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의 죽음’ 이라는 말은 생소하다. 나이들고 병에 걸리면 어떤 세포든 죽기 마련이라고 막연히 알고 있지만 세포 스스로 또는 강제에 의해 또는 예정된 프로그래밍에 따라 소멸의 방법을 택한다. 세포들도 자기가 살기 힘들다고 생각되면 죽음을 택한다. 생명체의 한 일원이기 때문에 숙주를 살리기 위해 함부로 죽을 수 없는 게 세포의 처지다. 세포는 잘 죽어줘야 한다.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생명체의 존폐와 건강이 달려 있다.
세포사는 세포가 기능적인 역할은 유지하면서 물리적 요인이나 유전적 성질에 의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다. 세포 전체가 위축되면서 새로운 단백질이 합성되고 새로운 세포가 대체하게 되는데 세포자살 유전자의 순명은 주인에게 이롭지만 거역은 주인을 곤경에 처하게 한다. 세포사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인체 항상성과 기능조절에 중요하며, 자칫 암이나 퇴행성 질환을 유발하기도 한다. 세포사의 모든 것을 비교 분석해본다.
세포자살, 유전자와 미토콘드리아 지령에 따라 질서정연한 자기소멸 시행
의학적으로 중요한 세포가 죽는 방법은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세포자살 또는 세포자연사 또는 세포사멸 등으로 번역되는 아폽토시스(apoptosis)는 세포자살은 형태학적으로 세포의 수축, 세포막의 농포화 (blebbing), 핵의 절단 (nuclear fragmentation) 또는 핵붕괴 (karyorrhexis), 염색질의 응축 (chromosomal condensation), DNA의 뉴클레오좀간 절단 (intranucleosomal cleavage) 등으로 특징 지어진다.
아폽토시스는 1972년 호주의 생리학자 존 커(John Kerr)와 스코틀랜드 출신의 동료 학자인 앤드루 와일리(Andrew Wyllie), 앨러스터 커리(Alastair Currie)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됐다. 조직의 괴사와는 판이한 세포사멸 원리를 관찰하고 그리스어의 apart를 뜻하는 apo에 fall을 뜻하는 ptosis에서 착안해 이같은 용어를 만들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생명체의 탄생과 성장 등 일련의 과정에 세포의 사멸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재조명 받으며 비약적으로 연구가 활성화됐다.
세포자살이 진행되면 절단된 핵과 세포질 등이 한 덩어리로 돼 세포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데서 아폽토시스란 합성어가 만들어졌다. 탈락한 세포 덩어리를 세포사멸체(apoptotic body)라고 한다.
아폽토시스가 일어나는 과정을 살펴보면, 세포가 축소되면서 시작된다. 이후 인접하는 세포와 사이에 틈새가 생기고, 죽는 과정에 있는 세포의 핵 안에서는 유전물질인 DNA가 규칙적으로 절단돼 단편화되는 방법으로 세포가 사망한다. 마지막엔 세포 전체도 조각이 나 아포토시스 소체라고 부리는 것으로 된 후 주변에 있는 다른 세포에게 먹혀버리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된다.
아폽토시스는 인체의 초기 발생 과정에서 우리 몸의 형태를 만드는 데에도 관여한다. 성인에서는 정상적인 세포가 노화됐을 때 이를 제거하거나 이상이 생긴 세포를 소거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이런 아포토시스 현상은 미토콘트리아의 지령에 의해 일어난다.
쉽게 예를 들면 엄마 뱃속에 있을 초기에는 손 모양은 벙어리 장갑을 낀 것 같은 형태다. 발가락이나 손가락 사이가 벌어지지 않고 있다가 ‘계획된’ 세포 죽음의 과정으로 아폽토시스가 진행된다. 쓸모없는 세포들을 정해진 순서로 제거함으로써 다섯 손가락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손가락이 하나 적은 4개이거나, 하나 더 늘어나 6개의 손가락이 생기기도 한다. 계획된 세포 죽음(Programmed cell death, PCD)도 세포자살과 같은 과정을 보이므로 이 두가지를 같이 보는 학자도 있다.
아폽토시스는 자연스럽고도 중요한 생리기능의 한 부분이다. 건강한 세포 수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세포분열만 조절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신체 구조가 중복될 때도 사용된다. 예를 들어 성숙한 올챙이의 꼬리가 사라지거나, 인간 배아의 발달(예 다섯 손가락 형성)과 같은 특정 신체 부위의 발달에 역할을 한다. 결국 아폽토시스는 정상적인 생물체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폽토시스는 우리 몸 안에 입력된 생체프로그램으로 비정상세포, 손상된 세포, 노화된 세포가 스스로 사멸함으로써 전체적인 신체 건강을 유지해주는 필연적 메커니즘이다.
세포자살보다 포괄적인 개념이 ‘유전적 프로그램’에 의해 진행되는 세포사를 ‘’ ‘프로그램화된 세포사’(programmed cell death, PCD, 또는 예정된 세포사)라고 한다. PCD는 발생의 어느 단계에서 특정 세포가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면 치사 유전자가 작동하기 시작해 그 세포를 스스로 죽이는 것을 말한다. PCD의 개념이 더 포괄적이지만 보통 아폽토시스가 PCD와 같은 의미로 통용된다.
유전자와 미토콘드리아의 지령에 의한 세포자살(또는 PCD)와 달리 병적인 상태에서 갑자기 죽는 게 세포괴사(네크로시스, necrosis)다. 과거에는 세포의 죽음은 모두 네크로시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포에는 자발적인 죽음을 일으키는 방법이 여럿 있다는 게 과학적 연구로 알려진 것은 35년 남짓 밖에 되지 않았다.
네크로시스, 타의에 의한 ‘사고사’ 또는 ‘돌연사’ … 과거엔 모든 세포사가 괴사인줄 알아
네크로시스는 병적인 세포의 죽음이다. 화상, 타박상, 절상, 자상, 독극물 등 자극에 의해 일어나는 세포사다. 쉽게 말하면 세포의 ‘사고사’ 또는 ‘돌연사’라고 할 수 있다. 세포괴사의 경우 세포 밖에서 수분이 유입됨으로써 세포가 팽창해 파괴된다.
프로그램화돼 있지 않은 네크로시스는 장기간에 걸쳐 무질서하게 일어난다. 반면 유전자에 의해서 정교하게 조절되는 아폽토시스는 상대적으로 단시간에 질서 있게 진행된다. 아폽토시스는 능동적인 반면 네크로시스는 수동적이다.
괴사의 종류에는 총 6가지가 있고, 이 중 액화괴사와 응고괴사 등 두 가지가 일반적이다.
△응고괴사(coagulative necrosis)는 주로 허혈(ischemia)에 의한 경색(infarction)에 의해 세포가 괴사에 이를 때 생긴다. 세포가 충격을 받아 괴사에 이를 때 구조적 단백질이나 리소좀 효소(lysosomal enzyme)가 같이 변성돼 괴사된 조직이 응고돼 분해되지 않고 며칠 동안 보존된 상태를 말한다.
△액화괴사(liquefactive necrosis)는 주로 세균이나 곰팡이의 감염 시 세포가 괴사에 이를 때 생긴다. 세포에 감염이 일어나 괴사에 이를 때 가수분해효소(hydrolytic enzyme)에 의해 액체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 때 괴사한 조직에는 고름이나 액체가 형성된다.
△건락괴사(caseous necrosis)는 주로 결핵균, 매독균, 곰팡이의 감염 시 세포가 괴사에 이를 때 생긴다. 괴사된 조직이 치즈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응고 괴사와 액화 괴사의 중간쯤으로 생각된다. 즉 괴사된 세포가 분해되기 시작했지만 완전히 분해되지 않은 형태이다.
△지방괴사(fat necrosis)는 지방조직에서 세포가 괴사에 이를 때 생긴다. 지질가수분해효소(lipase)가 트리글리세라이드(triglyceride)를 지방산(fatty acid)으로 분해하고, 유리된 지방산은 칼슘 이온과 결합해 비누 모양의 물질을 만든다.
△섬유소성변성괴사, 유섬유소변성괴사(fibrinoid necrosis)는 주로 혈관 벽에 괴사가 일어날 때 항원-항체 복합체가 피브린(fibrin)과 함께 혈관벽에 쌓이는 것을 말한다. 주로 면역반응이 과도하게 일어나 혈관염(vasculitis)을 일으킬 때 발생하며, 심한 고혈압에서도 관찰된다. 이 괴사가 계속 진행되면 혈관을 막게 되어 허혈성 손상을 유발할 수 있다.
△괴저(Gangrene necrosis)는 세포에 혈액이 충분히 공급되지 못한 결과 발생한 괴사로, 잠재적으로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 이 증상은 부상, 감염, 혈액순환에 영향을 미치는 만성질환 등을 통해 일어날 수 있다. 괴저의 주된 원인은 혈류 감소로 세포가 사멸하게 된다. 당뇨병 및 장기간 흡연은 괴저 위험을 높일 수 있다.
괴사 치료의 첫 번째 단계는 일반적으로 죽은 조직을 수술적 또는 비수술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신체의 나머지 부분에 오래 붙어 있으면 더 퍼질 수 있다. 죽은 세포는 소화 효소를 방출하여 주변 세포를 죽이는 경향이 있으므로 제거하는 게 우선이다. 피부나 조직을 제거하거나 심하면 사지를 절단해야 한다. 최선은 괴사의 근원을 찾아서 근본적 치유를 하는 것이다. 괴사를 방치하면 치명적인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자가포식. 수명을 다하고 영양결핍에 빠지면 스스로 불필요한 세포 먹어 치워
자가포식(autophagy, 오토파지)은 메커니즘과 수명을 다한, 영양 결핍 상태의 세포가 스스로 먹어 없애는 과정이다. 자신의 단백질을 분해하거나 불필요한 세포 성분을 스스로 제거해 에너지를 얻게 된다. 그리스어로 스스로 (auto)와 먹는다 (phagy)는 뜻의 단어가 합쳐진 말이다.
세포 안에서 이뤄지는 ‘재활용’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재활용을 위한 지나친 세포 물질 제거는 결국 세포의 사멸을 초래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제2형 세포예정사(programmed cell death)로 불리기도 한다. 암세포가 수명을 연장하는 방편으로 자가포식을 활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자가포식을 억제하면 암을 치료하는 계기를 얻을 수 있다.
네크롭토시스(Necroptosis)는 네크로시스와 아폽토시스의 합성어로 단순한 물리적 충격에 의한 수동적인 세포 사멸인 네크로시스와 구별되는 특정한 신호에 일어나는 능동적인 반응이다. 네크롭시스는 프로그램화된, 예정된, 질서 정연한 네크로시스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네크롭시스는 바이러스 방어 수단이다. 바이러스의 증식은 숙주 세포의 상태에 달려있다. 숙주세포는 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하기 위해, 감염이 일어날 경우 숙주세포의 죽음을 위한 유전자를 발현해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한다.
반면 바이러스는 숙주세포의 사망을 억제해 자신을 증식시키기 위해 생존 기전을 작동시킨다. 바이러스는 아폽토시스와 네크롭토시스를 억제하려 애쓴다. 이에 숙주세포는 어떻게든 지탱하려는 바이러스를 억제하기 위해 T세포를 증식시키는 생존 기전을 발휘한다.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숙주세포의 또 다른 방어 시스템으로 네크로톱시스가 주목받고 있다. 아폽토시스가 억제되면 그 대안으로 네크로톱시스를 활성화시켜 바이러스로부터 숙주세포를 보호한다는 것이다.
세포의 죽음을 활용한 신약개발
모든 세포에 들어 있는 단백질은 다른 분자의 수용체 또는 효소처럼 특정한 기능을 수행한다. 이런 메커니즘에 장애가 생기면 세포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 암 등 여러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 그래서 신약들은 표적으로 삼은 단백질의 생성과 흡수를 억제하거나 촉진하면서 병적 증상을 개선하는 쪽으로 작용하도록 설계된다. 물론 상당수는 표적단백질을 확인하지 못한 채, 약리기전을 규명하지 못한 채 임상시험을 거친 후 입증된 효과만으로 승인받기도 한다.
최근 ‘네이처커뮤니케이션’에 실린 논문에는 세포가 다양한 약물에 따라 서로 다르게 죽는다는 보고가 실렸다. 있었다. 로만 수바레브(Roman Subarev) 스웨덴 카롤린스카 의대 의료단백질·유전정보학 교수는 “세포가 서로 다른 약에 의해 서로 다른 방법으로 죽는다는 걸 발견했다”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포가 죽는 방법은 괴사(necrosis), 세포자살(apoptosis), 자가포식(autophagy) 세 가지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연구에서만 최소한 13가지의 다른 방법을 관찰했다”고 말했다.
세포의 죽음은 신약개발에 다양하게 응용된다. 김유선 아주대 의대 생화학교실 교수팀은 네크롭토시스(Necroptosis) 과정에서 RIP3 단백질이 활성화돼 골관절염을 일으키는 것에 착안, 이를 억제하는 치료제를 개발 중이다.
중국 장쑤성 쑤저우 소재 아센티지파마(Ascentage Pharma, 亞盛醫藥)는 지난 9일 세포자살을 유도하는 Bcl-2/Bcl-xL 억제제인 ‘APG-1252’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희귀의약품 지정을 받았다. APG-1252는 Bcl-2와 Bcl-xL 단백질을 동시에 선택적으로 억제해 세포자살을 회복시키는 새로운 소분자 신약후보물질이다. 현재 미국과 호주에서 진행성 말기 소세포암 환자를 대상으로 1상 용량 확정 임상시험이 진행되고 있다. 지금까지 도출된 APG-1252의 임상 데이터는 SCLC 및 기타 말기 고형종양 환자에서 긍정적인 안전성 프로필과 잠재적 유효성을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