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한 해 바이오주 관련 임상 실패, 분식 회계 이슈가 연이어 터지면서 급속도로 얼어 붙은 투자심리가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극소수 기업을 제외하고 바이오 업계는 이런 이슈에 흔들리며 전반적으로 부진한 실적을 보였다. 내년에는 신약개발에 성공하고 미국 식품의약국(FDA) 품목 허가를 받은 SK바이오팜 등이 IPO(기업공개)를 앞두고 있어 투자심리가 회복될지 바이오 업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올 하반기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한 바이오주는 상반기에 상장 기업보다 기관 등 수요예측에서 성적이 부진했다. 상반기에 상장한 셀리드는 700대1, 압타바이오는 800대1을 기록해 흥행에 성공했지만 하반기에 상장한 매드팩토는 86대1,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는 58대1로 경쟁률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지난 6월 에이치엘비, 7월 코오롱생명과학, 8월 신라젠, 9월 헬릭스미스, 10월 강스템바이오텍, 11월 메지온, 12월 비보존 등이 세포주 바뀜, 임상 실패, 임상시험 약물 혼입, 평가지표 미달에 따른 임상 실패 등 악재가 도미노처럼 계속된 게 하반기 상장 업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중 가장 기대가 크고, 투자금이 많이 몰렸던 신라젠과 헬릭스미스의 임상 3상 실패는 허약한 댐의 한 켠이 무너지는 단초가 됐다.
하지만 내년에는 SK바이오팜이 코스피(KOSPI)에, 싱가포르 바이오 국책연구소 프레스티지바이오리서치(PBR)의 관계사인 프레스티지바이오로직스가 코스닥(KOSDAQ)에 상장을 준비하는 등 대형 바이오주가 등판할 예정으로 침체된 바이오 기업 투자가 호조세를 보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더욱이 올해 벤처캐피탈의 바이오·의료 분야에 대한 신규투자가 확대되면서 긍정적 전망에 힘을 싣고 있다. 벤처투자협회에 따르면 올해 10월까지 벤처캐피탈이 전 분야에 투자한 누적 금액은 3조5249억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는 제약·바이오·의료 분야로 같은 기간 9841억원을 투자해 전체 27.9%를 차지했다.
배기달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벤처캐피탈의 신규 투자 증가와 더불어 최근 수년 간 기존 제약사의 바이오 투자가 매년 30% 이상 늘었다”며 “계약금 100억원 이상의 의미 있는 기술수출이 올해 5건 성사되는 등 계약금 총액만 2억2000만달러(2420억원)에 이르러 투자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거래소(KRX)가 재무실적보다는 미래 성장성을 따져 혁신기업의 상장을 촉진한다는 내년도 계획도 내놓으면서 성장성에 방점을 둔 바이오 기업의 상장이 유리해졌다. 기술이전 가능성과 실적을 겸비한 비상장 바이오 기업은 이참에 상장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내년 가장 기대되는 대어(大漁)는 1월경 코스피 상장에 나설 것으로 보이는 SK바이오팜이다. 주식회사 SK의 100% 자회사로 최태원 SK 회장이 직원 송년회에 깜짝 등장할 만큼 공을 들이는 계열사다. 예상 기업가치만 5조원에 육박하고 공모 규모는 1조원을 넘길 것으로 전망된다.
상장주관사 선정을 두고 증권사 간 치열한 경쟁 끝에 NH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 씨티그룹글로벌마켓증권, 모건스탠리 등 4개사가 낙점받았다.
SK가 제약업계에 뛰어든 지 26년, SK바이오팜 설립 8년 만에 미국 FDA로부터 지난 3월 수면장애 치료제 ‘솔리암페톨’(제품명 수노시, Sunosi, 국내 미허가), 지난 11월 뇌전증 치료제 ‘세노바메이트’(제품명 엑스코프리, Xcopri)를 허가 받았다. SK바이오팜은 FDA로부터 승인받은 임상시험만 16개에 이른다. 국내 바이오사에 드리운 ‘임상 3상 악몽’을 깨고 국내 바이오주 재평가의 신호탄을 쐈다는 평가다.
SK는 지난 10여년간 신약개발을 목표로 꾸준한 연구인력을 확보하고 자회사 SK바이오텍을 통해 2017년 6월 글로벌 제약사 BMS(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의 아일랜드 생산공장을 통째로 인수하는 등 통근 행보를 이어왔다. 이 공장의 최대 고객으로 지난해 매출액이 26조원에 이르는 아스트라제네카와 공급계약을 체결했으며 화이자, 노바티스와도 단번에 협업 관계를 구축했다.
여기에 SK바이오텍 아일랜드와 인수한 CMO(수탁생산) 업체인 미국 앰팩(AMPAC)을 합쳐 지난 8월 미국 통합법인인 SK팜테코를 설립했다. 이로써 SK는 세계 최대 제약 시장인 북미와 유럽에 생산·판매 기지를 확보하고 글로벌 시장 공략에 나선다.
SK는 신약개발을 전담하는 SK바이오팜과 CMO 전문 SK팜테코로 계열사를 정비했다. 한편 최태원 회장의 사촌인 최창원 회장이 이끄는 SK디스커버리(지주회사) 계열사로는 의약품 사업을 담당하는 SK케미칼, 혈액제제를 생산하는 SK플라즈마, 백신을 전문으로 하는 SK바이오사이언스가 있다.
프레스티지바이오로직스는 코스닥 시장에 IPO를 추진한다. 외국기업 특례상장에 나선 싱가포르 프레스티지바이오파마의 관계사로 한국 법인이다. 바이오시밀러뿐만 아니라 자체 항체신약 개발을 진행 중이다. 이 회사가 개발 중인 ‘PAUF(PBP1510)’는 췌장암을 타깃으로 삼은 항체의약품으로 췌장암 전문 항체의약품이 없는 것을 감안하면 개발에 성공할 경우 블록버스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프레스티지바이오파마는 국내외에서 약 900억원의 투자를 유치해 관심을 끌었다. 투자 가치가 1조원 상당으로 평가되면서 주목받았다. 프레스티지바이오파마는 그동안 코스닥에 외국기업 특례상장을 준비해왔다. 이 방식으로 상장하기 위해선 전문평가기관 2곳에서 기술성 평가 A등급을 받아야 하는데 지난 6일 각각 ‘A’, ‘BBB’ 등급을 얻어 통과에 실패했다. 지난 7월 먼디파마와 로슈 허셉틴주 바이오시밀러인 ‘투즈뉴’ 라이선스아웃 계약에 성공하는 등 기술력을 인정받은 만큼 평가 통과에 문제가 없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지만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이에 프레스티지바이오파마 측은 6개월이 소요되는 기술 재평가를 준비하면서 프레스티지바이오로직스를 먼저 상장시키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바이오파마는 바이오시밀러의 개발, 바이오로직스는 생산을 전담하는 사업구조로 바이오파마가 먼저 등판해 몸값을 불리고, 생산 실적이 올라가면 바이오로직스를 차후에 상장해 기업가치를 극대화한다는 시나리오 순서를 바꾼 것이다. 바이오파마는 테슬라 요건 상장(이익 미실현 상장)을 선택해 기술성 평가 없이 상장하되 주가 흐름이 부진할 경우 상장주관사가 일정 기간 공모가의 90% 가격으로 일반 청약자의 주식을 되사주는 풋백옵션을 적용한다.
프레스티지바이오로직스는 상장을 준비하면서 국내사와 협력 관계를 공고히 해왔다. 동국제약은 지난달 29일 투즈뉴 제조를 맡는 수탁 계약을 체결했다. 이 계약으로 바이오로직스가 투즈뉴의 원료를 제조하고 동국제약은 진천 공장에서 완제품을 생산할 예정이다. 휴온스는 투즈뉴와 이 회사가 개발 중인 아바스틴 바이오시밀러 ‘HD204’, 휴미라 바이오시밀러 ‘PBP1502’에 대한 국내 독점 판매권을 확보했다. 휴온스는 이 회사의 글로벌 성장가능성을 높게 보고 전략적 재무 파트너 관계도 맺었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프레스티지바이오파마는 바이오시밀러 생산과 신약개발을 모두 진행할 수 있는 기업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 중”이라며 “시장에서 기업가치가 6000억~8000억원 수준에서 책정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설명했다. 바이오로직스의 상장주관사는 미래에셋대우와 유안타증권, 바이오파마의 대표주관사는 삼성증권과 KB증권이다.
마크로젠의 미국 자회사 ‘소마젠’은 외국기업 기술특례로 코스닥 상장이 전망된다. 소비자 직접의뢰 유전자 검사(Direct To Consumer genetic test, DTC)를 주력 사업으로 하는 기업으로 소비자가 집에서 유전자 검사 키트를 택배로 배송받은 뒤 다시 택배로 검사체를 보내 질병을 진단해 통보하는 사업모델을 가지고 있다. 이 회사는 미국 유전체 분석 시장 5위에 올랐으며 이 분야 기업 최초로 미국 국립보건원(NIH)과 협업관계를 구축했다.
지난 6월 진행한 기술성 평가에서 기술보증기금과 한국기업데이터로부터 모두 A등급을 받았다. 소마젠은 이를 바탕으로 기술특례 상장을 추진해 내년 상반기 중 코스닥에 입성할 예정이다. 상장에 성공하면 기술특례로 코스닥에 등록된 최초의 외국 바이오기업이 된다. 상장주관사로는 신한금융투자를 선정했다.
이 회사는 DNA 데이터를 블록체인 기반 기술로 거래하는 공유플랫폼 비즈니스를 추진하기 위해 한국에선 마크로젠 명의로, 미국에선 소마젠 명의로 관련 특허를 등록했다. 이같은 계획의 연장선상에서 소마젠은 지난달 마크로젠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파산 위기의 미국 유바이옴(uBiome)을 인수하면서 글로벌 파이 확장에 나섰다. 컨소시엄은 자산 매각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돼 이달 중 미국 연방법원의 파산 승인이 나는대로 인수 절차를 진행해 246건의 특허와 30만건의 마이크로바이옴 데이터 및 샘플, 실험장비 등 자산 대부분을 편입한다.
유바이옴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마이크로바이옴 전문기업으로 ‘16S rRNA 유전자 기반 시퀀싱’ 분야에서 미국에서 독보적인 시장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 분야 특허 포트폴리오 규모는 글로벌 3위, 데이터는 글로벌 1위 수준이다. 2018년 9월 기준 6억달러(한화 약 7000억원)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았다. 2018년 기준 매출액은 1억423만달러(한화 약 1215억원)였다.
한국콜마에 인수된 씨제이헬스케어도 상장을 준비하고 있다. 정확히는 2018년 콜마가 씨제이헬스케어를 인수할 때 설립한 특수목적법인(SPC)인 씨케이엠(CKM)을 상장하게 된다. 한국콜마와 재무적투자자(FI)와 체결한 약정에 따르면 2022년 12월 31일까지 씨케이엠 IPO가 이뤄지지 않으면 재무적투자자가 한국콜마 보유 씨케이엠 지분 전량을 제3자에게 동반매도하도록 해놨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상장에 속도를 낼 수밖에 없다는 게 투자업계 안팎의 평가다. 씨케이엠 지분은 한국콜마가 50.71%, 재무적투자자가 49.29%이다. 기업가치는 인수금액인 1조3100억원 내외에서 결정될 전망이다. 삼성증권, 한국투자증권, JP모건을 상장주관사로 정했다.
이밖에 신약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SCM생명과학, 에이비온, 와이디생명과학, 에이프릴바이오 등이 기술성 평가를 통과해 코스닥 상장 절차를 밟는다. 기업들의 상장 러시와 맞물려 바이오 컨퍼런스나 의학 관련 학회가 상반기에 몰려 있어 임상결과 발표를 전후한 기업의 투자설명회(IR) 활동이 부산할 전망이다.
홍가혜 대신증권 애널리스트는 “올해 각종 악재가 터지면서 지연됐던 다수 바이오 기업의 IPO가 2020년에 집중될 전망”이라며 “기업가치가 조 단위를 웃도는 대형주가 적잖은 만큼 이들 기업의 흥행 여부가 전체 분위기를 좌우할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