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간한 와인 애호가가 아니고서는 국내에서 조지아(Georgia) 와인을 아는 이는 드물다. 2008년 드라마 온에어에서 주인공 김하늘과 이범수가 조지아 와인 ‘오카디 레드 드라이 2005’를 마시는 장면이 나오면서 잠시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이내 관심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최근 몇몇 와인 수입사에서 다시 조지아 와인을 국내로 들여오면서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조지아는 와인을 가장 먼저 만든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만큼 긴 역사와 깊고 순수한 맛을 간직하고 있다.
8000년 전부터 이어온 와인 생산국 … 스탈린‧푸시킨이 사랑한 와인
조지아는 과거 소비에트 연방(Soviet union, 소련)에 속했던 공화국이다. 예전에는 그루지아로 불렸으며 소련이 무너지면서 독립했다. 한국과 큰 교역이 없어 비교적 낯선 국가이지만 이 나라에서 배출한 두 가지 명물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조지아의 명물 중 하나는 스탈린이다. 스탈린의 고향이 조지아로 스탈린은 젊은 시절 반대파에게 ‘그루지아(조지아)의 백정’이라 불렸다.
또 하나는 와인이다. 조지아는 고고학자들이 지목하는 와인의 최초 생산지 후보 중 하나다. 이 지역의 유적에서는 5000년 이전의 포도씨앗이 나온 바 있다. 심지어 꺾꽂이로 포도나무를 개량해 과학적으로 번식, 농사를 지었을 것으로 보이는 흔적도 나왔다. 학자들은 이 지역의 와인 양조역사가 8000년전부터 이어져 오는 것으로 추정한다.
일부에서는 와인이라는 말도 조지아에서 왔다고 주장한다. 조지아어로 와인은 그비노(Ghvino)인데 이것이 이탈리아로 가서 비노(Vino)가 되고, 프랑스에서는 뱅(vin), 독일에서 바인(Wein), 영국에서는 와인(Wine)으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스탈린이 고향 조지아의 와인을 사랑한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스탈린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Aleksandr Pushkin)도 조지아 와인의 열렬한 팬이었다. 러시아 귀족 출신인 그는 최고 인기인 부르고뉴 와인보다 조지아의 와인을 더 사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조지아의 와인산업은 그동안 크게 발전하지는 못했고 국제적으로도 위상이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이는 조지아의 지리적‧역사적인 문제와 연관된다. 지리적으로는 중동과 러시아의 사이에 위치해 과거에는 로마‧페르시아‧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페르시아와 터키 간 분쟁으로 국토가 반으로 나눠지기도 했다. 1870년 러시아가 터키로부터 통치권을 뺏은 후 1991년 독립 전까지 조지아는 줄곧 러시아의 영향 아래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에 들어 간 이후에는 상업적인 양조기술 발전이 막혔다. 지금도 조지아의 양조장은 과거 방식으로 와인을 만드는 곳이 많으며 선진화된 양조기술의 도입에 수동적인 편이다.
하지만 현재 조지아의 와인산업은 빠르게 성장 중이다. 이들의 포도원은 4만5000헥타르(4억5000만제곱미터)로 연간 1500억 리터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냉전시대에 조지아 와인은 거의 러시아로 수출됐으나, 소련 붕괴 후에는 여러 나라로 수출국을 넓히고 있다. 특히 2016년 중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으면서 중국으로 많은 양을 수출하고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크베브리 양조법 … 묵직한 탄닌이 주는 매력
조지아의 전통 와인 양조법은 크베브리(Kwevri)라는 큰 항아리를 입구만 내 놓은 채 땅에 파묻은 후 포도를 으깨 넣어 발효시킨다. 한국의 과거 김장을 떠올리면 된다. 땅 속에 묻은 항아리는 온도의 편차가 줄고 적당량의 공기가 소통해 자연스러운 양조와 숙성을 돕는다. 양조부터 숙성까지 모든 과정이 이 크베브리 안에서 해결된다.
크베브리 용량은 20~5000L로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와이너리에서 사용하는 것은 2000~3000L가 보편적이다. 진흙을 한겹씩 덧붙여 가며 3~5cm 두께의 항아리가 만들어지면 1000도 이상 온도의 가마에 구워낸다. 이렇게 구워진 항아리를 땅 속에 묻은 후 수학한 포도를 껍질과 줄기째 으깨 넣고 입구를 진흙으로 밀봉한다. 6개월~1년이 되면 와인 액만 분리해 다른 크베브리로 옮겨 숙성한다. 남은 크베브리는 깨끗하게 세척해 다음해 양조에 사용된다. 조지아 와이너리 중에는 몇 세기 전에 만들어진 크베브리를 아직까지 사용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와인은 껍질과 줄기에서 나온 탄닌이 강한 편으로 맛이 묵직하다. 화이트와인도 무거운 탄닌을 가지고 있으며 색은 호박빛으로 진하다. 그래서 조지아 전통 화이트와인을 오렌지와인 혹은 앰버와인(amber wine)이라고 부른다.
이런 양조 방식은 유네스코에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대규모 생산이 불가능해서 소규모 양조장을 남기고 대형 양조장은 조금씩 스테인리스 양조로 바뀌는 추세다.
드물게 5년 이상 숙성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앰버 와인은 대부분 수확 연도에서 1~3년 안에 마시는 게 권장된다. 조지아 와인은 화이트와인, 레드와인 할 것 없이 고기 요리와도 잘 조화를 이뤄 최근에는 해외 미슐랭 레스토랑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아열대성 해양‧산악‧반사막 등 다양한 기후에 와인 스타일도 제각각 … 재배되는 포도만 526종
조지아의 와인산업이 과거에 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지리와 역사에 있다면, 와인 역사가 오래된 이유는 자연환경에 있다. 서쪽에 따뜻한 흑해를 두고 북쪽으로 높은 산맥을 둔 조지아는 지나치게 덥지 않은 여름과 온화한 겨울로 포도가 자라기에 천혜의 환경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작은 국토에서 아열대성 해양기후, 산악기후, 온대, 반사막기후까지 다양한 기후 조건을 갖추고 있다. 다양한 와인 맛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조지아의 국토의 3분의 1은 산악지대인데 가장 대표적인 코카서스산맥은 북쪽 러시아와의 경계에 있다. 해발고도가 4000~5000m에 이른다. 이 산맥이 러시아에서 오는 차가운 북풍을 막아준다. 이 지역은 차가운 대륙성 산악기후를 띠지만 흑해에 가까운 서쪽으로 갈수록 비가 많아지는 아열대성 해양기후가 나타난다. 그 사이 온대 기후도 볼 수 있다.
코카서스산맥의 남서쪽은 흑해까지 이어지는 평원으로 이뤄져 있다. 이 곳에는 크고 작은 강줄기만 2만5000여개에 이른다. 이 강은 미네랄이 풍부한 충적토양을 만든다. 조지아는 진흙의 땅이라고 불릴 만큼 진흙이 많고 일부 지역에서는 고인 석회암질 토양이 분포한다. 때문에 조지아 와인은 미네랄감이 풍부한 순수한 맛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지아는 18개의 와인 생산지가 원산지 지정보호(Protected Designation of Origin, PDO)를 받고 있지만 가장 주요한 와인 생산지는 코카서스산맥 아래 분지 지역인 카헤티(Kakheti)다. 조지아의 와인 생산의 중심지로 70%가 여기서 나온다. 코카서스산맥 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분지에 알라자니(Alazani) 강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다 보니 포도나무를 비롯해 과일나무들이 잘 자란다. 그 중에서도 카헤티주의 중심 도시인 시그나기(Sighnaghi)와 텔라비(Telavi)가 대표적인 와인 산지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포도종류가 재배되고 있다. 집계된 포도 종류만 해도 526종이지만 정부는 이 중 38종만 공식 와인양조용으로 지정했다. 대표적으로는 청포도종인 므츠바네(Mtsvane), 캇세텔리(Rkatsiteli), 키시(Kisi)와 적포도종인 사페라비(Saperavi)가 유명하다.
므츠바네는 아주 옛날부터 재배된 전통 품종으로 양조 후 복숭아향과 풍부한 미네랄 풍미를 가진 와인이 된다. 캇세텔리도 1세기부터 재배된 것으로 기록된 전통 품종으로 줄기가 붉은색이며 산미가 인상적이다. 양조 후에는 청사과, 모과, 배 등의 복합적인 풍미를 자랑한다.
키시는 캇세텔리와 므츠바네의 교잡종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향이 매우 강렬하고 독특한데 양조 후에는 배, 금잔화, 담배, 호두 등의 묵직한 향을 가진다.
사페라비는 조지아 와인의 왕이라 불리는 레드와인 품종이다. 두꺼운 껍질에 과육도 붉어 양조 후에는 매우 짙고 무거운 붉은 빛을 가진다. 사페라비는 조지아어로 ‘색의 장소(place of color)'라는 뜻이다. 감초, 구운고기, 담배, 초콜릿, 후추의 풍미를 가진다. 탄닌이 무겁지만 부드럽고 산미도 강해 식사와 함께 즐기기 아주 좋다.
치나달리 에스테이트 치나달리(Tsinandali Estate Tsinandali) 1888년 왕족이 소유한 프린스 알렉산더 차프차바제(Prince Alexander Chavchavadze) 와이너리에서 출시된 화이트 드라이 와인으로 조지아 최초의 병입 와인이자 조지아에서 가장 오래된 랜드마크 와인 중 하나다.
두클라헤 르카치텔리(Dugladze Rkatsiteli)는 대표적인 조지아 화이트 와인으로 카헤티 동부 카르다나히(Kardenakhi) 지역에서 재배된 르카치텔리 품종으로 만들며 깊고 복잡한 맛을 지니고 있다. 르카치텔리 품종은 기원전 3000년경부터 유래하며 러시아 및 구소련 독립국가연합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18%를 점한다. 주로 당도 높은 디저트와인이나 주정강화와인으로 만든다.
티빌비노 사페라비(Tbilvino Saperavi)는 카헤티 지역에서도 동부에 속하는 킨즈마라울리(Kindzmarauli), 나파레울리(Napareuli), 크바렐리(Kvareli), 콘돌리(Kondoli) 등지에서 생산한 검은 빛에 핑크색 육질을 보이는 사페아비(saperavi) 포도 품종 100%로 만든다. 체리, 바닐라, 오디 향이 복합적으로 나며 여운이 길다.
KTW 로얄 무크쟈니(KTW Royal Mukuzani) 조지아와 코카서스 지역의 가장 큰 와인회사인 KTW(Kakhetian Traditional Winemaking)에서 생산, 수출한다. 무크쟈니 지역에서 1888년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카헤티 지역의 대표적인 핑크색 세미 스위트 레드 와인으로 사페라비 포도만을 쓴다. 여러 국제 대회에서 입상하면서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 회사는 또 조지아 토종 Chinuri, Tsolikauri, Tsitska 등의 품종으로 만든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과 리즐링(Riesling)과 모스카토(Moscato) 품종으로 조지아에서 생산한 화이트와인도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