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배울 때 외울 게 참 많다. 산지와 품종을 매칭해 그 향미의 특성을 아는 것은 재미있으면서도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지난한 과정이다. 특히 책과 소문으로 들었던 산지와 품종의 맛이 혀의 느낌과 일치하지 않았을 때엔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게 재배환경 즉, 테루아(terroir: 토양과 기후)에 따라 같은 품종이라도 산지와 포도 재배 연도에 따라 맛이 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양조기술, 물맛에 따라 와인 맛이 달라져 이론대로 실제 와인 향미가 일치하는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모든 학습은 달달 외우기부터 시작하는 법. 이 일을 게을리하면 와인에 다가갈 수 없다. 우선 포도의 품종은 크게 유럽종(Vitis vinifera), 미국종(Vitis labrusca), 잡종(hybrid) 등 3가지로 나뉜다. 유럽종은 수천년간 재배되면서 와인에 걸맞은 맛과 향을 갖게 됐다. 카스피해와 페르시아만 사이의 코카서스 지방이 원산지로 오늘날 250여종이 존재한다. 미국종은 향이 강해 주스나 식용으로 쓰이다가 병충해에 강한 특성을 활용해 유럽과 접붙인 품종을 와인주조용으로 개발했는데 20여종이다.
레드와인용 품종으로는 누구나 다 아는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을 비롯해 피노 누아(Pinot Noir), 메를로 (Merlot), 시라(Syrah), 말벡(Malbec), 진판델(Zinfandel), 가메(Gamay), 네비올로(Nebbiolo), 그르나슈(Grenache), 까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 산지오베제 (Sangiovese), 피노 뫼니에(Pinot Meunier) 등이 유명하다. 모두 아는 것은 불가능하며 해봐야 소화불량이다. 초보자에게 필요한 주요 품종별 산지별 최적 조합을 알아보자. 오늘은 일단 레드 품종만 살펴본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추운 곳을 싫어하며 자갈이 섞인 물빠짐이 좋은 토양에서 잘 자란다. 완숙까지 걸리는 기간이 꽤 길지만 껍질이 두꺼워 잘 썩지 않는다. 숙성 초기엔 앙상하고 표현력이 없는 와인이지만 숙성 기간이 길수록 부드럽고 진해진다. 기본적으로 신맛이 나고 풍부한 탄닌 때문에 떫고 쓴맛이 강하지만 어떻게 숙성하느냐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다. 저가 와인에도, 최고급 와인에도 가장 많이 쓰는 품종이기도 하다. 추운 독일 지방을 제외한 프랑스 보르도(메독과 그라브) 등 세계 전지역에서 재배된다.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와 호주 쿠나와라의 까베르네 소비뇽은 풍부하고도 중후한 맛에서 우세하다. 이탈리아는 가장 독창적이고, 칠레산도 최상급의 경우 제법 훌륭한 맛을 낸다. 다른 지역에서도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 품질을 높이기 위해 여념이 없다.
피노 누아는 필자가 좋아하는 부르고뉴(버건디) 와인 중 절반이 약간 못되는 비중을 차지하는 품종이다. 부르고뉴(중심지는 코트 도르 Cote d’Or)는 석회암과 붉은 색깔의 점토질이 섞인 토양이다. 피노 누아는 이처럼 배수가 잘되는 토양에서 잘 자라지만 부패나 병충해에 민감하기도 하다. 상파뉴에서도 샴페인용으로 피노 누아를 가장 많이 재배한다. 알자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호주, 독일 등 약간 서늘한 지역에서 잘 자란다. 전세계적으로는 생산량이 적은 품종으로 육질이 실크처럼 연하고 우아해 섬세한 와인을 만들어 낸다.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진판델에 비해 보디감이 약간 가볍고 타닌이 훨씬 적다. 피노 누아의 연약해보이는 특징은 때로 고급스런 풍미를 창조한다. 피노 누아는 재배, 양조 과정이 까다롭고 불안정하지만 이를 이겨낸 와인은 수준급이다. 다만 시중에서 값싸게 나온 부르고뉴산 피노 누아를 구입했을 경우 절반은 평균 이하의 수준일 수도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
메를로는 ‘작은 검은새’(Little Blackbird)라는 뜻이다. 풍미가 카베르네 소비뇽과 매우 비슷해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쉽게 혼동을 일으킨다. 가장 유명한 생산지는 프랑스 보르도 지역으로 카베르네 소비뇽에 이어 메를로, 카베르네 프랑, 말벡 등이 많이 생산된다. 메를로는 대개 메독(보르도의 서북부) 이외의 지역에서 재배된다. 예컨대 포므롤과 생테밀리옹 등 보르도의 한 가운데 지역에서 주로 사용한다. 메를로는 보르도 와인에서 거의 항상 카베르네 소비뇽·카베르네 프랑 등과, 때로는 말벡과 블렌딩된다. 와인을 좀 알게 되면 메를로를 좋아하게 된다. 좋은 포도밭에서 자란 메를로가 적절한 타닌 감으로 비교적 부드럽고 원만한 미감으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특히 신대륙인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와 워싱턴주에서 생산되는 메를로는 농축된 풍미와 순수함으로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하지만 결코 부드럽지 않은 메를로도 꽤 있다.
프랑스의 시라(Syrah)와 남반구의 쉬라즈(Shiraz)는 같은 품종이면서도 다른 특징을 보인다. 고대 페르시아에서 유래해 프랑스 북부 론(Rhone) 밸리 지역에서 주로 생산되는 시라는 ‘에르미타쥬’(Hermitage) 레드 와인으로 유명하다. 척박한 토양과 덥고 건조한 기후를 선호한다. 화산토의 가파른 언덕에서 햇빛을 잘 받는 론강 유역이 최적 재배지이다. 이 품종은 남아공화국을 거쳐 호주로 건너가 펜폴즈(Penfolds)사의 ‘그랑주’(Grange)란 명품 와인으로 재탄생했다. 시라는 기본적으로 강렬하고 화려한 향으로 남성적, 역동적 풍미를 낸다. 비교적 서늘하고 일교차가 큰 프랑스 론 지역과 달리 호주의 쉬라즈는 온화한 기후로 더 부드럽고 스파이시하고 초콜릿처럼 달콤한 향기와 감칠맛을 더하는 풀 보디의 와인이 됐다. 최근 캘리포니아 쉬라즈도 호주에 버금가는 쉬라즈 와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2000년대 들어 기존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일변도의 와인 스타일에 식상한 애호가들이 다변화 차원에서 찾은 새로운 대안이다. 21세기 스타 품종인 시라(쉬라즈)가 보여주는 진보랏빛 천연색의 선명함은 가히 환상적이다.
말벡은 본고장인 보르도에서 카베르네 소비뇽의 파워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블렌딩하는 보조 품종으로 재배됐으나 점차 감소하고 있다. 지금은 아르헨티나의 국가대표 품종으로 부상했다. 아르헨티나 말벡은 진한 적색, 농밀하면서 매끄러운 감칠맛, 풀 보디감을 보여준다. 아르헨티나의 건조하고 깨끗한 환경이 병충해에 약한 말벡이 잘 자랄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가메는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로 친숙한 햇 와인을 만드는 주요 원료다. 부르고뉴는 프랑스 남동부의 론강 이북 지역이며 그 중 보졸레는 남쪽을 차지한다. 주요 적포도 품종 중에도 가메는 가장 단순한 품종에 속한다. 억제되지 않고 흘러나오는 신선한 과일 맛과 적은 타닌 때문에 약간 차게 해서 마셔야 한다. 깊은 맛은 없고 상쾌한 신맛을 내는 대중적인 와인으로 매년 11월 세번째 주에 출시돼 일시적으로 대량 소비된다.
진판델은 수십 년 동안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심는 적포도 품종이었으나 1998년부터 카베르네 소비뇽이 이를 능가하기 시작했다. 레드와인은 물론 화이트와인에서 스위트한 포트 스타일 와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와인을 만들 수 있다. 1972년까지만 해도 진판델은 힘차고 거친 레드 와인이었다. 그러나 이 해 대형 캘리포니아 와이너리인 셔터 홈(Sutter Home)이 진판델의 붉은 껍질이 짙어지기 전에 신속하게 걷어내는 방법으로 밝은 분홍색의 화이트 진판델(로즈 와인)을 처음 생산하면서 요즘엔 로즈 와인이 레드와인보다 더 많이 팔리고 있다. 진판델은 유럽종으로 크로아티아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탈리아 품종 프리미티보(Primitivo)와도 연원이 일치한다. 캘리포니아에서 포도나무 수령이 최소한 40년 이상 된 경우에만 라벨에 올드 바인(Old Vines)이라고 표기하고 대단히 농축된 진판델을 생산한다. 진판델은 더운 기후를 선호하며 알코올 생산성이 높다. 서늘한 기후 조건에서 자랐거나, 어린 포도로 담은 와인은 약간 풋내 나는 야생미를 줄 수 있다.
네비올로는 숙성 초기에 육중한 구조감과 견고한 타닌으로 미뢰가 움츠러들게 한다. 물리적인 자극으로 맛을 내는 거의 유일한 품종으로 이탈리아인에겐 프랑스인의 카베르네 소비뇽과 맞먹는 제왕의 위상을 갖고 있다. 인고의 시간을 거쳐 숙성되면 유연함과 파워가 근사하게 조화된다. 이탈리아의 북서부 피에몬테(Piemonte)가 주산지로 바르바레스코(Barbaresco)와 바롤로(Barolo)로 잘 알려져 있다. 짙은 안개를 뜻하는 네비아(Nebbia)가 어원으로 보통 10월 말에야 익게 되는 만숙종이다. 수확기를 앞두고 포도밭에 안개가 곧잘 끼는데 이로 인해 네비올로의 거친 특성이 완화된다고 한다. 성질은 카베르네 소비뇽과 비슷하지만, 재배조건은 피노누아와 같이 까다로워 피에몬테 지방을 벗어나서는 명품 와인이 나오지 않는다. 와인의 색상은 부드러운 암홍색으로 아주 진하지는 않다. 잘 숙성된 와인은 동물향과 숲향이 조화를 이뤄 야생 짐승 요리와 잘 맞는다. 입에서는 적당한 산도와 압도하는 듯한 타닌이 느껴진다.
그르나슈는 스페인 품종 ‘가르나차’를 일컫는 프랑스식 이름이다. 프랑스에서는 프로방스, 랑그도크루시용, 론 남부 등 남부 와인 산지 대부분에서 재배한다. 그르나슈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널리 재배되고 있는 레드 품종이다. 원산지인 스페인과 프랑스 남부지역에서 가뭄과 고열에 잘 적응해 자란다. 이런 까닭에 호주와 캘리포니아에서도 많이 생산된다. 다른 포도 품종들과 블렌딩해 풍부한 타닌과 산미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단 로제와인이나 강화와인을 만들 때에는 독자적으로 이 품종을 사용하기도 한다.
카베르네 프랑은 프랑스에서는 잘 알려진 포도 품종으로 카베르네 소비뇽 혹은 메를로와 혼합되는 경우가 많다. 카베르네 프랑은 색깔과 타닌이 약한 편이어서 카베르네 소비뇽보다 더 일찍 익고 서늘한 데서 상대적으로 잘 생육하다. 흔히 카베르네 소비뇽보다 격이 떨어지는 품종이라고 폄하하는데 생테밀리옹의 특급 와인인 샤또 슈발 블랑(Chateau Cheval Blanc)은 이 품종을 60%나 사용해 블렌딩 한다.
피노 뫼니에는 피노 누아가 변이된 품종이다. 프랑스 샴페인 지역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적어도 샴페인 안에서는 샤르도네, 피노 누아와 더불어 주요 3대 품종 중 하나다. 싹이 일찍 트고 열매가 일찍 익는 품종이지만 피노 누아에 비해서는 싹이 늦게 트고 열매는 더 일찍 익는다. 따라서 샴페인 지역에서도 상대적으로 추운 곳에서 재배된다. 봄 서리와 겨울 서리를 피할 수 있어서다. 진흙을 좋아하지만, 석회에도 잘 적응한다. 알코올은 피노 누아보다 조금 낮고 산도는 조금 더 높은 편이다. 샴페인 블렌딩을 할 때 뫼니에는 신선한 과일향을, 피노 누아는 무게감을, 샤르도네는 높은 산도를 책임진다.
산지오베제는 네비올로와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고급 토착 품종이다. 토스카나의 위대한 세 가지 와인인 ‘키안티’(Chianti),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차노’, 아주 훌륭하고 비싼 ‘부르넬로 디 몬테풀차노’를 만드는 포도다. ‘투스칸’으로 유명한 고급 와인 대다수를 만드는 데 카베르네 소비뇽과 함께 들어간다. 토스카나 외에도 이웃 지역인 움브리아와 에밀리아로마냐에서도 생산한다. 산지오베제 포도나무는 많은 유전적 변종을 갖고 있다. 재배지에 따라 달라지는 변종의 특징은 다양한 스타일과 품질로 귀결된다. 어떤 산지오베제는 붉기만 할 뿐 무미건조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흙 내음이 풍기면서 진하고 복합적이다. 풍미와 구조면에서 산지오베제는 카베르네 소비뇽보다는 피노 누아에 더 가깝다. 일반적으로 높은 산미와 함께 중간 정도의 보디감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