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만 해도 서울에서 강원도 속초까지 가려면 미시령을 넘어 서너 시간은 족히 걸려야 했다. 부지런을 떨어도 하루 만에 속초여행을 마치고 귀경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개통 이후 속초는 이제 2시간이면 닿는다. 부산하게 움직이면 당일로 속초는 물론 인근 고성 여행까지도 욕심내 볼 수 있다.
속초(束草)를 문자대로 풀면 ‘풀 묶음’이다. 울산바위가 풀을 묶어 세워 놓은 듯한 모양이라서 그런지, 호숫가 갈대풀이 무성함을 뜻하는 것인지 구체적인 지명의 유래는 알기 어렵다. 다만 속초가 갓 베어 놓은 풀단처럼 푸르고 풀냄새처럼 싱그러운 도시인 것만은 분명하다.
속초는 동해바다를 품고 영랑호와 청초호라는 두 개의 호수를 안은 도시다. 시 면적의 절반 이상은 설악산이고 동쪽은 바다로 뻥 뚫렸다. 한마디로 속초는 우리나라 최고의 산과 바다, 호수까지 거느린 축복받은 도시이다.
속초는 북으로는 고성군, 남으로는 양양군, 서로는 인제군과 맞닿아 있다. 위도 상 38도선 이북에 위치해 있어 8.15해방 직후 북한 영토에 속했다가 6.25이후 1951년 남한의 영토로 수복됐다. 속초에서 군사분계선까지는 불과 50km. 남한 최북단 도시로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 아픔은 푸른 바다와 눈부신 해변, 웅장한 설악산의 아름다움 속에서 드러내놓고 아프다고 말하지 못한다.
속초의 관문 설악산 & 설악산 권역
고속도로를 타고 미끈하게 설악산을 넘는 것도 좋지만 낭만은 없다. 가끔은 투박하고 불편하지만 낭만과 여유를 느끼고 싶다면 동홍천 나들목에서 지방도를 타고 미시령이나 한계령을 넘어 속초로 넘어오는 것을 추천한다. 고갯길에서 만나게 되는 미끈한 울산바위와 설악산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언제 봐도 변함없이 계절 따라 색만 달라지는 설악은 침묵 속에서 자식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든든한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겨울날 눈 덮힌 하얀산, 봉우리 위에 줄지어 서 있는 암봉의 빛깔이 눈과 같다하여 설악인 이 산에는 신비한 영이 깃들어 있고 생명이 묵직하게 살아 숨쉰다.
척산 온천휴양촌
속초 IC를 나오면 학사평 마을에 닿는다. 학사평은 옛부터 학이 많이 날아오고, 선비들이 자주 찾아 풍류를 즐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00여가구, 160여명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 학사평은 설악산과 울산바위가 가장 잘 조망되는 곳이면서 순두부와 척산온천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 온천 1세대인 척산온천은 지하 4000m에서 지열로 덥혀진 온천수가 암반의 균열된 틈을 흐르다가 분출한다. 불소와 라듐 성분이 풍부한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강알칼리성 온천수이다. 관절염, 피부병, 신경통, 눈병, 위장병, 외부상처 등에 특효가 있어 연중 온천객이 몰린다. 1975년 5월 10평 규모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고 척산온천원탕 영업을 개시했으며 1985년 지금의 척산온천휴양촌이 세워졌다.
대온천장, 가족탕, 찜질방 및 객실이 완비돼 있다. 투숙객에는 온천이용권이 제공돼 실속형 여행객들에게는 최고의 겨울철 휴양지다. 일대에 넓게 펼쳐진 잘 생긴 소나무 숲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시설은 노후화돼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지만 그래서 더 편한 곳이다. 뜨끈한 노천탕과 솔향 가득한 차가운 대기에 몸을 맡기면 묵었던 피로가 한 순간에 날아간다. 학사평 순두부 거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두부 전골과 황태 메뉴로 든든하게 속을 채우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그 자체로 훌륭한 산책 코스다.
휴양촌과 1분 거리에 척산온천장과 척산족욕공원이 있다. 설악산, 청초호, 아바이마을, 속초중앙시장 등이 모두 10~15분 거리에 있다.
신흥사와 권금성
속초는 절반이 설악산이다. 속초 여행에서 설악을 빼면 아쉽다. 등산을 하지 않고 설악산을 즐기려면 신흥사(新興寺)나 권금성(權金城)을 방문하면 좋다.
신흥사는 신라 652년(진덕여왕 6)에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됐다. 사리를 봉안한 9층 석탑을 세워 향성사(香城寺)라 불렸다. 그 후 의상대사가 능인암터로 옮겨서 향성사를 중건하고 절이름을 선정사(禪定寺)라고 고쳐 지었다.
1644년(인조 22)에 영서(靈瑞)·연옥(蓮玉)·혜원(惠元)등 3명의 승려가 3재(災)를 면하려면 절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꿈을 꾸고, 선정사 옛터 아래쪽 약 10리 지점에 다시 절을 짓고 이름을 새로 지은 게 신흥사다.
1647년(인조25)에 건립된 극락보전(보물 1981호),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 제1721호), 목조지장보살삼존상(보물 제1749호) 등의 보물과 향성사지 3층석탑과 순조가 내린 청동시루와 범종, 경판 277장, 사천왕상 등 다수의 문화재가 있다. 범종은 6.25때 총탄에 훼손돼 수리됐다.
일주문 앞에는 높이가 15 m에 달하는 세계 최대 청동불상인 설악산 통일대불이 봉안돼 있다. 불사 기간만 10년이 넘게 걸렸다. 통일을 염원하는 실향민들의 아픔이 밴 발원문이 적혀 있다.
설악산 권금성
설악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에 오르면 속초 시내는 물론이고 천년 고찰 신흥사와 사방에 솟아 있는 기암절벽들과 골짜기의 폭포와 작은 물길까지도 눈 앞에서 감상할 수 있다. 눈 앞의 모든 것이 웅장하고 장엄하다. 10여 분의 탑승 시간이 턱없이 짧게 느껴진다. 권금성은 해발 800m의 암반지대 쌓은 둘레 2km의 산성이다. 고려말 몽고가 침입했을 때 권씨와 김씨가 하루 만에 쌓았다해서 '권금성'으로 불린다.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등산을 하지 않고도 설악의 절경을 만끽할 수 있다.
바다로 흘러내리는 섬, 실향민의 애환이 서린 아바이마을(청호동)
아바이마을로 인도하는 갯배
속초 중앙동 건너편 설악대교(구 청호대교) 북단 해안 쪽에 위치한 ‘아바이마을’은 대표적인 실향민촌이다. 함경도 말로 아바이는 할아버지나 늙은 남자를 뜻하는데 흥남철수작전 때 피난온 함경도 출신의 실향민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복 이후 실향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쉬운 곳을 택해 정착한 곳이 휴전선과 가까운 속초 청호동이었다.
바닷가 허허벌판 움막 속에 살면서 실향민들이 바란 것은 단 하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나도록 분단이 계속되면서 많은 이들은 이미 청호동에 묻혔다. 엄마 손 잡고 내려온 철부지 남자아이는 바닷바람과 함께 속절없이 늙어가고 있다. 밀려든 피난민들로 인해 속초의 인구가 급속도로 늘고 경제 규모도 커지면서 1963년 속초시로 승격했다. 속초시 발전에 실향민들의 공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바이마을은 ‘갯배’를 타고 가야 제맛이다. 중앙동과 청호동을 오가는 갯배는 수시로 운행된다. 동력선이 없어 배바닥에 설치된 밧줄을 잡아 당겨 움직이는 멍텅구리 갯배는 뱃시간도 없이, 승선료 500원만 내면 언제든지 누구든지 탈 수 있다. 갯배를 타고 채 5분도 안돼 도착한 아바이 마을에는 드라마에 등장했던 ‘은서네’를 시작으로 골목골목 아바이순대, 돼지국밥, 오징어순대 등을 파는 식당이 즐비하고 관광객들이 가득하다.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으로 있는 양양 출신의 이상국 시인은 ‘청호동 새섬’에서 청호동 실향민들의 애환을 절절하게 적고 있다.
청호동 방파제 너머 떠다니는 섬이 있다는 걸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장화를 신은 채 청호동 사람들마저 잠들고
흥남이나 청진물이 속초물과 쓰린 속으로
새섬 근처에서 캄캄한 소주를 까다가 쓰러지면
북쪽으로 날아가는 새섬을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중략>
나룻배 끊기면 흐르는 땅 모래 껴앉고 아바이들 잠드는
청호동 방파제 너머 이남 물과 이북 물이
야 이 간나이 새끼 마이 늙었구만 하며
공개적으로 억세게 무너지면
동해 속으로 사라질 청호동은 잠시 객지일 뿐이고
분명히 객지여야 한다.
식당가 뒤편으로 나오면 방파제에 막힌 호수 같은 바다와 백사장이 펼쳐지고 멀리 바다 한 가운데 새섬이 보인다. 청호동 사람들의 애간장 녹아드는 사연들은 이제 전설로 전해지는 옛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분단이 이어지는 한 ‘분명히 객지여야 하는 청호동’은 여전히 그들에게는 유일한 안식처일 것이다.
아바이순대는 돼지대창 속에 선지와 찹쌀, 배추우거지, 숙주 등을 넣고 만든 함경도식 음식이다. 다른 지방의 순대와 달리 푸짐한 게 특징이다. 아바이순대는 배곯던 시절 유일하게 배터지게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의정부 부대찌개, 대구 납작만두, 아바이순대 등 모두가 전쟁 후 가난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들이다.
속초 대포항, 외옹치해변의 바다향기 & 동명항, 영금정
외옹치 바다향기로
속초바다하면 대포항이 먼저 떠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고깃배에서 방금 건져낸 활어를 그 자리에서 바로 회를 떠 주는 바다 위의 포장마차들이었다. 바다의 비릿함이 가시지 않은 점포에서 메뉴도 없이 오로지 회 한 접시가 전부였던 대포항 회가 그리워 무작정 새벽을 달려 대포항에 도착한 적도 있었다. 이제 말끔히 단장된 대포항에서 그때의 맛과 분위기를 느낄 수는 없지만 고깃배와 관광객들로 붐비는 대포항은 언제나 활기가 넘친다.
대포항 길을 따라가면 해안가 끄트머리 외옹치에 이른다. 얕으막한 외옹치 덕산(德山) 꼭대기에는 조선시대 봉수대터가 남아 있다. 덕산봉수는 남쪽으로 양양군 수산봉수, 북쪽으로 간성의 죽도봉수에 봉홧불을 올렸던 곳이다. 2012~2013년 호텔롯데의 리조트 조성 과정에서 덕산봉수대 일대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신석기 시대 전기(기원전 5520~5580년) 유적 200여 점이 출토됐다. 동해안 지역 신석기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속초 시립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외옹치 해안은 1970년 무장공비 침투 사건으로 일반인 출입금지 구역이었으나 2018년 강릉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에 이어 ‘속초 바다향기로’ 탐방로가 조성되면서 개방됐다. 속초해변-바다향기로(외옹치해수욕장-방파재길-조도(새섬))-외옹치항-대포항 전망대로 이어지는 ‘속초해변길’이 지나는 코스이다. 인근에는 설악해맞이공원이 새로 조성됐다. 시원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반세기 동안 숨겨져 왔던 동해안의 비경을 감상할 수 있다.
해질녘 설악산을 배경으로 잔잔한 바다에서 흔들거리는 고깃배가 어우러진 동명항 풍경은 삶의 고달픈 현장이면서도 한 폭의 그림과 같다. 포구에 늘어선 횟집에는 새벽에 잡아 올린 신선한 해가 가득하다.
동명항 영금정
동명항 끝자락에 영금정(靈琴亭)이 있다. 암반 끝 뾰족한 바위산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거문고가 우는 소리 즉 ‘영금’과 같다고 하여 그 바위와 정자를 영금정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영금정의 일부를 파괴했다. 속초 시민들이 부서진 바위산 위에 영금정을 다시 세웠다. 작은 산 위에 있는 구 영금정은 폐쇄하고, 바다에 다리를 놓고 새로운 영금정을 지었다. 방파제 끝 새빨간 정자는 옛 정취는 없지만 앙증맞다.
영금정 인근의 속초 8경 중 하나인 속초등대전망대에 오르면 속초시와 동해바다, 설악산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이곳에서 보는 일출이 뛰어나다. 1957년 처음 점등한 이후 매일 밤 45초 간격으로 4번씩 35km 떨어진 바다까지 불빛을 비추어 뱃길을 밝힌다. 해양수산부에서 선정하는 이달의 등대(2021년 2월)에 선정되기도 했다.
속초의 박물관 여행
석봉도자기미술관은 도예가 석봉(石峰) 조무호(趙懋鎬) 선생의 작품과 우리나라의 다양한 도자기를 전시하는 도자기 전문 미술관이다. 1997년 여주에 문을 열었다가 2003년 속초시 청초호변으로 자리를 옮겼다. 석봉 도자기미술관은 2층 건물로 1층은 로비 전시실, 영상실, 도자기 자료실, 물레 체험실 등이 있다. 2층에는 석봉 선생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대형 도자기와 도자기 벽화 등을 관람하고 직접 제품도 구매할 수 있다.
속초 청초호
미술관 옆에는 파란 하늘을 품은 듯한 청초호(靑草湖)가 잔잔하게 펼쳐져 있다. 호수의 4분의 1을 매립해 엑스포센터와 호수공원, 둘레길 등을 조성하였다. ‘99 강원 국제관광 엑스포’를 상징하는 73.4m의 전망대와 아이맥스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주제관 등이 있다. 해상유람선을 타는 선착장도 바로 곁이다.
국립산악박물관은 우리나라 등반의 역사와 명산에 대한 정보가 총 망라돼 있다. 산악교실, 고산체험실, 산악인물실, 암벽체험실 등이 운영된다.
속초시립박물관은 2005년 개관했다. 실향민문화촌, 발해역사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실향민문화촌은 이북 5도의 가옥 형태와 청호동 아바이마을의 초기 생활 모습들이 재현돼 있다. 이북 5도 가옥은 숙박도 가능하다. 발해역사관에는 발해역사와 유적지 등을 영상과 유적으로 만나볼 수 있다.
속초의 곰치국, 홍게, 닭강정
푸르렀던 바다에 저녁놀이 깃들기 시작하면 불현듯 시장기가 느껴진다. 동명항이나 대포항의 회센터나 인근 횟집에서 신선한 회와 홍게를 즐길 수 있다. 선결제나 셀프 서비스를 싫다면 인근 횟집을 이용하면 된다.
속초에 가면 물곰탕 혹은 곰치국은 꼭 먹어야 한다. 곰치국은 곰치라는 생선에 묵은 김치와 무, 대파 등을 넣고 끓인 ‘매운탕’이다. 곰치는 못 생기고 생선 비늘을 한 꺼풀 벗겨낸 것처럼 허옇게 드러나 보인다. 생선살은 점액질처럼 진득진득한데 국물 맛은 환상적이다. 머리가 작고 입이 커서 물메기로도 불린다. 먹잘 게 없어 잡히면 바로 바다에 던져 버린다고 해서 ‘물텀벙이’ 라고도 불린다. 그냥 버리거나 가난한 부두 노동자들이 즐겨 먹었던 생선인데 지금은 귀해져서 서울로 보낼 물량도 없다고 한다.
속초 중앙시장의 닭강정도 속초의 명물이다. 튀긴 닭에 물엿을 넣고 만든 양념에 조린 닭요리이다. 양념치킨과 비슷한 듯 그보다는 더 달고 시간이 지나도 양념치킨처럼 꿉꿉하지 않고 바삭함을 유지하는 게 속초 닭강정의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