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구기관서 'NDMA' 1일 권고 섭취량 3만배 검출 … 늑장대응에 10일간 관련약 처방환자 위험 노출
발암물질인 ‘N-니트로소디메틸아민(NDMA)’이 검출된 라니티딘(ranitidine) 성분 의약품에 대해 잠정 제조·수입 및 판매중지 조치가 내려졌다. NDMA는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가 지정한 인체에 발암유발 추정물질(2A)로 지난해 고혈압치료제 성분인 발사르탄에서 검출돼 논란이 된 물질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26일 오전 10시 정부서울청사에서 국내 유통 라니티딘 함유 제제를 수거해 검사한 결과 NDMA 잠정관리기준을 초과한 원료의약품 7종을 확인했으며 이를 사용한 완제의약품에 대해 판매중지한다고 밝혔다. 대상 제품은 조사 대상 완제의약품 395개 품목 중 133개사 269개 품목이다. 이 중 전문의약품이 113개사 175개, 일반의약품은 74개사 94개 제품이다.
이번 판매중지 조치와 관련해 식품의약품안전처의 뒷북 행정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미국 식품의약국(FDA)과 유럽의약품청(EMA)이 지난 13일(현지시각) 라니티딘 성분 대표제품인 ‘잔탁정’에서 NDMA가 검출됐다고 발표하자 식약처는 국내 유통 중인 잔탁 3품목과 원료의약품 6개를 긴급 수거해 검사했다. 잔탁은 위산과다, 속쓰림, 신트림 등에 사용하는 구세대 위장약이다.
지난 16일 식약처는 검사 결과 조사대상 의약품에서 NDMA가 검출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현재 수입 또는 국내 11개소에서 제조되는 모든 라니티딘 원료와 해당 원료를 사용한 의약품 395품목을 대상으로 검사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10일이나 지난 26일 원료의약품 7종에서 NDMA가 검출돼 전 품목 판매금지 처분을 내리며 기존 발표했던 입장을 뒤집었다.
이미 캐나다, 스위스, 이집트, 파키스탄, 독일 등 12개 국가에선 회수명령 또는 유통판매 중지 조치가 내려졌다. 하지만 식약처는 미국 FDA의 조사 결과가 나오면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업계 파장을 고려하면서 즉각적 조치 대신 늑장 대응으로 시간을 허비했다. 미국 FDA와 유럽 EMA는 지난 13일 잔탁 등에서 검출된 NDMA가 인체에 유해한 수준이 아니라며 회수 조치없이 추가 조사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25일 발표하겠다던 계획도 하루 미뤘다. 이미 제약업계는 라니티딘 성분약이 회수 조치에 들어갈 것이란 불안감을 가지고 식약처 발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업계 관계자는 “식약처 내부적으로 제품 회수로 가닥을 잡았는데도 공식 발표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가 왜 이제서야 공식화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대한의사협회는 이미 지난 24일 라니티딘 계열 의약품의 처방을 교체할 것을 권고하고 나섰고 대한약사회도 지난 25일 이 성분의 일반의약품 판매에 신중을 기할 것을 당부하는 등 분위기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음에도 식약처는 늑장대응으로 일관했다. 지난해 고혈압약에서 NMDA가 검출된 ‘발사르탄 사태’ 등을 겪고도 선제적으로 검사해 외국 기관보다 빠르게 문제제기 하는 모습은 여전히 찾아보기 힘들다.
그 사이 미국 FDA와 유럽EMA의 잠정 조사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잔탁 제조사인 노바티스의 자회사 산도스는 FDA 기준 허용치를 넘는 NDMA가 검출됐다며 자발적으로 유통 중단 및 제품 회수 결정을 내렸다. 미국 연구기관 밸리슈어(Valisure)는 잔탁 150mg 1정당 최소 251만~327만ng이 검출됐다며 FDA에 회수조치를 건의했다. NDMA의 1일 섭취 허용량은 몸무게 50kg 건강한 성인 기준 95.9ng이다. 3만배가 넘는 양이 검출된 것이다.
국내서 유통되는 라니티딘 성분 완제의약품에 들어가는 원료를 공급하는 7개 제조소에 대한 조사 결과 NDMA 검출 수치는 미검출에서 최대 53.50ppm까지 큰 편차를 보였다. 식약처는 이 성분이 주성분이 아닌 불균등하게 분포하는 이물질이기 때문에 지난번 검사에선 불검출됐던 것이라 주장했다. 라니티딘 NDMA 잠정관리기준은 0.16ppm으로 잠정관리기준은 라니티딘 1일 최대복용량인 600mg을 평생 섭취한다는 가정하에 산정됐다.
일각에선 이 기준이 국제표준이 아닌데다 1일 최대 복용량을 평생 섭취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게 과도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발사르탄 성분 고혈압약처럼 평생 복용해야 하는 치료제가 아니라 일시적인 증상을 완화할 때 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발사르탄 사태 때 설정한 0.3ppm보다 더 강화됐다.
박종혁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은 “식약처가 평생 섭취하는 것을 전제로 관리기준을 정한 것은 라니티딘이 의약품이기 때문”이라며 “이 약을 평생 복용하진 않지만 장기복용하는 사람도 제법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발암 가능성이 있는 물질을 굳이 복용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식약처는 국제의약품규제조화위원회 가이드라인(ICH M7), 국내·외 자료, 중앙약사심의위원회 전문가 자문 등을 참고해 관리기준을 설정했다고 해명했다.
식약처는 이번 NDMA검출이 지난해 중국산 발사르탄 원료에 혼입된 것과는 달리 라니티딘 성분의 구조적 문제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라니티딘에 포함되어 있는 ‘아질산염’과 ‘디메틸아민기’가 시간이 지나며 자체적으로 분해·결합해 생성되거나, 제조과정 중 아질산염이 비의도적으로 혼입돼 생성되는 것으로 추정했다. 조사위원회 및 인체영향 평가위원회를 구성해 정확한 원인을 분석한다는 방침이다.
보건복지부는 해당 의약품이 의료기관에서 처방 및 조제되지 않도록 조치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의약품안전사용정보시스템(DUR)을 통해 처방 및 조제를 차단하고 건강보험 급여 적용을 정지했다. 국내 라니티딘 성분 의약품 복용 환자 수는 9월25일 기준 약 144만3000명이다. 해당 약을 처방받은 환자는 기존 약을 처방받은 병의원에 방문해 상담을 받아야 한다. 다른 약제로 재처방을 받을 때 1회에 한 해 본인부담금이 면제된다. 기존 처방받은 약을 지참해야 한다.
이번 조치로 시장규모 약 2660억원으로 추정되 국내 라니티딘 성분 의약품 시장이 통째로 날아갈 위기에 처했다. 오리지널 제품인 잔탁이 차지하는 금액은 2018년 기준 6180만원에 불과해 복제약(제네릭)을 제조하는 대웅제약, 구주제약 등 국내 제약사가 고스란히 손해를 보게 됐다.
식약처의 늑장대응이 반복되는 동안 환자와 제약사는 연달아 피해를 보고 있다. 발사르탄 사태, 35세 이상 흡연 여성의 경구피임약 판매 금지 등 중요한 사안을 다루는 데도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수많은 환자는 약을 처방받았다. 지난 16일 첫 NDMA검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국내 유통 제품에선 미검출 됐다고 자신있게 발표하던 식약처는 무려 10일이 지나서야 입장을 바꿨다. 발암 가능성이 있는 의약품을 10일 동안 처방하도록 손을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같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식약처는 브리핑을 통해 지난 20일, 23일 전문가 회의를 거쳐 선제적 조치를 내놓았다고 자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