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젠·에이치엘비 등 임상실패 뒤 ‘재도전’,‘기술이전’ 등 대응패턴 같아 … 오너 일가 공시 전 주식매도로 신뢰 바닥
헬릭스미스가 당뇨병성신경병증(diabetic peripheral neuropathy, DPN) 유전자치료제 ‘엔젠시스(개발명 VM202)’ 임상 3상 중단이라는 암초를 만나면서 코오롱생명과학 ‘인보사 사태’, 신라젠 ‘임상 3상 실패’ 등에 이어 한국 바이오 산업 신뢰도가 또 한번 바닥에 떨어졌다. 헬릭스미스는 2005년 ‘국내 1호 기술특례상장기업’으로 발탁된 바이로메드가 사명을 변경한 회사로 15년간 신약후보물질 개발에 주력해왔다.
김선영 헬릭스미스 대표는 지난 26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긴급 기자간담회를 열고 임상시험 도중 엔젠시스 투여군과 위약군 간 약물 혼용이 의심돼 글로벌 임상 3상을 중단했다고 밝혔다. 임상시험에서 약물혼용이 발생한 것은 이례적으로 사실상 임상 3상 실패다.
임상 3상은 환자를 대상으로 약효·부작용을 입증하는 단계다. 보통 환자 1000~50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되며 임상비용이 평균 1000억원 이상 소요된다. 오랜 기간이 소요되고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경우 통과성공률이 절반을 조금 넘는 58.1% 정도다.
김 대표는 “약물혼용으로 정확한 약효 확인이 불가능하게 됐다”며 “환자와 의료진 모두 투약하는 약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는 이중맹검 방식으로 임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병원, 분석실 등에서 약이 바뀐 것으로 추정돼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이중맹검은 임상 대상 약과 위약(가짜약) 중 환자에게 어떤 약물을 투여하는지 공개하지 않는 방식이다. 이번 엔젠시스 임상 과정에선 위약을 투여받은 환자 36명의 혈액에서 엔젠시스가 검출되고 엔젠시스를 투약한 환자 중 32명에선 약물 농도가 낮게 나타나는 ‘임상 오염’이 발생해 문제가 됐다. 어떤 약이 투여됐는지도 파악이 어려운 삼중맹검이 돼버린 셈이다.
이 회사는 약물혼용 원인을 밝히기 위해 지난 20일 조사단을 꾸리고 단서를 찾고 있으나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결과가 나오면 관련 기관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한다는 방침이다.
김 대표는 “투약 혼용 환자, 중도탈락자 등을 제외한 438명을 분석한 결과 약효·안전성은 분명한 미완의 성공”이라고 자평했다. 그는 “엔젠시스는 DPN 외 루게릭병(근위축성측삭경화증, 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ALS), 샤르코마리투스병(Charcot-Marie-Tooth disease, CMT) 등 6개 질환을 타깃으로 하는 약물로 후속 3상과 다른 적응증 대상 임상을 동시 진행해 2022년 미국 시판허가(BLA) 3개를 획득할 것”고 설명했다.
루게릭병 미국 임상 2상은 오는 12월 또는 내년 1월경에 시작할 예정이다. 샤르코마리투스병 임상 1·2상은 내년 1분기 미국·한국에서 진행할 계획으로 임상비용 등 확보에 어려움이 없다는 입장이지만 투자자들이 조기상환 청구권을 행사해 투자금을 회수하면 임상 파이프라인 1개를 감당하기도 버거운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의 반응은 싸늘하다. 바이오업계 관계자는 “어처구니 없고 믿기 힘든 결과”라며 “임상 디자인 실패와 관리능력 부족이 총체적 원인으로 임상시험을 진행할 능력이 안되는데 무리하게 진행해 일어난 결과”라고 말했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이번 임상 3상 실패는 한국 바이오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임상에 진입하는 것을 넘어 임상 성공을 위한 전략과 운영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 사건”이라고 꼬집었다.
약물혼용을 미리 파악하지 못했다는 비난에 대해 김 대표는 “블라인드 상태로 약물혼용 사실을 아는 것은 불가능했다”며 “일각에선 내부 정보를 미리 취득하고 회사가 이 사실을 숨겼다고 의심하지만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주장했다.
도덕적 해이 문제도 제기된다. 헬릭스미스가 지난 26일 장 마감 후 공시한 지분 변동 내역에 따르면 김선영 대표의 처남인 김용수 전 헬릭스미스 대표의 아내 이혜림씨는 지난 23일 2500주를 주당 17만6629원에, 그의 딸 김승미씨는 500주를 주당 17만6807원에 장내 매도했다. 두 사람이 매도한 주식은 약 5억3000만원이다. 약물혼용과 관련된 공시가 지난 23일 장마감 후 나온 것을 고려할 때 주식담보대출 상환을 위한 매도라는 해명은 궁색하다.
김 전 대표는 지난해 8월 이 회사에서 퇴사한 뒤 주식 10만주를 10회 이상 나눠 매도했다. 김 전 대표의 부인과 딸이 이번 임상 관련 정보를 미리 취득했다면 미공개 정보 이용에 따른 불공정거래행위에 해당해 최고 무기징역을 선고할 수 있고 주식 매도로 인한 이익 또는 손실 회피 금액의 5배에 해당하는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지난 7월 초 신라젠에서 근무하는 신모 전무가 약 88억원 상당의 주식을 4회에 걸쳐 장내 매도하고 한 달 뒤에 면역항암제 ‘펙사벡’ 간암 치료 3상 임상 중단 권고가 내려져 내부정보를 미리 파악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검찰은 지난달 28일 신라젠 부산 본사와 서울사무소를 압수수색하며 수사에 나섰다.
김선영 대표도 기자간담회가 있던 지난 26일 오후 10만주(0.47%)를 주당 7만6428원에 장내 매도했다. 약 76억4280만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이에 따라 김 대표의 지분율은 8.30%에서 7.83%로 줄어 들었다. 김 대표의 현재 회사 보유 주식 수는 166만9591주다.김 대표는 “오는 30일 만기되는 신한금융투자 주식담보대출 240억원 중 기간 연장이 안 된 140억원을 상환할 목적으로 매도했다”고 설명했다. 금융감독원은 김 대표와 일가족의 주식 매도를 모니터링하고 있다.
헬릭스미스 주가는 지난 23일 종가 기준 17만1400원에서 24일과 25일은 연속 하한가를 기록했고 27일 주가 역시 전날 대비 3.42%(2600원) 내린 7만3400원에 거래됐다. 시가총액도 지난 23일 기준 3조6543억원에서 27일 1조5649억원으로 4일만에 2조원이 증발했다.
일각에선 잇따른 임상 실패로 바이오 업계에 대한 불신 확산과 기업의 모럴해저드를 우려하고 있다. 상장 폐지 절차를 밟고 있는 코오롱티슈진과 판매를 담당한 코오롱생명과학의 골관절염 유전자치료제 ‘인보사’ 사태로 국내 바이오산업 신뢰 상실에 불을 붙인 뒤 계속 기름을 들이붓는 격이다.
신라젠과 에이치엘비(지난 6월 전체생존율 성적 저조) 등 임상 3상 성공을 기대하게 했던 기업들이 임상 실패 이후 보여준 행태도 우려스럽다. 임상실패를 발표한 뒤 오너는 보유한 주식을 매도하고 임상을 다시 설계해 재도전하겠다고 밝히며 기술이전을 시도해 임상비용 등 소요 재원을 확보하겠다는 대응 과정도 거의 차이가 없다.
문은상 신라젠 대표는 2017년 말에서 2018년 초까지 신라젠 주가가 고점에 있을 무렵 보유 주식을 집중 처분해 1300억원가량을 챙긴 뒤 고급빌라와 주택을 잇따라 매입하고 아내 명의의 부동산 개발·공급업체를 설립하는 등 스스로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로 빈축을 샀다. 임상 실패를 예견하고 사전에 자산 확보에 나선 것 아니냐는 주주들의 의혹이 터져나오고 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임상 실패 등이 단기간에 반복되면서 제약바이오 산업이 오랜 기간 축적한 신뢰가 한 순간에 무너지고 있다”며 “바이오 산업에 대한 신뢰 회복과 시장 정상화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바이오협회 관계자는 “기초적인 임상 과정에서 비정상적 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경험·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임상디자인 전문가와 임상시험수탁기관(CRO) 육성 등 기초체력을 다질 수 있는 장기적인 임상 정책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바이오전문지인 피어스바이오텍은 “약물 효능 미달과 미숙한 임상 진행 등으로 한국 바이오산업은 큰 타격을 입게 됐다”며 “에이치엘비, 코오롱생명과학, 신라젠 등이 수십억달러 규모의 시가총액 손실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