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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투어
보성 벌교는 일제가 폐지한 옛 낙안의 본향, 정작 일제 때 전성기 보내
  • 변영숙 여행작가
  • 등록 2021-05-17 19:53:06
  • 수정 2021-05-17 20: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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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 ‘태백산맥’의 이런저런 묘사가 담긴 벌교 읍내 ‘슬로우’ 여행 … 보수적인 ‘보성읍’과 완연 달라
오래 전 여행했던 벌교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려면 당시 함께 여행했던 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벌교’는 존재감이 희미한 고장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벌교에 대한 나의 기억은 ‘벌교 꼬막’이 전부였다. 그나마 꼬막을 먹어 본 곳도 벌교가 아닌 순천이었으니 벌교에 대한 기억은 전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89년 발간된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열혈독자로서 소설의 배경인 벌교에 대해 특별한 흥미를 느낄 법도 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벌교에 갈 기회가 있었으나 굳이 따로 시간을 내지는 않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도 벌교는 순천이나 여수, 해남을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경유지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 남도여행에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사실 이번 여행은 순천을 1박 2일로 짧게 돌아볼 계획이었다. 그런데 애초에 목적지에 없었던 벌교에서 2박 3일을 지내다 왔으니 ‘시절의 인연’이 따로 있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보성이어야 할 이유가 없는 벌교의 역사와 정체성

우연히 2020년 1월 발간된 ‘낙안군문화’라는 책자를 접하게 되었다. ‘1500년 역사의 낙안군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창간호였는데 창간사가 흥미로웠다. 

“신채호는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잊는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 낙안군 영토는 재생되었으나 낙안군 이름과 역사는 재생할 수 없으니 낙안군에 사는 우리는 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산다. 넓은 평야를 안고 있는 낙안(협의의 순천시 낙안면)과 수산자원이 풍부한 여자만(여수시 소라면)을 거느린 벌교는 예로부터 하나였다. 서로 갈라져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다만 지구상에 일본 제국주의만이 할 수 있는 잔학무도한 방법으로 착한 백성들의 삶을 무참히 짓밟은 결과다.” 

글의 요지는 ‘벌교는 이미 백제시대부터 있어왔던 오래된 고읍으로 지금의 보성군이 아니라 낙안군에 속했던 고장이었으나 합당하지 않은 이유로 다른 군으로 편입되었으니 이제라도 벌교 고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낙안군(樂安郡)은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외서면·별량면 일부와 보성군 벌교읍, 고흥군 동강면 일부 지역에 있었던 옛 고을의 이름이다. 고려 초인 930년에 이미 낙안군이라는 지명이 나타나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계속해 독자적인 군으로 존속해 왔으나, 1908년 일제에 의해 타군에 통폐합됐다. 일부는 순천군으로, 일부는 보성군으로 분할 편입됐다.  

옛 낙안군의 중심지였던 낙안면 지역에는 낙안읍성이 성곽은 물론 그 내부의 마을까지도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으며, 관광지로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오늘날 벌교읍은 동쪽은 순천시 낙안면과 별량면, 서쪽은 보성군 율어면과 조성면, 남쪽은 고흥군 동강면, 북쪽은 순천시 외서면에 접해 있다. 

그러나 벌교는 보성군에 속하면서도 인구 규모와 상권도 보성읍보다 크고 다소 보수적인 보성군과는 다른 지역이라는 인상을 준다. 

벌교는 일제강점기 때 보성과 고흥 일대의 물산을 실어내 가는 창구가 되면서 급속도로 커졌다. 1930년 지금의 광주광역시 송정리와 경남 밀양시 삼랑진을 잇는 경전선이 지나는 벌교역이 생기면서 벌교는 교통의 요지로서 산업과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무렵 벌교에는 135가구, 515명의 일본인들이 살고 있을 정도로 번창했다. 또 보성읍보다 4년이나 앞선 1937년에 읍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벌교는 물류, 교역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급격하게 쇠락하기 시작했다. 

소설 ‘태백산맥’의 고장 … 벌교를 슬로시티로 만드는 모티브 

벌교는 뭐니뭐니해도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는 고장이다. 소설에는 벌교천을 중심으로 벌교 읍내의 집과 거리, 강과 제방 등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벌교천 일대에는 이들의 흔적을 따라 태백산맥 문학공원과 문학거리, 태백산맥 문학관 등이 조성되어 있어 벌교 여행은 자연스레 태백산맥 문학기행이 된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태백산맥을 다시 한번 읽고 오는 건데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제 너무 늦었다. 

벌교 태백산맥 문학기행은 ‘구보성여관’에 짐 보따리를 풀고 시작하는 게 좋다. 소설 속 배경이 되는 구벌교금융조합, 홍교, 김범우의 집, 소화다리, 벌교역, 중도방죽, 현부자집네 등이 모두 보성여관에서 걸어서 30분 이내 거리에 있다. 

이런 이유로 벌교는 ‘느린 여행’의 최적지이기도 하다. 보성여관에서 제공되는 커피와 토스트로 아침을 해결하고 천천히 개교 100년을 넘긴 벌교초등학교를 지나 중도방죽을 다녀와도 좋고 벌교천을 따라 홍교와 소화다리를 쉬엄쉬엄 걸어갔다 와도 좋다.

2004년 등록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된 구 보성여관 

태맥산맥 문학거리 중간쯤에 위치한 구보성여관은 일제강점기 우리 전통양식과 일본식으로 지은 2층짜리 목조건물로 당시 벌교 일대에서 가장 크게 지은 최신식 건물이었다. 광복 이후 일본식 건물이 모두 헐리는 와중에도 헐리지 않고 남아 있었다. 살림집과 목공소, 옷가게 등 점포 등으로 운영되는 등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던 것을 2008년 이후 문화재청 산하의 독립 법인인 ‘문화유산 국민신탁’에서 매입해 관리, 운영하고 있다.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복원한 일본 다다미식 형태의 구 보성여관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였으나 일부는 원형을 살리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현재 숙박업소와 카페 및 공연장과 체험장 등으로 운영되고 있다. 남도 명창, 판소리 공연, 전통차 체험, 연자방 공예 등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이 운영되며 1000원의 입장료를 지불하면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 

2층의 다다미방은 원래 그대로 복원했다. 다다미방 2층에서는 이 집의 특징인 함석지붕도 내려다 볼 수 있다. 2층 창을 통해 옆에 위치한 벌교 초교와 문학거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다다미방은 여러 영화 촬영지로 등장하였다. 방음도 안 되는 다닥다닥 붙은 방에 화장실과 세면대까지 같이 사용해야 하는 불편함을 마다하지 않고 이곳에서 숙박하려는 이들이 넘쳐난다는 후문이다. 

필자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로 인해 운 좋게 보성여관 ‘특실’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툇마루 맨 끝 가장 안쪽에 위치한 특실에는 원래는 없던 욕실과 화장실까지 갖춰져 있다. 마당 한가운데 꾸며진 중정에서 느긋하게 아침 햇살을 즐기는 맛이 두고두고 여운으로 남는 곳이다. 숙박객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다. 일반 호텔의 안락함과 편리함이 아닌 ‘과거’와 ‘문화’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소설 <태백산맥>에서는 토벌대 임만수와 그 대원들이 숙소로 사용한 것으로 나온다. 입구의 카페나 널직한 홀에서 거리 풍경을 감상하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기 좋다. 

보성여관 맞은편에는 소설 속에서 술도가였던 ‘정도가’ 집으로 현재 수리 중이다. 정도가집 아들 정하섭은 무녀의 딸 소하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나온다.  

태백산맥 문학공원 입구에 세워진 ‘벌교금융조합’ 건물은 1919년 지어진 벽돌 건물로 내부는 화폐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소설 속 인물 송기묵이 이곳에서 근무한 인물로 나온다. 맞은 편에는 최근 SNS에서 맛있는 빵집으로 소문난 ‘모리네 빵가게’가 있다. ‘10.30 OPEN합니다’라는 안내판이 무색하게 문을 열기 전부터 빵을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태백산맥 문학공원의 새로운 명소이다. 이밖에 오래 역사의 삼화목공소 등이 있다.  

벌교천 홍교 … 선암사 스님들이 만든 3개의 무지개 모양

보성군 벌교천 홍교

보성여관에서 1km쯤 떨어진 벌교천에는 보물 435호 지정된 홍교가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며 서 있다. 벌교읍 추동리에서 발원한 벌교천은 벌교읍을 관통하여 남해로 흘러나가는데 만조 때에는 바닷물이 홍교가 있는 곳까지 밀려들어온다. 

홍교는 홍예교(虹霓橋)의 줄임말로 무지개 모양의 다리를 말한다. 이곳에 처음부터 홍교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는 뗏목다리가 있었으나 영조 5년(1729년) 대홍수가 나서 유실되자 선암사 승려인 초안과 습성 두 선사가 지금의 홍교를 놓았다. 

벌교천 홍교는 무지개 모양이 세 개나 연결되어 있어 더욱 특별하다. 홍교 입구에 홍교 중수비 6기가 세워져 있다. 이중 일부는 벌교 노인당 뜰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1985년 홍교 중수 때 이곳으로 옮겨왔다. 홍교 아래로 내려서면 무지개 한 가운데에 매달려 있는 용머리도 볼 수 있다. 벌교천 홍교 외에도 순천 선암사와 금둔사에서도 아름다운 홍교가 놓여 있는데 이들 모두 선암사 스님들이 만들었다. 

벌교(筏橋)라는 지명은 뗏목으로 잇달아 놓은 뗏목다리를 일컫는 순우리말 벌교에서 유래한다. 다시 말해 뗏목다리를 대신한 홍교는 벌교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뗏목다리가 한 마을의 이름으로 불렸던 것은 그만큼 이 다리가 차지하는 의미가 컸기 때문으로 이 다리를 건너야만 순천과 보성을 오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리 아래는 물산이 모이는 생존의 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홍교를 건너면 소설 태백산맥의 등장인물인 김범우의 집이 있고 그 반대편에는 음악가 채동선 선생의 생가가 있다. 홍교에서 하류 쪽으로 약 600m 떨어진 곳에 ‘소화다리’가 놓여 있다. 이 다리의 원래 이름은 부용교이다. 그러나 1931년 건립될 당시 일본 연호로 소화 6년이었다 해서 언제부터인지 소화다리로 불리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및 한국전쟁에서 좌우 이념갈등의 유혈낭자한 역사의 현장을 지켜본 소화다리

건립될 당시의 모습을 간직한 낡은 소화다리는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시기 좌우이념으로 대척점에 선 동족들간 밀고 밀리면서 총살이 자행되던 처참한 역사의 현장이다. 당시 죽은 사람을 소화다리 아래로 버렸는데 썰물 때면 시신은 떠 내려가고 검정고무신만 갯벌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소화다리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겠구만이라 … 사람 죽이는 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 허겄구만요.” 문학기행 안내판에 적힌 <태백산맥>속 대사 때문인지 자꾸 다리 아래 갯벌을 내려다보게 된다. 여전히 주인 잃은 고무신 한 짝이 갯벌 위를 떠도는 것만 같다.

벌교천을 따라 말끔하게 조성된 산책로에는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글귀가 적힌 조형물들이 세워져 있다. 산책로를 걸으면서 굴곡진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되새겨봐도 좋겠다.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굴곡의 역사를 말이다. 

소화다리를 건너면 ‘벌교 꼬막정식거리’가 나온다. 꼬막 모양의 조형물과 ‘원조꼬막’, ‘벌교꼬막’ 등의 간판을 내건 식당들이 즐비하다. 벌교 꼬막은 순천만과 고흥만 사이의 여자만(汝自灣)의 차진 갯벌에서 자라는 꼬막을 잡아와 알이 굵고 속살이 쫀쫀하다. 
 
태백산맥 문학관 … 한옥에 일본식이 가미된 ‘현부자집네’

일본식이 가미된 ‘현부자집네’

벌교 꼬막정식거리를 지나 조정래길을 따라 약1km 떨어진 곳에 ‘태백산맥 문학관’과 ‘현부자네집’과 ‘소화의 집’이 있다. 2층으로 지어진 문학관에는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 선생의 사진을 비롯해 인터뷰 자료, 소지품, 육필 원고, 태백산맥의 기획안 및 독자들이 쓴 필사 원고들이 전시돼 있다. 외관에 비해 볼거리는 많지 않아 다소 실망스럽다. 

소설 속 ‘현부자집네’로 등장하는 고택은 건축양식이 매우 독특하다. 한옥 양식에 일본식 양식을 가미한 저택으로 대문 위에 누각을 얹었고 본채에도 일본식 건축양식이 혼재돼 있다. 실제로는 박씨 문중의 고택이라고 한다. 

한 많은 조선인의 피로 쌓은 중도방죽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중도방죽은 지금은 갈대밭을 거니는 산책길이 됐다

홍교에서 벌교천 하류까지는 중도방죽길이 이어진다. 중도는 일제강점기 철다리 옆에 있는 마을에 살던 실존 인물로 제방 쌓는 것을 감독한 일본인이다. 태백산맥에서 정노인은 간척지의 방죽을 쌓던 때 그 어렵고 뼈빠지게 힘들었던 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워따 말도 마씨오. 고것이 워디 사람 헐 일이었간디라. 죽지 못혀 사는 가난헌 개 돼지 겉은 목심덜이 목구녕에 풀칠허자고 뫼들어 개 돼지맹키로 천대받아 감서 헌 일이제라 … 저 방죽에 쌓인 돌뎅이 하나하나 흙 한 삽, 한 삽이 다 가난한 조선사람덜 핏방울이고 한덩어린디. 정작 배불린 것은 일본놈덜이었응께. 방죽 싼 사람들 속이 워쩌겄소 (태백산맥 4권 306쪽).”

수많은 조선인의 한이 담긴 중도방죽길은 지금은 벌교민들의 한적한 산책길로 애용되고 있다. 방죽 안쪽 갯벌에는 무성한 갈대밭 사이로 S 자를 그리며 산책로가 나 있다. 이곳 벌교천 하구 갯벌은 자연하천과 펄갯벌이 이상적으로 연계된 해안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는 우수한 갯벌로 짱둥어, 꼬막 등이 다산하며 민물생물, 기수생물(汽水生物,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역에 사는 생물), 해양생물이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생명의 땅이다. 

순천만 갈대밭의 혼잡함을 피하고 싶다면 이곳 중도방죽이 답이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갯벌 위로 잠자리를 찾아 날아든 새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제 이곳은 조선인의 한도, 핏물도 없는 고요한 새들의 안식처일 뿐이다. 한맺힌 영혼들이 이제라도 고이 잠들기를. 

벌교 월곡 영화골 벽화마을 

벌교 여자중학교 뒤편 벌교읍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는 ‘월곡 영화골 벽화마을’이 있다. 영화골 벽화 마을은 이름 그대로 ‘영화’를 테마로 만들어진 문화마을이다. 골목마다 다양한 영화의 캐릭터나 장면들이 그려져 있다. 디즈니와 마블 코믹스 등의 대표작뿐만 아니라 영화 ‘문라이트’, ‘라라랜드’, ‘명량’ 등을 벽화에서 만나볼 수 있다. 벽화들을 감상하다보면 어느새 언덕의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회관까지 오게 된다. 눈 앞에 벌교읍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전망대가 필요 없다. 아직은 방문객이 적어 호젓하게 벽화마을을 둘러 볼 수 있다. 

단군을 섬긴 대종교 창시자 기리는 ‘홍암 나철 기념관’ 

벌교읍 금곡마을에는 홍암 나철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낙안군 금곡에서 태어난 홍암(弘巖)은 단군을 섬기는 대종교의 창시자로서 초대 대종사를 역임하였다. 나철(羅喆)은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관직을 버리고 1904년 호남 출신의 지사들을 모아 유신회라는 비밀단체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본으로 밀항해 일본 황궁 앞에서 상일황소를 보내 일본 천황의 무도함을 꾸짖었다. 1907년 을사오적을 처단하는 결사를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제의 대종교 불법화로 교단이 존폐 위기에 몰리자 1916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 들어가 수도하던 중 3일간의 단식 기간 중에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유해는 만주 백두산 북록(北麓) 청파호(靑坡湖) 언덕에 안장돼 있다. 


나철 순명 100주년인 2016년에 개관한 기념관에는 홍암관과 대종교독립운동관 등 2개의 전시관에 그의 생애와 활동 및 대종교 관련 자료와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기념관 뒤편 언덕에 사당 홍암사가 있다. 그동안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나철 선생을 기리고 그의 업적을 재조명할 수 있는 의미있는 공간이다. 

보성읍에는 대한다원 … 곱고 아름다운 여성미의 곡선

벌교가 보성군의 동쪽이라면 보성읍은 보성군의 서쪽으로 장흥군에 붙어 있다. 대한다원(흔히 보성다원, 제2대한다원을 대한다업이라 함)이란 녹차밭은 너무도 유명한 관광지다. 삼나무숲을 파고드는 아침햇살이 녹차밭에 비친 모습이 눈부시다. 

1938년 일본 종자를 뿌리며 차 재배가 시작됐다. 보성다원은 차밭을 둘러싼 300만주의 삼나무도 매력적이다. 전부 합해 면적이 여의도의 1.5배쯤 된다. 왕대죽, 오죽, 백일홍, 주목 등의 군락도 웬만한 수목원에 견준다. 

대한다원에서 봇재를 넘어 율포로 가는 길에 산 정상에 자리한 다향각은 굽이치는 차밭의 곡선과 내려다보이는 저수지 ‘삼산제’의 물결이 매혹적이다. 곱고 정련된 보성의 차밭은 여성미를 풍긴다. 

우리나라 남도의 3대 차밭하면 경남 하동 쌍계사 가는 길목의 화개골 야생차밭, 보성의 대한다원과 봇재다원 등 봇재 인근의 조그마한 다원, 전남 영암의 덕진차밭 등을 들 수 있다. 화개골이 거친 야생성과 남성미를 발산한다면 보성의 차밭은 대조적으로 여성미를 간직한다. 

영암 덕진면 백룡산(420.8m)에 위치한 대한제다의 녹차밭은 남으로 월출산(810.7m)이 내다보이는 풍광이 그만이다. 이곳은 3만5000평 규모로 넓다고는 할 수 없지만 순수재래종만 42년째 재배하고 있다. 도갑사를 비롯한 월출산 주변의 조그만 야생차밭이나 화개골 야생차밭은 대부분 덖음차를 선보이는 데 비해 덕진차밭과 보성차밭은 찐차인 증제차를 생산한다. 

이밖에 보성에는 제암산 자연휴양림, 용추계곡, 비봉공룡화석지, 주암호 생태습지, 주암호 일대 드라이브 코스, 서재필 기념관 등의 관광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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