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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투어
수원 여행의 본질 ‘화성’ 순례 … 성곽 건축의 백미
  • 변영숙 여행작가
  • 등록 2021-07-14 04:43:34
  • 수정 2021-07-14 20: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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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통미와 신기술 결합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방화수류정, 서북공심돈, 서장대, 화서문이 그 중 압권

팔방이 트여 옹색함이 없다는 팔달산(八達山)을 중심에 두고 있는 수원시는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이자 신도시이다. 해발 143m의 팔달산을 둘러싸고 있는 게 수원의 얼굴이자 상징인 화성(華城)이다. 


수원 토박이인 소설가 김남일은 ‘수원을 걷는 일은 화성을 걷는 일’이라고 했다. 이어지는 ‘지구가 아니다’라는 말을 빼면 수원에 대한 완벽한 묘사라는데 동의한다. 


수원 여행은 화성에서 시작해 화성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성은  성곽 문화의 백미로 조선 18대 임금 정조대왕이 축조했다.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심이 곳곳에서 묻어나 감회가 남다르다. 


수원 화성은 건축물의 아름다움과 역사적 의미가 세계적으로 인정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수원은 과거 마한의 모수국(牟水國)이었다가 삼국시대에 차례로 백제, 고구려, 신라의 영토로 편입됐다. 고구려 때 수원은 매홀이라 불렸고, 신라 경덕왕 때에는 수성군으로 바뀌었다. 매홀에서 매는 물, 홀은 고을을 뜻하니 매홀은 ‘물고을’이란 뜻이다. 수원이란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 원종 12년(1271년)에 수원도호부가 설치되면서부터이다. 이후 수주, 수성, 수성도호부 등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 수원시로 굳어졌다.


고려시대에 지금의 경기도는 양광도로 불렸다. 그만큼 양주와 광주가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수원이 경기도의 중심이다. 


수원은 본래 전라도로 가는 길목(일명 해남로)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경상도 감염이 과거의 경주, 상주, 안동을 전전하다가 서쪽인 대구로 옮기면서 충청도와 경상도를 아우르는 통로가 됐다. 지리적으로나 말투나 정서적으로 수원은 안성문화권에 속하고 충청도와 가깝다. 


수원은 서해를 아우르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활쏘기에 노력하는 무향(武鄕)이었다. 서울과 평양 다음으로 무과 급제자가 많이 나왔다. 화성 팔달산 서쪽 정상에 서장대를 세우고 동쪽 구릉에 동장대를 지어 사대(射臺 활쏘기 연습장)를 만든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팔달산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한남정맥의 주산이자 수원의 진산(鎭山)인 광교산(582m), 백운산(567m), 서쪽에는 칠보산(236m), 여기산(105m)이 포진해 있다. 남쪽은 평야지대를 이룬다. 광교산에서 발원한 수원천이 수원시를 관통해 오산시와 안산시로 흘러 서해로 빠져 나간다. 

 

정조의 이상국가를 재현한 계획도시 


수원은 정조 대왕의 도시다. 200여 년 전 정조가 쌓은 화성이 여전히 도시를 빙 둘러싸고 있고 정조가 어머니의 회갑연을 베푼 화성행궁 역시 그때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팔달문과 장안문을 통해 드나들고 있으며 수원천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팔달문시장(남문시장), 영동시장, 지동시장 등 이른바 ‘왕의 시장’도 그대로다. 


수원만큼 과거의 모습과 정서가 온전하게 재생되고 있는 도시도 드물 것이다. 수원 화성이 복원됐을 때 그곳에 살던 사람들까지 복원해 놓은 셈이다. 마치 천년 고도 경주를 여행하는 듯한 아득한 시간의 아련함이 수원 여행에서도 느껴진다. 


특례시 지정을 앞두고 있는 인구 백만이 넘는 거대도시 수원에서 시간여행을 한다는 게 언뜻 어울리지 않지만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고 있다. 

수원 화성 안내지도, 자료 수원시

 

1794년 축성 시작 … 1975년 복원 착수, 1997년 완료 


정조는 왕위에 오른 지 18년째인 1794년 1월 화성 축성을 시작했다. 도성을 방어하는 한편 자신이 상왕이 돼 일선에서 물러났을 때 머물기 위한 의도였다. 2년 9개월의 공사를 거쳐 1796년(정조 20년) 9월에 마무리됐다.


정조는 화성의 설계를 최고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에게 일임하고 조심태, 정민시, 서유린, 홍원섭 등에게 실무를 담당케 했다. 반계 유형원도 설계 개념을 정립하는 데 관여했다. 정약용은 전통적인 건축기법에 서양의 기법을 활용해 단기간에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성곽 구조를 지닌 아름다운 성을 완성했다. 공사의 총책임자는 채제공이 맡았다. 완공된 화성의 규모는 둘레 약 5.7km, 성곽 높이 4~6m로 4개의 출입문과 41개의 시설물을 갖췄다. 


지난 시대에 축적된 기술뿐만 아니라 거중기, 녹로, 유형거, 동차 등 최초로 선보이는 건축기자재 등 조선의 모든 건축 및 축성 기술이 총동원됐다. 이 덕분에 화성은 성곽 건축의 백미로 꼽히며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고 자연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나 화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심하게 훼손됐다. 수원 토박이들조차도 오랫동안 풍문으로 성과 궁궐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뿐 진짜로 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정도다. 마침내 1975년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인 1997년 수원 화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성이 복원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정조가 남겨 놓은 ‘화성성역의궤’ 덕분이다. 


기록을 중시했던 정조는 화성 축성 과정과 비용, 기간, 인부 수 심지어 인부들의 이름까지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성공적인 복원은 1997년 12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21차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이어졌다. 


위원회는 등재 결정문에 “성의 가치는 당시 공사 내용을 담은 '화성성역의궤'에 담겨 있다. 돌 무게가 얼마고, 어떤 목재를 사용했고, 심지어 공사비로 얼마를 지출했는지까지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설계와 시공 부분은 그림과 해설을 따로 붙여 놓았다. 화성성역의궤만 있으면 화성은 얼마든지 다시 지을 수 있다. 화성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과학적이라는 이유다.”라고 적었다.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당시 “화성은 동·서양을 망라해 고도로 발달한 과학적 특징을 골고루 갖춘 근대 초기 군사 건축물의 모범”이라며 “성곽은 이제 겨우 200년에 지나지 않지만 제각각 지닌 예술적 가치를 감안할 때 마땅히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려야 한다”고 극찬했다.  


화성의 4개 관문 둘러보기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일대

화성을 둘러보는 방법으로는 직접 다리품을 팔아 연필을 꾹꾹 눌러 글씨를 쓰듯 구석구석을 두 발로 꾹꾹 밟아가며 살펴거나, 화성어차를 타고 성곽의 중요 지점을 둘러보는 두 가지다. 2인승 자전거인 ‘벨로택시’와 해설사와 함께 투어하는 5인승택시 ‘행카’가 지난 5월에 운영을 재개했는데 호불호가 갈린다. 어차를 타고 화성의 윤곽을 그린 후에 성곽을 따라 걷기를 추천한다. 


화성어차는 순종 황제가 타던 자동차와 조선시대 국왕이 탔던 가마를 모티브로 제작됐다. 화성어차가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도는 데 약 35~40분이 소요된다. 화성행궁에서 출발해 팔달문-전통시장-수원천-통닭거리-수원화성박물관–연무대-화홍문(방화수류정)-장안문-화서문-생태교통마을을 거쳐 다시 화성행궁으로 돌아온다. 


수원 화성에는 모두 4개의 관문이 있다. 북문 장안문(長安門), 남문 팔달문(八達門), 서문 화서문(華西門), 동문 창룡문(蒼龍門)이다. 성문들은 모두 아치형의 홍예문이며 2층에는 적의 동태를 감시할 수 있는 누각이 설치돼 있다. 


화성 순례는 팔달문에서 출발해 서장대를 거쳐 화서문, 장안문, 동장대(연무대), 창룡문으로 돌아오는 게 일반적인 코스다. 성곽길은 밖에서 보면 6~9m 높이지만 안에서 밖을 보면 어른 키만한 담장 정도다. 


장안문과 팔달문이 가장 화려하고 장엄하다. 통상 성의 남문이 주 관문인데 반해 수원 화성은 북문인 장안문이 주요 관문이다. 그 이유는 정조가 서울에서 화성으로 행차할 때 가장 먼저 들어올 수 있는 문이었기 때문이다. 장안이란 서울로 통한다, 백성들이 행복하게 산다는 두 의미를 지닌다.  


보물 제 402호인 팔달문은 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뜻을 지니며 수원 사람들은 ‘팔딱문’이라고 불렀다. 팔달문은 정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 지붕으로 전체적으로 수평을 이루다가 양옆에서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우아하게 들린 한옥의 전형적인 곡선미를 드러낸다. 장안문, 창룡문, 화서문도 이와 다르지 않은 아름다움을 갖췄다. 


팔달문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도로 공사로 인해 성문만 남아 있다. 오직 팔달문 구간만 토지보상 등의 문제로 성곽이 복원되지 않았다. 팔달문 주변에는 수원천을 따라 팔달문시장을 비롯해 지동시장, 영동시장 등 전통시장이 형성돼 있다. 


보물 제 403호인 화서문은 서북공심돈과 함께 서쪽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둘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수원 화성 건축의 압권으로 꼽힌다. 이 두 건축물만이 정조 당시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지붕 일부만 파손돼 복원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동쪽의 창룡문 아래로는 수지 풍덕천과 성남으로 이어지는 4차선 도로가 시원하게 지난다. 인근에는 동장대(연무대)와 국궁 체험장 등이 있다. 


4개 관문 외에도 비밀통로인 암문 5개, 수문 2개, 무기를 보관하거나 적의 동태를 감시하는 적대 4개, 적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공심돈 4개 등 모두 41개부대시설이 배치돼 있다.  


공심돈,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는 특이한 구조물


화성의 시설물들 가운데 가장 특이한 건축물은 공심돈(空心墩)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공심돈은 비상시에 적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망루의 일종인데 이름 그대로 건물 안쪽이 텅 비어 있다. 밖에서 보면 단층 같지만 내부는 3층이다. 1층은 뜨거운 물을 부어 적의 접근을 막고 2층은 가까운 거리를 쏠 수 있는 화살과 총을, 3층은 먼거리를 쏘는 총을 배치하고 구멍을 뚫어놨다. 적의 눈에 띄지 않고 망루로 올라가기 위해 안쪽을 비우고 사다리나 계단을 설치했으니 그 지혜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망루에 해당하는 공심돈 중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듣는 서북공심돈

당시로서도 전례가 없었고 지금까지도 공심대는 화성이 유일하다. 동북공심돈, 서북공심돈, 남공심돈 등 3개의 공심돈이 있으며 그 중 서북공심돈이 가장 아름답다.  


성이 완공된 이듬해인 1797년 화성을 찾은 정조는 신하들에게 서북공심돈을 가리키며 “보아라. 우리 동국 역사상 최초의 공심돈이다. 마음껏 구경하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서북공동심은 2011년 보물 1710호로 지정되었다. 


200년이 지난 지금 서북공심돈 앞쪽에는 화서공원이 조성돼 있다. 평화로운 저녁 나절을 보내고 있은 시민들은 자신들의 뒤편에 있는 서북공심돈과 화서문에 무심해 보인다. 화서공원은 서울의 하늘공원처럼 가을엔 억새 명소다. 


작가 김남일은 “한참 있다 가도 화서문은 그 자리에 서 있다. 서문은 늘 그렇게 서 있어서 서문이다.”라고 썼다. 수원 사람들에게는 이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그저 늘 그 자리에 있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일 뿐이다. 단아하면서도 단단한 공심돈을 마주 하고 서니 나 역시 정조가 그랬듯이 힘껏 외치고 싶다. “맘껏 보아라. 동국 최초의 공심돈이다.”


서장대와 동장대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新豐樓)에서 순조가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던 화령전(華寧殿) 방향으로 가다보면 ‘생태교통마을’ 조형물이 보이고 ‘왕의 도로’ 안내판이 서 있다. 


이 길을 걷다보면 행궁을 중심으로 형성된 구도심 길임을 실감하게 되는데 꼬불꼬불 이어지는 골목길에는 외국 유명 관광지를 연상시키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작은 레스토랑, 양품점,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하다. 제각각 개성을 풍기는 매장들을 기웃거리다보면 어느새 화서문이다. 


화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장엄함까지 느껴지는 서장대(화성장대)

화성은 대체로 서쪽은 경사가 심하고 동쪽은 완만하다. 화서문 누각으로 올라 성곽길을 따라 600m 정도 오르면 화성에서 가장 높은 서장대(西將臺)에 당도하게 된다. 화서문과 서장대 중간쯤에 서북각루가 서 있다. 늘씬한 자태를 자랑하는 서북각루에 오르면 수원시의 서쪽 지역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누각 사이로 탁트인 대로가 쭉 뻗어나가는 모습이 산자락을 휘돌아 나오는 바람만큼이나 시원하다. 서북각루에서 땀방울도 식힐 겸 풍경에 빠져 한참을 머물렀다. 가을에 서북각루에서 화서공원을 내려다보면 단풍이, 화서공원에서 서북각루를 올려다보면 억세가 물결 친다.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니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기세로 날개짓을 하고 있다.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 서장대는 성곽 일대를 한 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곳이다. 군사시설로 보기에는 너무도 아름답다. 정조는 한낱 군 시설을 어쩌자고 이토록 아름답게 지었단 말인가. 세계의 그 어떤 나라에도 이렇듯 아름다운 지휘소는 없었다. 그것도 이 산꼭대기에 말이다. 서장대 주변의 소나무들도 장엄하다. 


서장대 앞에는 첨성대를 반으로 잘라 놓은 듯한 노대가 서 있다. 노대는 다연발 화살인 쇠뇌를 쏘던 방어시설이다. 그러나 서장대와 노대는 하늘에 제를 올리던 제단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신성스러운 장엄함이 있다. 서장대에는 ‘화성장대’라는 정조의 친필 편액이 걸려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서장대는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 아래쪽 행궁에서도 한 눈에 보인다. 


서장대에서 더 서남쪽으로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 나중에 융릉으로 승격)을 바라보았던 서남각루(화양루)가 있다. 


화성 동장대(연무대)

동장대(東將臺)는 병사들이 무예를 연마한 곳이기에 연무대(鍊武臺)라고도 부른다. 지형은 높지 않으나 사방이 트여 있어 화성의 동쪽에서 성 안을 살피기 좋은 장소이다. 석양에 물들어가는 연무대와 일대 풍경이 아름답다. 


북수문(화홍문)과 방화수류정 & 남수문 


광교산에서 발원한 수원천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곳에 북수문에 해당하는 화홍문(華虹門)이 세워져 있다. 반대로 흘러나가는 쪽에 남수문이 세워져 있다. 


화홍문은 멋진 누각과 7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다. 여름철 7개의 무지개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부서지는 물보라를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팔경으로 꼽는다. 

화홍문 뒤편에 높은 언덕에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으로 불리는 동북각루가 세워져 있다. 단 하나의 쇠붙이도 사용하지 않고 나무로만 지은 건물이다. 동북쪽 군사 지휘소로 만들어진 누각이긴 하나 정자에서 바라보는 풍광과 정자와 어우러진 주변 모습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아름답다. 방화수류란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는 의미다.


화홍문 일대가 군사들의 휴식처라면 방화수류정은 정조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화양각(서남각루)에서 아버지 사도세자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졌다면, 방화수류정(동북각루)은 풍류와 함께 왕의 위엄을 내세웠던 포인트다. 방화수류정에는 왕위와 신선을 상징하는 구름 조각 모양의 ‘낙양’ 장식이 기둥 여기저기에 덧대어 있다.  ‘’ 


방화수류정 아래 인공적으로 조성한 용연(龍淵)이라는 불리는 연못이 있다. 방화수류정에는 4개의 달이 뜬다고 한다. 하늘에 뜬 달, 호수에 비친 달, 술잔에 담긴 달, 그리고 임의 눈동자에 어린 달이다. 방화수류정의 평면지붕 형태는 18세기에는 유례없는 뛰어난 건축기술로 밝혀져 역사적, 건축적, 예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보물 제 1709호로 지정되었다. 이 외에도 수원 화성은 포를 발사하는 포루 5곳과 치성, 통신시설인 봉돈 등 군사시설을 갖추었다. 


화성은 두 발로 걸어야 한다. 걷는 자와 걷지 않는 자가 느끼는 화성은 분명 다른 화성일 것이다. 


화성어차 운행  

시간: 오전 9시 4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점심시간 휴식, 정오~오후 12시반)

요금: 성인 4000원, 군인 및 청소년 2500원, 어린이 1500원

문의: 031-228-4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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