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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스럽다'던 미국 와인의 평가를 뒤바꾼 '나파밸리' 와인
  • 김지예 ·소믈리에 기자
  • 등록 2020-06-28 23:43:38
  • 수정 2020-06-29 18: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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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법 이후 적극적 양조기술 개량으로 고급화 착수 … 1976년 ‘파리의 심판’ 이후 부상, 1990년부터 최고급 ‘컬트와인’ 지향
나파밸리의 대표적인 와인메이커 ‘로버트 몬다비’의 와인까브
미국은 세계 최대의 와인 소비시장이자 높은 수준의 와인을 만들어내는 생산지이기도 하다. 현재 신세계 와인 생산국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게 바로 미국 와인이다. 가장 대표적인 와인 산지로는 캘리포니아주 중에서도 나파 카운티(Napa County)다. 이른바 나파밸리는 미국 와인을 지금의 위상으로 올려놓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획일적이고 과하다’는 평가의 초기 미국 와인
 
미국 와인 생산의 90%는 캘리포니아에서 이뤄진다. 그 중 나파밸리는 가장 핵심적인 지역으로 수준 높은 유명 와이너리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북동쪽으로 약 60km 떨어진 지역에 위치하며 총면적은 약 480km², 남북으로 40km, 동서로 12km에 이르는 지역을 아우른다.
 
캘리포니아는 태평양 연안에 자리 잡은 해양성 기후 덕분에 온화하고 따뜻하다. 일조량도 매우 많아 과일이 단맛을 머금기에 유리하다. 나파밸리는 일조량이 풍부하면서도 다른 지역처럼 볕이 너무 뜨겁지 않아 포도가 빠르게 익지 않고 적당한 단맛과 산미를 아우르고 있어 고급 와인을 만들기 위한 포도를 재배하는 데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다.
 
보르도와 유사한 기후여서 와인 스타일도 보르도와 비슷하다 까베르네 쇼비뇽과 메를로를 블렌딩한 레드와인이 주로 생산되는데 풍부한 과일향과 오크향, 강하고 탄탄한 보디감으로 보르도에서 생산되는 고급 와인 못지않은 고급 장기 숙성형 와인을 생산해 내고 있다.
 
처음 캘리포니아 와인 생산의 가장 선봉에 섰던 것은 나파밸리 서쪽 샌프란시스코 북쪽에 위치한 소노마밸리(Sonoma Vally)였다. 1848년 골드러시로 각처에서 몰려든 이민자들 중에 헝가리 출신들이 소노마 밸리에서 비티스 비니페라((Vitis vinifera, 유럽산 양조용 포도)를 가꾼 게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의 시초다. 이윽고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와인 산업에 뛰어들면서 미국의 와인 산업은 빠르게 성장했다.
 
캘리포니아의 따뜻한 기후와 풍부한 일조량은 포도가 빠르게 자라고 당분을 만드는데 매우 유리했다. 유럽보다 넓고 비옥한 땅은 많은 양의 포도를 한꺼번에 재배하고 수확해 양조하면서 와인산업을 빠르게 발전시킬 수 있는 경쟁력이었다. 이를 통해 미국 와이너리는 일괄적인 품질로 양산이 가능한 기업형으로 성장했다. 그러던 중 1919년 금주법이 실시됐다. 1933년까지 14년간 이어진 미국의 금주법은 막 자리를 잡아가던 미국 와인산업을 뿌리째 흔들었다. 700여개를 넘어가던 캘리포니아의 와이너리는 금주법이 끝날 무렵에는 불과 140여개 정도만 남았다.
 
금주법이 사라지고 술에 대한 수요가 무섭게 늘어나면서 캘리포니아 와인산업은 다시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지만, 국제무대에서 미국 와인에 대한 평가는 매우 낮았다. 미국인들도 자국 와인에 대해 지나치게 맛이 획일적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미국 와인에 대한 평가는 “오크통 맛이 지나치게 강하고, 포도즙을 너무 많이 추출하며, 기후 특성상 너무 익은 포도로 양조해 알코올 도수가 높은, 과하게 진한 촌스러운 와인”이었다.
 나파밸리는 캘리포니아의 다른 와인생산지보다 고도가 높아 기온과 일조량이 적당해  고급 와인을 위한 포도 재배에 적합하다.
이에 미국 와인 회사들은 획일화에서 탈피해 고급화를 꾀했다. 프랑스의 유명 와이너리와 협업을 하거나 유럽의 실력있는 양조가들을 적극 모셔오면서 와인 품질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그럼에도 너무 뜨거운 캘리포니아의 햇살에 포도가 지나치게 빨리 익어버린다는 난제를 극복하긴 어려웠다. 후숙된 포도로는 와인의 섬세한 맛과 향을 내기 어렵다. 이 때 떠오른 지역이 소노마밸리보다 동북쪽으로 떨어진 나파밸리였다. 고도가 높은 나파밸리는 소노마밸리를 비롯한 캘리포니아 다른 와인 생산지보다 기온이 낮고 일조량도 적당해 포도가 익는 속도가 느렸다. 나파밸리의 특성을 발견한 양조가들은 이 곳에서 고급 와인을 생산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1976년‘파리의 심판’행사 당시 모습. 파트리샤 갤러거(왼쪽부터), 스퍼리어, 와인전문지‘레뷔 뒤 뱅 드 프랑스’편집인 오데트 칸.
1976년 와인의 본고장 프랑스와인, 나파밸리에 무릎꿇어 ‘와인 국치일’
 
조용히 실력을 키워가던 나파밸리의 와인이 국제 사회에 모습을 들어낸 결정적 계기는 1976년 5월 24일에 벌어진 ‘파리의 심판’(Judgment of Paris) 사건이었다. 

당시 와인 바이어인 영국인 스티븐 스퍼리어(Steven Spurrier)와 미국인 파트리샤 갤라허(Patricia Gallagher)가 미국 와인을 유럽에 본격 소개하고자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개최했다. 총 11명의 유명 와인 평론가가 모여 브랜드를 지운 각기 10종의 화이트와인(캘리포니아 와인 6종, 프랑스와인 4종)과 레드와인(캘리포니아 와인 4종, 프랑스 와인 6종)을 평가했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 캘리포니아 와인의 패배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대회를 개최한 스퍼리어조차도 캘리포니아 와인이 조금만 선전해 줘도 좋다는 생각으로 진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화이트와인과 레드와인 모두 나파밸리의 와인이 1위를 차지했다. 화이트와인에서 브르고뉴 ‘뫼르소 샤름’을 이기고 나파밸리 와인인 ‘샤또 몽텔레나’가 우승했으며, 레드와인은 나파밸리의‘스태그스 립 와인 셀러’가 보르도의 ‘샤또 무똥 로췰드’를 눌렀다.
 
프랑스 와인계는 그야말로 충격에 빠졌다. 일부 심사위원은 자신의 평가서를 스티븐에게서 빼앗으려 달려드는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프랑스 와인의 우승이 당연할 것이라 생각한 대부분의 매체는 기자를 보내지도 않았는데, 거의 유일하게 자리를 지켰던 미국 타임지의 기자가 이를 ‘파리의 심판’이라는 제목으로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 특히 나파밸리의 와인의 위상이 새롭게 정립됐다.
 
프랑스인들은 이날을 ‘와인 국치일’로 여길 정도다. 결과를 납득할 수 없었던 프랑스 측의 요청으로 비슷한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몇 번 더 진행됐으나 나파밸리의 와인은 언제나 높은 성적을 유지하며 프랑스 와인을 눌렀다.
 
소량·고품질의 ‘컬트와인’ 바람 … ‘스트리밍이글’ ‘할란’ 등이 대표적
 
1990년대 초반 들어 나파밸리의 양조가들은 소량·고품질을 앞세운 ‘컬트 와인’을 생산하면서 이미지를 고급화했다. 컬트와인은 한해 생산량이 1만~2만병이 채 되지 않는 고품질의 극소량 생산 와인으로 프랑스의 그랑크뤼 와인들과 비견된다. 하지만 100여 년이 넘도록 경직된 방식을 고수하는 프랑스와 달리 실험적이고 선진화된 양조방식을 받아들인 나파밸리는 정상급 컬트와인을 선보이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컬트와인의 대성공에 호주·뉴질랜드·칠레 등 다른 신대륙뿐만 아니라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유럽 양조가들도 가세해 붐을 이어나갔다. 
 
일부 나파밸리의 와인은 보르도의 1등급 그랑크뤼 와인보다 높은 평가를 받으며 비싼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지난 30여년간 와인스펙테이터(Wine spectator, WS)와 로버트파커 점수(Robert M. Parker Point. RP) 최고점은 항상 유럽이 아닌 나파밸리 와인의 차지였다. 이를 통해 나파밸리의 와인은 와인 트렌드를 이끄는 거대한 한 축으로 자리잡았다.
 
가장 유명한 나파밸리의 컬트와인으로는 1세대인 ‘그레이스 패밀리 카버네 소비뇽’을 꼽을 수 있다. 1981년 첫선을 보였으며 ‘높은 품질, 넘치는 수요, 한정된 생산’이라는 컬트와인의 3대 요소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카베르네소비뇽 100%로 만드는데 블랙커런트와 자두 향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다. 블랙커런트(blackcurrant, CASSIS)와 감초 등 아로마가 겹겹히 밀려든다. 연간 생산량은 200 상자에 못 미치지만 대기자는 4000명이 넘는다. 전문가들은 10년 이상 숙성한 후 마실 것을 권장한다.
 
나파밸리 대표 컬트와인 중 하나인 '스트리밍 이글'. 나라셀러 제공.
최근 가장 유명한 컬트와인으로 꼽히는 ‘스크리밍 이글’은 ‘나파밸리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와인메이커 하이디 바렛(Heidi Barrett)의 작품이다. 1992년에 첫 빈티지를 생산해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에게서 99점을 받았으며, 1997년 빈티지는 100점을 받았다. 까베르네소비뇽을 기본으로 메를로와 카베르네프랑을 블렌딩했는데 가장 큰 특징은 풍부한 블랙커런트 향이다. 이와 함께 단단한 농축미, 완벽한 밸런스를 자랑한다. 연간 약 8000병을 생산해 사전 예약해도 구입하기 어려울 정도다.
 
로버트 파커로부터 5번이나 100점 만점을 받은 ‘할란’ 역시 대표적인 컬트와인으로 손색이 없다. 할란 이스테이트 와이너리는 1985년 설립됐지만 12년이 지난 1996년에 와서야 첫 번째 와인을 생산했다. 로버트 파커는 “할란 이스테이트는 캘리포니아뿐 아니라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깊은 맛의 레드와인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카베르네소비뇽 외 메를로와 커베르네프랑을 블렌딩 포도로 사용한다. 풀보디 와인으로, 짙고 탄탄한 근육질의 느낌이 큰 특징이다. 매년 1만8000병의 와인을 생산하는데 한국에 공급되는 물량은 120여병에 불과하다.

높은 평가를 받은 나파밸리 컬트와인 중에는 한국의 입김이 닿은 와인도 있다. 이희상 동아원그룹 회장이 소유한 ‘다나 에스테이터’에서 생산된 ‘로터스 빈야드’는 2007년 빈티지와 2010년 빈티지가 로버트파커로부터 100점 평가를 받아냈다. 오크통 숙성 과정에서 와인의 품질이 변할까봐 바닥에만 오크통을 보관하고 오크통을 2중으로 쌓는 것을 금지하는 등 양조에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연간 생산량이 겨우 3000여병 남짓이지만 품질에서는 최고를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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