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생들의 의사 국가고시 실기시험 연기를 놓고 갈등이 이어지고는 있지만 10일 기준 전공의 96% 이상이 의료 현장으로 복귀하며 국내 의사 파업은 일단락돼가는 분위기다. 그러나 국내와 명분이 조금 다를 뿐 영국‧스페인‧이탈리아‧나이지리아 등 세계 곳곳에서 의사 및 의료진의 파업이 일어났거나 진행 중이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최전선에 내몰린 의료진들의 피로감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스페인‧나이지리아 … 코로나19 이후 살인적인 근무환경 개선 요구 파업
스페인에선 지난 7월 14일 수도 마드리드의 병원 수련의와 전공의 약 2000명이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무기한 파업에 들어갔다. 의사뿐만 아니라 간호사·약사 등 병원에서 수련 중인 다른 보건의료 직종 근무자들도 파업에 동참해 마드리드 내 전체 파업 참가 인원은 4600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COVID-19, 코로나19) 확산이 시작되면서부터 짧은 휴식만 허락되는 장기간 근무와 살인적인 스케줄로 혹사당했음에도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며 파업 이유를 설명했다.
스페인 남부 발렌시아 지역의 전공의들도 이에 동조하며 7월 21일 무기한 파업에 들어갔다.
스페인 의료진들은 소셜 뉴스 웹사이트인 ‘레딧’에 ‘나는 지난밤 31시간 연속 근무했다’ ‘코로나19 양성임에도 근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한 달에 200시간 일하고 있다’ ‘외래 환자와 코로나19 환자를 같은 공간에서 보고 있다’ ‘내가 아무리 많이 일해도 67세까지는 은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30명의 환자를 연속으로 진료했다’ 등의 글을 올렸다.
이들은 정부를 향해 “영웅이라고 치켜세우지만 말고, 의료 상황을 개선할 해법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서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국영병원 의사들도 이달 7일부터 급여 인상 등을 요구하며 무기한 파업에 들어갔다. 국영병원 의사들을 포함한 전국전공의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Resident Doctors of Nigeria, NARD) 의사들은 코로나19 사태에 대해 국가가 의료진의 희생만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모든 보건직에 대해 생명보험 가입과 사망위로금 지급 등 규정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2억명의 인구를 가진 나이지리아의 10일 0시 기준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5만5456명으로 이중 사망자는 1067명이다. 나이지리아 질병통제센터에 따르면 보건직 800명 이상이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됐다.
영국‧독일‧이탈리아‧그리스에서도 의료진 시위
파업까지 가진 않더라도 코로나19에 지친 의료진들이 더 나은 근로환경을 요구하면 시위를 일으키는 광경은 세계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26일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NHS) 직원들이 런던 세인트토머스 병원 앞에서 임금 인상 등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이들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심각한 감염 위험 속에서 장기간 근무를 강요받고 있음에도 급여는 낮고 보호장비는 부족하다고 토로했다.
영국의사협회(Doctors’ Association UK, DAUK)가 NHS 직원 175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69%(1214명)가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에 실망해서 NHS 이직 결심에 영향을 줬다’고 답했다. 이 중 65%(1143명)는 ‘향후 1∼3년 안에 NHS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이미 NHS 소속 의사 8278명이 공석인 상황에서 이직 러시가 현실화되면 인력 부족으로 의료시스템 붕괴마저 우려된다.
사만다 배트 로덴(Samantha Batt Rawden) DAUK 회장은 “NHS에서 근무하는 의사들이 상처 받고 탈진한 상태에서 NHS를 떠나고 있다”며 “3년 안에 NHS를 그만두겠다는 의사가 속출하는 현상은 정부가 의사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프랑스도 의사와 간호사·간병인 등 보건·의료 부문 종사자들이 임금 인상과 인력 충원을 요구하며 파리‧마르세유·스트라스부르 등 대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정부에 공공의료 투자 확대와 국공립병원 직원 임금 인상, 장비 및 인력 확대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행진했다.
프랑스 간호사의 초임은 평균 월 1500유로(약 205만원)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낮은 수준에 속한다. 시위에 참여한 50세의 한 간호사는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월급이 월 1565유로(약 210만원)라며 “매일 시간외근무에 시달리며 적당한 장비도 없이 환자들을 돌본다”며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인력 충원과 투자 확대를 약속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독일에서도 지난 4월 말 의사들이 불충분한 코로나19 보호장비 상황에 항의하며 ‘벌거벗은 거리낌’이라는 온라인 누드 시위를 진행한 바 있다.
시위에 참여한 의사들은 진찰실에서 나체로 간단한 의료장비나 두루마리 화장지 등만 몸에 걸친 채 사진을 찍어 온라인에 올렸다. 이들은 “보호복, 세정제, 일회용 마스크는 좀처럼 제공되지 않는다”며 “의사들과 환자들이 코로나19와의 싸움에서 충분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독일 전역의 의사들과 동료들은 주민들을 돌보고 있다”다고 호소했다. 한 의사는 “상처를 꿰매라고 훈련을 받았는데, 나는 지금 왜 내 마스크를 바느질하고 있느냐”고 항변했다.
이밖에도 이탈리아‧그리스‧콜롬비아‧미국 등에서 코로나19 대응에 지친 의료진이 근무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과 시위에 나섰다.
길어지는 코로나19, 지치는 의료진 … 인력부족으로 악순환
이처럼 각국에서 이어지는 의료진 파업에 대해 일각에서는 “장기화된 코로나19로 의료진의 과로가 임계점을 넘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코로나19 환자가 폭증한 지역에서 근무한 의료진의 70%가 장시간 과로에 시달린다는 보고가 나왔다. 매사추세츠주의 한 요양시설에서는 간호조무사들이 일주일에 80~90시간씩 일했다는 보고가 나왔다.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다보니 직장을 그만두는 이들이 늘어나고, 그들의 공백을 매우기 위해 남은 이들이 더 과로하게 되는 악순환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미국 연방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전국 1만3600개 요양시설 중 23%인 3200곳의 요양시설에서 인력부족을 호소했다.
가혹한 근무 환경과 길어지는 바이러스 전쟁으로 인한 의료진의 희생도 늘어가고 있다. 지난 3일 국제 인권단체인 앰네스티가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7000명이 넘는 의료진이 코로나19에 감염돼 목숨을 잃었다. 지난 7월 초 조사에서는 3000여명 이었다. 두 달 사이 사망자가 2배 넘게 늘어난 것이다.
국가별로 의료진이 가장 많이 사망한 국가는 멕시코로 1320명이었으며 미국1077명, 영국 649명, 브라질 634명, 러시아 631명 순이었다. 국내에서도 지난 4월 의사 1명이 코로나19 확진자를 치료하다 감염돼 사망했다.
앰네스티는 보고서를 통해 “많은 의료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기본적인 보호장치도 없이 일하고 있다”며 “이들을 영웅시하지만 말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적절한 조취를 취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올 가을‧겨울에 코로나19 2차 유행을 경고했다. 하지만 의료진의 희생이 커지고 공백이 늘어날수록 방역은 더욱 힘들어 질 것이 분명하다. 멕시코 등 일부 국가에서는 의료체계 붕괴가 일어날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온다.
국내 의료진도 코로나19와 싸워온 지 9개월이 되어간다. 유명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와 경기도 공공보건의료지원단이 지난 7월말 진행한 ‘제2차 경기도 코로나19 치료·인력 인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경기도 지역 방역인력의 인력이 전체의 33.8%가 번아웃증후군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 교수는 보고서에서 “코로나 치료와 방역 인력들이 장기간의 업무로 정서적인 탈진 상태에 놓여있다”며 “사회가 의료진에게 성과를 맡기고 기대하기보다 장기화 체제를 함께 준비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