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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투어
안동 봉정사, 만휴정&묵계고택, 임청각 … 덜 알려진 곳 찾아가기
  • 변영숙 여행작가
  • 등록 2021-09-02 00:38:34
  • 수정 2021-09-02 01: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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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 중의 새, 鳳을 닮은 절 봉정사 … 영국 왕실, 文 대통령도 반한 곳

안동의 대표적인 여행지하면 하회마을,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등이다. 익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명소들이다. 이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꼭 가볼 만한 곳을 소개한다. 


1516년 후에 조선 성리학의 태두가 되는 열여섯 살 소년 이황이 봉정사(鳳停寺)를 찾았다. 그로부터 50년 후인 1566년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양하고 70대를 바라보는 나이에 다시 한 번 봉정사를 들렀다. 


1999년 한영 수교 재개 50주년을 기념해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영국 왕실의 상징 엘리자베스 여왕 2세가 봉정사를 방문했다. 영국 왕실 최초의 한국 사찰 방문이었다. 가장 한국적인 곳을 보고 싶다는 여왕의 바람으로 방문한 곳이 바로 안동 봉정사와 하회마을이었다. 여왕은 하회마을에서 73회 생일을 맞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의 둘째 아들 앤드루 왕자가 어머니를 대신해 또 한 번 봉정사를 찾았다. 2018년에는 휴가를 맞은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봉정사를 찾았다. 무엇이 당대 최고 학자와 세계의 지도자들의 발걸음을 봉정사로 이끄는 것일까.


참고로 한영은 1884년 영국이 주한영국총영사를 상주시킨 것을 계기로 수교했으며 1906년 을사조약 체결로 명맥이 끊겼다. 1946년 해방 후 총영사관을 재개설했고, 1949년 영국 정부가 대한민국을 정식 승인함으로써 공식 외교관계가 재개됐다.


안동시 서후면 천등산에 자리한 봉정사의 창건 시기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신라 문무왕 12년(672년)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대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천등산 천등굴에서 수행을 하던 능인대사가 도력으로 종이로 접은 봉 한 마리를 날려 살포시 내려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하였다. 


천등산의 원래 이름은 대망산이었다. 능인을 시험하려 옥황상제가 보낸 아리따운 여인을 능인이 내치자 능인의 굳은 의지에 감명한 여인은 등불을 선물하였다. 등불의 도움을 받아 수련을 계속한 능인이 마침내 득도를 하였으니 이후로 대망산(大望山)을 천등산(天燈山)이라 고쳐 부르고 능인이 수행한 굴을 천등굴이라 불렀다는 창건 설화가 전한다.


봉정사 창건과 역사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몇 차례 중수 사실을 제외하면 봉정사 내력에 대해서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창건 설화도 상당 부분 허황되다. 


그럼에도 봉정사는 범접할 수 없는 품격이 느껴지는 사찰이다. 작고 소탈하지만 봉정사의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돌은 돌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흙은 흙대로 저마다 생긴 그대로 어우러져 있다. 1700여년을 이어온 순리의 역사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런 지극함이 있기에 영국의 왕실도 한국의 대통령도 발걸음을 하는 것이 아닐까.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보다 오래된 最古 목조건물 추정 … 후불탱화도 인상적


봉정사에는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귀한 문화재가 수두룩하다. 그 중 몇 가지는 우리나라 최고(最古)로 꼽힌다.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은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 건축물이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72년 극락전 중수 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에 ‘1363년에 극락전 옥개부를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어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13년 앞서 중수가 이루어졌음이 밝혀짐으로써 지금은 부석사보다 더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인정받고 있다. 단지 중수 연대 외에도 극락전의 건축양식이 고구려 양식인 점을 들어 전문가들은 봉정사가 고려 양식인 부석사보다 고려시대이긴 하지만 훨씬 이른 시기에 지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봉정사 대웅전 후불탱화(後佛幀畵) 영산회상도(보물 제1614호)도 가장 오래된 후불벽화다. 2000년 대웅전 지붕 수리 공사 때 1428년(조선 세종 10년)에 그렸다는 글귀가 적힌 상량문이 발견돼 이전까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던 전남 강진 무위사 극락전 후불벽화(아미타삼존벽화 및 아미타내영도벽화, 1430년경 추정)보다 앞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조선시대 다포계 목조건축물의 최고봉인 대웅전(국보 제311호)과 화엄강당(보물 제448호), 고금당(보물 제449호) 등은 주저 없이 봉정사를 ‘목조건축의 보고’라 부르게 한다. 목조관세음보살좌상(보물 제1620호), 영산회괘불(보물 제1642호), 고려시대 삼층석탑(경북도 유형문화재 182호) 등이 사찰의 품격을 드높이고 있다.


2000년도 발견된 상량문을 근거로 조선 초에 봉정사는 지금과 달리 ‘500여 결(1만여 평)의 논밭을 보유하고 안거스님 100여 명에 달하고 75칸의 팔만대장경까지 보유했던 대찰’임이 밝혀졌다. 이후 사세를 유지하지 못한 것은 안타깝다.


고향집 마당 같은 절, 대웅전 팔작지붕의 봉황의 날개인 듯


천등산 봉정사 현판이 걸려 있는 누마루, 투박한 나무기둥과 돌로 쌓은 누대가 인상적이다.

일주문을 지나 봉정사까지는 아름다운 솔숲이 이어진다. 오래된 소나무와 굴참나무의 진한 향이 숲속에 가득하다.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만세루 누마루를 굳게 받치고 있는 굵은 원통 기둥과 누마루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천등산 봉정사’ 현판이 당당하다. 비바람에 휘어진 기둥이며 벌어진 틈새며 분칠하지 않은 수수한 모습이 영락없는 시골 촌부의 모습이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돌을 모아 쌓은 축대와 담벼락은 시골집 담벼락과 다를 바 없다. 오래도록 삭고 견디어 온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문지방을 넘어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탑과 석등이 없는 마당은 사찰보다는 여염집 마당 같은 느낌이다. 대웅전의 날렵한 팔작지붕은 천등굴에서 날아든 종이 봉황의 날개인가 싶다. 수평적 구조가 안정적이다. 대웅전 전각의 앞부분에 툇마루가 있어 마치 일반 가옥을 연상시킨다. 대웅전에는 주불인 석가모니불과 좌우에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으며 후불벽화가 유명하다. 대웅전과 마주한 만세루는 무성한 나뭇잎에 파묻혀 마치 초록 물결 위에 떠 있는 섬 같고 목어가 북소리에 맞춰 자유롭게 헤엄치며 노니는 듯하다.


봉정사 가람은 안쪽 깊숙이 극락전과 대웅전을 모시고, 두 전각 사이로 고금당, 화엄강당, 요사채를 배치했다. 화엄강당에 의해 극락전 영역과 대웅전 영역이 독립적인 공간으로 구분된다. 극락전 앞마당의 고려시대 3층석탑과 선방인 고금당의 어울림이 자연스럽다. 맞배지붕의 극락전은 극도의 간결함을 자랑한다. 중앙의 판문과 양옆에 창살이 있을 뿐이다. 영국 여왕도 극락전에 반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극락전 앞마당에는 1999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의 방문 기념사진과 소원탑이 보인다. 극락전 옆에는 못생긴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본래 안정사(安定寺)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봉정사의 부속 암자인 영산암

 

봉정사 들머리의 명옥대, 퇴계 이황이 후학 가르쳐


봉정사는 퇴계 이황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 절이다. 숭유억불을 고집한 조선 시대에 유학의 태두 퇴계와 봉정사의 인연이라니 얼핏 잘 연결이 안 된다.


퇴계 이황이 후학을 가르친 봉정사 초입의 명옥대. 자료 안동시

봉정사 들머리에서 살짝 옆으로 비껴 나간 곳에 명옥대(鳴玉臺)라는 아담한 정자가 있다. 열 사람도 거뜬히 앉을 수 있는 너른 바위가 급격하게 기울며 절벽을 이루고, 그 절벽 아래로 계곡을 타고 내려온 물이 힘차게 곤두박질치듯 떨어진다. 진입로에서는 숲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았건만 정자 앞으로는 너른 논과 밭이 펼쳐져 놀라움을 선사한다. 깊은 산속에 앉아 바깥세상을 내다보는 형세가 기묘하다. 


퇴계 이황은 명옥대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강학을 했다고 전한다. 원래 이름은 낙수대였으나 중국 서진의 시인 육기가 쓴 ‘나는 샘에서 명옥을 씻어 내리네’라는 시구에서 글귀를 따 명옥대라 고쳐 불렀다. 물 흐르는 소리가 옥이 우는소리 같다는 의미다. 1665년 안동 유림에서 원래 있던 두 칸짜리 방을 허물고 지금의 누마루 형식으로 개조했다.


퇴계 이황은 16세 때인 1516년 봄부터 가을까지 봉정사에 머물며 독서했다. 와 학문을 하였다. 1566년 1월 조정의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가던 중 병환을 핑계로 사직소를 올리고 광흥사, 봉정사에 머물며 강학했다. 봉정사에 머무는 동안 퇴계는 제자 금계 황준량의 문집 <금계집>을 교정하고 ‘봉정사 서루’, ‘명옥대’와 같은 시를 남겼다.


이곳에서 노닌 지 오십 년

젊었을 적 봄날에는 온갖 꽃 앞에서 취했었지

함께 한 사람들 지금은 어디 있는가

푸른 바위, 맑은 폭포는 예전 그대로인데


맑은 물, 푸른 바위 경치는 더욱 기이한데

감상하러 오는 사람 없어 계곡과 숲은 슬퍼하네

훗날 호사가가 묻는다면

퇴계 늙은이 앉아 시 읊던 때라 대답해 주오.

<퇴계의 명옥대 詩>


찾는 이 없는 명옥대에는 풀벌레 소리와 물 떨어지는 소리만 요란하다. 퇴계는 일찍이 ‘감상하러 오는 사람 없어 계곡과 숲은 슬퍼하네’라고 노래했다. 젊은 날의 정든 벗들은 떠나고 찾는 이는 없고 홀로 남은 노학자의 회한과 쓸쓸함이 고스란히 명옥대에 쌓여 있다.


‘미스터 선샤인’의 무대 만휴정 … 보백당 김계행의 묵계고택, 묵계서원


만휴정(晩休亭)은 1986년 경북문화재자료 제173호로 등록되었고 2011년에는 명승 82호로 지정된 아름다운 곳으로 그동안은 심신계곡의 호젓한 정자로 남아 있었다. 만휴정을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것은 2018년 절찬리에 종영된 ‘미스터 선샤인’이라는 TV 드라마다.


만휴정이 위치한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는 계명산, 임봉산, 황학산에 둘러싸여 있고, 앞쪽으로는 길안천이 흐르는 작은 촌동네이다. 이 촌구석에 흙먼지를 날리며 수많은 자동차 행렬이 이어지는 것은 순전히 만휴정이 있어서이다. 너무나 많은 인파가 몰려서 마을 주민들은 불편함을 호소할 정도다.


보백당 김계행이 세운 만휴정. 자료 안동시

만휴정은 마을에서 다리를 건너 계곡 쪽으로 2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무성한 숲을 배경으로 나무들 틈으로 폭포의 하얀 물줄기가 보이기 시작하고 이내 외나무다리와 건너편 멋스러운 팔작지붕이 얼핏 보인다. TV에서 본 딱 그 풍경이다.


만휴정으로 건너는 외나무다리 위에서는 수많은 드라마 속 유진(이병헌 분)과 애신(김태리 분)이 사진 놀이에 여념이 없다. 한참을 기다려 다리를 건너 정자에 들어선다. 부모를 잃고 추노꾼에 쫓기던 어린 유진이 힘겹게 찾아 들었던 곳이다. 굶주림에 허겁지겁 감자(주먹밥)을 훔쳐 먹다 들킨 어린 유진이 금방이라도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다. “이 입에 맞아? 그렇게 먹으면 체해. 우물은 저쪽이다”라는 대사와는 다르게 만휴정에는 우물도 가마터도 혹은 영화 촬영지였음을 상기시키는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관람객들은 주로 사진을 찍느라 외나무다리나 계곡 쪽에 몰려 있어 정작 정자 안은 조용하다.


만휴정은 조선시대 문신인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이 말년에 낙향해 자연과 벗하며 학문을 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다. 정자라기보다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온전한 집에 가깝다. 계곡의 넓은 암반 위에 축대를 쌓고 담장을 두르고 출입문까지 뒀다. 정면에는 누마루가 있고 그 양쪽에 온돌방이 있다. 뒤편에는 산자락과 맞닿은 작은 마당을 두었다. 정자 안에는 김양근의 만휴정 중수기와 김양근, 김굉, 이도원, 김도행 등의 시들이 걸려 있다. 전면의 계곡과 뒤편의 산과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광을 연출한다.


김계행은 50세가 넘은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과 홍문관 부제학, 사간원 대사간(연산군 4년), 승정원 도승지 등의 관직을 역임한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20여 년간 관직생활을 하면서 무려 8명의 임금을 모셨다. 점필재 김종직과 교유한 것과 연산군 생모 윤씨 폐비 당시 승지를 지낸 것을 이유로 무오사화(1498년)와 갑자사화(1504년)에 연루돼 투옥됐으나 큰 화를 면하고 무오사화) 이후 고향인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로 내려왔다. 1501년부터 장남(김극인)으로 하여금 미리 터를 잡아 마련케 한 지금의 보백당종택(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정착하고, 말년에는 근처 산속 계곡 폭포 위에 만휴정을 지어 후학을 가르치며 산수와 더불어 보냈다. 안동 김씨가 일개 향반에서 중앙 정치 무대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김계행의 공로가 크다. 


만휴정은 보백당 선생이 죽은 후 250여 년간 폐허로 방치되어 있던 것을 그의 후손들이 1790년에 고쳐지었다. 만휴정 앞 계곡의 너럭바위에는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家無寶物 寶物惟淸白)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우리 집에는 보물이라고는 없다. 오직 청백만이 보물이다”라는 뜻이다. 보백당이 남긴 유훈이다. 


만휴정에서 조금 더 위쪽으로 오르면 또 다른 너럭바위가 펼쳐진다. 만휴정만은 못하지만 끊임없이 밀려드는 관람객을 피해 잠시 호젓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만휴정에서 1km가량 떨어진 마을 길안천 건너편에는 묵계종택과 제자들이 세운 묵계서원이 있다. 보백당이 묵계리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이래 대대로 후손들이 거주하면서 묵계리는 안동 김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묵계리(默溪里)의 원래 이름은 ‘거무역’이었으나 정자 앞에 시냇물이 흐른다 하여 ‘묵계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종택에 들어서면 앞마당에서 노거수가 먼저 반긴다. 종택은 정침과 사랑채 및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대부의 가옥답지 않게 소박함이 묻어나 보백당의 청렴함을 엿볼 수 있다. 다만 한옥 숙박 등 여러 체험 행사를 진행해 다소 어수선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독립운동의 성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 임청각


만휴정에서 35번 국도를 따라 30여 분 정도 달리면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 1858~1932) 선생의 생가이자 고성(경남) 이씨 집안의 종택인  임청각(臨淸閣)에 닿는다. 


집 앞으로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35번 국도가 지난다. 도로를 따라 길고 높은 가로막이 흉물스럽게 쳐져 있는데 임청각은 그 흉물스러운 가로막 뒤편에 옹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좁은 골목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법흥사 칠층전탑까지 있어 답답함을 더한다.


임청각은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임청각은 1519년 조선 중종 때 이명이 건립한 전형적인 조선 시대 반가의 고택으로 건립 당시 안채와 중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을 갖춘 99칸의 전형적인 상류층 가옥이다. 현재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중앙선 철도로 기차가 다니던 임청각의 모습

일제 강점기 임청각은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훼손됐다. 고성 이씨 가문에서 독립운동가들이 계속 나오자 가문의 정기를 끊겠다며 행랑채와 부속건물 50칸을 철거하고 1942년 마당을 가로질러 중앙선 철로를 부설한 것이다. 그 결과 종택은 반토막이 났으며 얼마 전까지도 흉물스러운 가로막을 사이에 두고 중앙선 기차가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갔다. 철도와 종택의 거리는 불과 7m 남짓이었으니 기찻길 옆 오막살이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일제가 집까지 훼손해 가며 정기를 끊으려고 했던 안동 고성 이씨 일가에서는 친인척을 모두 합해 50여 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됐다. 종택인 임청각은 독립운동의 성지인 셈이다.


석주는 안동의 유학자 집안인 이승목과 부인 권씨 사이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영남학계의 대가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년)을 사사하는 등 전통 유학자로서 학문적 소양을 닦았다.

비교적 평온한 청년기를 보냈으나 구한말 일제의 국권 찬탈을 목격하면서 일찍부터 지역의 혁신적 유림들과 더불어 근대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등 계몽운동과 의병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11년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전답 등 전 재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다. 망명 직전 망한 나라에서 조상을 모시는 것이 부끄럽다며 조상의 신위와 위패까지 모두 땅속에 묻고 나라가 독립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기를 다졌다고 한다. 


그는 만주에 신흥무관학교, 자활복리증진 기구인 부민단((扶民團) 등을 조직하는 등 무장 항일 투쟁에 앞장섰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내는 등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쓰다가 1932년 중국 길림성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1990년 중국 흑룡강성에서 한국으로 봉환돼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가 이후 서울 동작동 국립 서울현충원 임정수반 묘역에 안치되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서훈됐다.


그의 집 안에서는 선생과 아들 및 손자 등 3대에 걸쳐 모두 9명의 독립운동가(서훈)가 배출되었다. 2018년 제73주년 광복절에 그의 손부 허은 선생이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되었다. 이제 종택 임청각은 안동 독립운동가의 산실이자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길이 역사에 남게 되었다.


군자정과 아담한 연못이 자리한 임청각은 여느 고택과 다를 바 없지만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시인들이 독립운동의 결기를 다진 숙연한 곳이다. 군자정 누마루에 올라 안에 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그들은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울분을 토하며 조국 독립의 결기를 다졌을 것이다. 꽉 막힌 가림막이 답답할 뿐이다.


임청각 위쪽 사당에는 조상의 신주 대신 독립운동에 헌신한 후손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뒷동산에는 과거 임청각 선비들이 걸었던 ‘임청각 소담길’이 조성돼 있다. 총 15분 정도 소요된다. 소담길에 서니 비로소 낙동강과 안동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어찌 대장부가 제 한 몸을 아끼랴

잘 있거라 고향 동산 슬퍼하지 말아라

태평한 그날이 오면 돌아와 머물리라.


이상룡 선생이 조국을 떠나면서 남긴 말이다. 선생의 유해는 조국에 돌아와 묻혔지만 그가 그리워했을 고향 동산은 일제에 의해 훼손된 채로 남아 있다.


2010년부터 시작된 도담-영천 145km 구간의 복선화가 완료되어 지난해 말 마당을 가로지르던 중앙선 열차 운행이 중단되면서 그간 진행되던 복원 사업이 탄력을 받고 있다. 문화재청과 경북도와 안동시는 2025년까지 임청각의 원형을 복원하고 기념관 및 기념공원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현재 임청각에는 한옥민박을 비롯해 음식, 등불, 전통놀이, 한복 체험 프로그램과 나들길 걷기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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