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2번째 와인 생산지, 관개시설로 천혜의 포도 재배환경 조성 … 뛰어난 품질에 저렴한 가격 인기
미국은 가장 중요한 와인 소비국이자 생산국이다. 신세계 와인 생산국 중 가장 많은 량을 생산하면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와이너리를 보유하고 있다. 아울러 끊임없이 첨단 기술을 도입하며 와인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미국 전 지역에서 와인이 생산되는 것은 아니다, 주로 ‘퍼시픽 노스웨스트’(Pacific Northwest)로 불리는 태평양 해안을 따라 와인 산지가 모여 있다. 가장 남쪽으로는 캘리포니아주, 그 위로 오리건주, 가장 북쪽의 워싱턴주 등이다. 이 순서대로 미국이 3대 와인 생산지가 결정됐다. 해안가 산맥이 발달한 이 지역은 따뜻한 기후, 넉넉한 일조량, 해풍으로 조절되는 기온 등 수준높 은 와인을 재배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다.
이중 워싱턴주는 균일한 품질의 좋은 와인을 합리적인 가격에 내놓아 미국 내에서 인기가 높다. 워싱턴 와인은 주로 10~50달러에 가격대가 형성돼 있다. 생산되는 와인의 수준 차가 크고 상위 와인에 가격이 높은 캘리포니아나 오리건 와인에 비해 매일 마시기에 부담 없는 가격과 크게 실패하기 어려운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를 자랑하므로 와인 초보가 도전해 보기에 좋다.
상업화 50년 만에 미국 2위 생산지역으로 성장
워싱턴주의 와인 역사는 비교적 짧은 편이다. 이 곳에서 처음 와인용 포도를 재배한 이들은 1860~1870년대에 정착한 이탈리아와 독일계 이민자였다. 하지만 자연환경과 금주법 등 정치적인 문제로 당시 와인 생산은 가내 수공업 이상으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1960년대 소규모로 와인을 양조하던 로이드 우드번(Lloyd Woodburne) 박사는 자신의 동료들과 와인양조업자 연합을 만들어 공동으로 와인을 생산하며 상업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1967년에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최초로 까베르네 소비뇽, 게뷔르츠트라미너, 피노누아, 요하니스베르크 리슬링 등의 품종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1974년 워싱턴와인협회(Washington Wine Institute, WWI)가 발족하면서 워싱턴 와이너리에 대한 세부 규정이 생기고 품질을 관리했으며, 1980년대 메를로 품종의 인기 붐을 타고 메를로 와인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1990년대에 북서부 지역인 오리곤·워싱턴·아이다호 주의 와인 수출을 지원하는 북서부와인연합(Northwest Wine Coalition)이 설립되고 해외 진출도 본격화되면서 세계에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드번 박사가 만든 양조연합은 이후 1984년에 콜럼비아와이너리로 재탄생, 지금의 워싱턴 와인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이 곳 와이너리들은 빠르게 발전해 1960년대 15군데에 불과하던 것이 1995년에는 88개소로 늘어났고 2000년에는 145개소에 이르렀다. 현재 워싱턴주 8곳에 산재한 와이너리는 850여개로 모두 합치면 대략 161㎢에 달한다. 오리건을 제치고 캘리포니아 다음 가는 생산량을 자랑한다.
비만 빼면 천혜의 환경 … 유럽과 달리 과학으로 자연환경 조절
워싱턴의 와인 역사를 알려면 이 지역 기후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워싱턴의 가장 큰 도시인 시애틀은 일명 ‘비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습하고 강수량이 많다. 일년 내내 비가 온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워싱턴주 역시 습하고 비가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절반만 맞는 말이다.
시애틀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올림픽산맥, 서쪽에는 캐스케이드 산맥이 있다. 이들 산맥은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습기를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비구름은 올림픽산맥에 막혀 한바탕 비를 뿌리고, 시애틀에서 다시 비를 내린 후 캐스케이드에서 마지막 습기를 털어낸 후 건조해져서 산맥을 넘어간다. 이 지역의 연간 강수량은 순서대로 340cm, 96cm, 213cm다. 이른바 ‘레인 섀도 이펙트(Rain Shadow Effect)’다.
이렇게 두 산맥과 도시 하나를 지나는 동안 습기를 탈탈 털어낸다. 캐스케이드 산맥 서쪽은 연 강수량이 30cm 이하일 정도로 비가 적은 사막기후를 형성하고 있다. 와인너리들은 이곳에 모여있다.
포도가 양조를 위한 충분한 당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건조한 날씨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부 워싱턴주는 연중 약 300일 동안 구름이 끼지 않는 맑은 날씨다. 평균 17시간에 이르는 일조량까지 갖춰 적절한 당도를 유지하는 데 최적이다. 습도가 높으면 포도의 당도가 낮아질 뿐만 아니라 각종 병에 쉽게 걸릴 수 있다.
이밖에도 보르도와 같은 위도로 따듯하지만 지나치게 덥지 않은 기온, 평균 10도 이상 차이나는 일교차는 적당한 산도를 가진 섬세한 와인용 포도를 재배하는 데 안성맞춤의 환경을 조성한다.
문제는 지나치게 가물기 때문에 포도나무가 자라는 데 필요한 수분도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워싱턴 와인은 캘리포니아와 오리건에 비해 상업적 발달이 늦었다.
이를 본격적으로 해결한 게 1970년대 들어서 첨단 관개(Irrigation) 농법이 발달하면서부터다. 동부 워싱턴주를 관통하는 콜럼비아강에서 물을 끌어다가 필요한 시기에 적절한 양을 물을 공급하면서 이 지역 와이너리가 빠르게 발전했다.
현재 이 지역의 포도밭에는 포도나무에 물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드립 또는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필요한 만큼의 물만 주어지고 있다. 물을 주는 시간과 급수량을 과학적으로 계산해 포도나무의 스트레스를 조절하면서 포도의 숙성도를 높이는 게 특징이다.
밭이 가지는 고유의 환경인 ‘떼루아’를 중시하는 구세계 와인생산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발상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은 이런 관개를 법률로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하지만 워싱턴주는 과감하게 과학으로 자연을 통제해 와인의 수준을 높이는 쪽으로 결단했다.
그 결과 포도의 당도가 높아져, 양조한 와인의 알코올 함량은 높은 편이다. 당분이 양조를 거쳐 알코올로 변하기 때문이다. 이 지역 레드와인의 알코올 함량은 14∼14.5도, 화이트와인은 13도로 오리건주에 비해 1~3도 높은 편이다. 과일향도 풍성하며 캘리포니아 와인처럼 보디감이 단단하면서도 오리건 와인처럼 섬세한 산도를 자랑한다.
유명 품종 위주, 렘베르거 등 실험적 품종도 재배 … 다양한 토양, 지역마다 개성
비교적 서늘해 섬세한 피노누아, 소비뇽블랑 등을 재배하는 남쪽 오리건주와 달리 따스한 워싱턴은 남쪽 캘리포니아처럼 다양한 포도 종류를 재배한다. 주요 생산 품종은 메를로, 까베르네 소비뇽, 샤르도네, 리슬링 등 국내외에서 인기가 많은 유명 품종이다. 시라, 소비뇽블랑, 슈냉 블랑, 세미용 등 최근 인기가 높아지는 품종을 재배하는 농가도 늘고 있다.
아주 실험적이게도 매들린 앤저빈(Madeleine angevine, 주로 영국에서 재배되는 화이트 와인 품종)이나 렘베르거(Lemberger,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재배되는 스파이시한 레드와인 품종) 등 낯선 품종을 기르는 와이너리들도 있다.
이 중 세미용은 샤르도네와 블렌딩하거나 프랑스 소테른 방식의 귀부와인으로 생산돼 인기를 끌고 있다. 또 매들린 앤저비와 렘베르거 역시 마니아들에게 인기다.
와이너리가 모인 캐스케이드 산맥 서쪽은 1만5000여 년 전 빙하기 시대의 영향을 받은 협곡 지형이다. 모래와 바위로 이뤄진 충적토와 빙하기 때 유입된 해저토양(Seabed Soil) 혹은 화산토(Volcanic Soil) 등 다양한 토양이 모여 있다. 때문에 생산지마다 개성이 강한 와인을 맛 볼 수 있다.
워싱턴주의 주요 와인생산지는 크게 5곳이다. 콜럼비아계곡(Columbia Valley), 야키마계곡(Yakima Valley), 레드마운틴(Red Mountain), 왈라왈라(Walla Walla), 푸제 해협(Puget Sound) 인근 분지 등이다.
이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콜럼비아밸리는 북으로는 캐나다 오카나간밸리(Okanagan Valley)에서부터 남으로 오리건주, 동쪽으로는 스네이크강을 따라 아이다호주 경계선까지 아우른다. 주 전체 생산량의 60% 정도가 이 지역에서 생산된다.
야키마밸리는 일반적으로 워싱턴 와인 컨트리의 심장부로 평가받을 만큼 뛰어난 와인이 생산된다. 호그 셀러스(Hogue Cellars)와 코베이 런(Covey run) 같은 유명 와이너리들이 이곳에 밀집해 있다. 다른 지역의 와이너리들도 이곳의 포도를 구입해 와인을 양조할 만큼 양질의 포도가 재배된다.
레드 마운틴은 레드 품종 재배에 최적의 장소로 알려져있다. 2001년 단독 AVA(American Viticultural Area)로 명명됐으며 헤지스 패밀리 에스테이트(Hedges Family Estate)와 클립선(Klipsun)을 포함한 워싱턴주의 몇몇 일류 와이너리가 이곳에 자리잡고 있다.
왈라왈라는 남쪽에 자리하며 주를 넘어 오리건주까지 이어져 있다. 오리건주와 워싱턴주의 특징을 반반씩 가지고 있는 곳으로, 규모는 매우 작지만 높은 평가를 받는 섬세한 와인들이 많이 생산된다. 까베르네 소비뇽, 피노누아, 메를로, 샤르도네, 소비뇽블랑 등 다양한 품종이 생산된다.
가장 작은 AVA인 푸제 사운드는 바다에 접하고 있는 해안가와 몇몇 섬으로 이뤄져 있다. 습한 기후로 와이너리도 소수에 불과하지만 실험적인 양조가들의 도전이 이어지고 있어 향후 발전이 기대되는 곳이다.
최근 서부 해안, 퍼시픽 노스웨스트에서 일어난 산불로 캘리포니아‧오리건‧워싱턴의 와인 생산에 비상이 걸렸다. 9월 갓 수확한 포도로 양조에 들어가던 차에 산불이 나서 다행히 포도 수확에는 큰 피해가 없으나 산불로 인한 재와 이상 기온 등이 양조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워싱턴주와인협회 등 미국 북서해안 전역의 와인 관련 단체들은 미국 의회에 구제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는 한편 재와 기온이 양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실험 중이다. 최종 테스트는 와인이 숙성된 후 18~24개월 후에나 이뤄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