으로 원래 있던 네 개의 문이 모두 복원됐다. 진남루와 공북루는 그런대로 원형이 살아 있었고 영동루와 금서루는 1993년에 복원한 것이다.
서문에 해당하는 금서루가 현재 정문처럼 사용되고 있으며 매표소와 관광안내소가 있다. 금서루에 오르면 성 밖으로 멀리 송산과 송산에 포근하게 안긴 듯한 마을 풍경이 펼쳐진다.
숲이 우거진 성벽길을 따라 진남루(남문) 방향으로 향하면 제일 먼저 추정 왕궁지를 만나게 된다. 백제 왕조의 궁궐터로 추정되는 넓은 터에는 연지, 쌍수정, 쌍수정 사적비 등이 있다. 이곳에서 나무로 만든 지하 저장시설인 목곽고 등이 발굴됐다. 연지에서는 다량의 백제시대의 토기와 기왓장이 발견됐다.
공산성은 조선 16대 임금 인조(1623~1649)와도 연관이 깊은 장소다. 1624년 (인조 2년)에 이괄의 난이 발생했다. 표면적으로는 이괄, 한명령 등 인조반정의 논공행상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세력이 일으킨 난이라는 것이 통설이지만 정확하게는 권력을 둘러싼 암투의 결과이다. 이괄은 인조반정의 선봉에 섰음에도 이괄 세력에 부담을 느낀 서인들은 그를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좌천시켰다. 이에도 불안했던 서인은 이괄을 역모죄로 몰려고 계책을 쓰다가 분노한 이괄 세력이 1만명의 병사를 모아 남진한 게 이괄의 난이다.
당시 인조는 반란 세력을 피해 공산성에서 8일간 머무르는 동안 두 그루의 나무 아래서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간절히 기다렸다고 한다. 난이 진압되자 인조는 이 나무들(현재 어떤 나무인지 모름)에 정3품의 벼슬을 내렸다. 그 후로 공산성은 쌍수산성 (雙樹山城)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 하나 인조가 공산성 피신 당시 임씨 성을 가진 농부가 인조에게 떡을 빚어 바쳤는데 그 맛이 하도 좋아 절미(絶味)라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런 유래로 ‘임절미’라고 했다가 이후 ‘인절미’로 바뀌었다.
영조 10년(1734)에는 충청도 관찰사 이수항(李壽沆)이 관찰사로 부임해 나무가 있던 자리에 삼가정(三架亭)을 지어 지금의 쌍수정이 됐다. 쌍수정 사적비에는 당시의 상황들이 기록되어 있다.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금서루에서 성벽을 따라 걸으면 진남루(남문)와 영동루(동문)을 거치면 광복루(光復樓)에 이르게 된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0호로 지정된 광북루는 원래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었다. 공산성에 주둔한 군대를 총지휘하던 누각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용심각이라 불렀다. 광복 이후 보수되었으며 1946년 김구와 이시영 선생 등이 이 누각을 둘러본 후 광복을 기념하기 위해 ‘광복루’라 고쳐 불렀다.
백제시대 당시 신하들의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던 임류각을 지나면 금강변(북측)에 면해 있는 만하루(挽河樓)와 연지(蓮池), 그 맞은편의 영은사가 나온다. 견고한 내벽이 둘러져 있는 연지의 깊이는 9m에 이른다. 평소에는 물을 저장했다가 화재가 발생하면 소방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조선 세조 4년(458)에 건립된 영은사(靈隱寺)는 세조 때에는 묘은사(妙隱寺)였다가 이후 영은사로 개칭됐고 이괄의 난 당시 공산성으로 피신한 인조가 은적사(隱寂寺)라 부르다가 영은사로 다시 고쳐 불렀다.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서 훈련받은 승병들이 영규대사의 인솔 아래 금산전투에 참여했다고 전한다.
공산성에서 마지막 구간인 공북루를 지나 공산정에 닿는다. 공북루에서 내려다보는 창벽(蒼璧)의 기암절벽을 소동파의 적벽강에 비유할 정도로 절경으로 꼽는 이도 있다. 유유히 흐르는 금강의 물줄기와 시가지가 어우러진 풍경이 마냥 평화롭게만 보인다. 공산성의 야경은 어느 계절에 와도 운치가 있어 데이트 코스로 제격이다.
금강보 설치로 인해 녹조가 창궐하고 공산성 일부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우울한 뉴스들도 백제의 고도 공주시와 금강이 빚어내는 풍광을 감상하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누가 이곳에 서서 삼국시대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를, 죽어 스러져 간 병사의 울음소리를 기억하겠는가. 그저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화로운 삶이 금강처럼 오래도록 흐르기를 바랄 뿐이다.
송산리 고분군 … 고고학 최대의 발굴, 무령왕릉은 한국판 ‘투탕카멘’
공산성에서 1km가량 떨어진 웅진동에는 송산리 고분군이 있다. 무령왕릉을 비롯해 백제 시대의 고분 30여 기가 분포되어 있으며 이중 7기가 복원되어 있다. 송산리 고분군은 한성시대에서 사비시대로 넘어가는 웅진시대의 매장 문화를 비롯한 백제 문화를 잘 보여준다.
1971년 해방 이후 한국 고고학 최대의 발굴이 이루어졌다. 송산리 고분군 중 벽돌 무덤 6호기에 물이 새 들어와 배수로 공사를 하는 중에 또 다른 고대 무덤이 발견된 게 무령왕릉이다.
이 무덤은 도굴의 흔적 하나 없이 깨끗했고 발굴 결과 무덤의 주인공은 백제 25대왕 무령왕과 왕비로 밝혀졌다. 무령왕은 동성왕의 이복동생이다. 백제 시대의 무덤 중 주인이 명확하게 밝혀진 최초이자 유일한 왕릉이다. 완벽하게 원형이 보존된 백제 무령왕릉의 발견은 한국판 ‘투탕카멘’에 비유되기도 했다.
연꽃무늬의 벽돌로 쌓은 아치형 무덤에서는 금관을 비롯해 금은 장신구, 석수, 동자상, 거울, 도자기, 지석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묘비석에 적힌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이라는 글자는 전 국민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무령왕릉 발굴은 한국 고고학 역사상 최악의 발굴로도 꼽힌다. 당시 전문적인 고고학자와 발굴 인력 및 경험 등이 전무했던 탓에 현장 보존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수년에 걸쳐 진행될 발굴을 17시간 만에 ‘해치워’버린 것이다. 문화재를 자루에 쓸어 담았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니 발굴 현장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 잘못된 발굴과 보존으로 고분 내부에 금이 가고 물이 새는 등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최근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으로, 부여 능산리고분군은 부여 왕릉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문화재 격에 맞는 명칭도 중요하지만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 등 백제유적지구로 등재된 만큼 원형 보존과 주변의 무분별한 개발의 지양 등 각별한 관리가 요구된다 하겠다.
공주의 석장리 유적지는 연천의 전곡리 유적지와 함께 대표적인 국내 구석기시대 유적지다. 구석기시대 중 더 오래된 전기 구석기다. 2006년에 석장리박물관이 개장됐다. 1964년 남한 최초로 발굴된 유적지의 여러 출토물을 관람할 수 있다. 공주는 구석기시대부터 삼한시대, 삼국시대, 조선시대에 이르는 역사적 타임머신을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