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을 활용한 신약개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장기간 대규모 투자를 해도 신약으로 상용화되는 비율이 0.01%에 불과한 신약개발의 특성상 AI기술을 활용하면 신약후보물질 발굴의 정확도를 높이고 개발기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어서다. 신약후보물질은 보통 5000~1만개 중 하나 꼴로 최종 판매허가를 받는다.
신약개발 실패의 주요인으로는 효능 부족과 부작용 문제까 꼽힌다. AI를 활용하면 임상단계 이전부터 후보물질의 효능과 부작용을 문헌분석, 독성예측, 시뮬레이션 등 다각적으로 검증해 실패에 따른 물적 시간적 손실을 사전에 막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신약개발을 위해 한 사람이 조사할 수 있는 자료는 한 해에 300여건 수준이나 AI는 100만건 이상의 논문을 읽고 400만명 이상의 임상데이터를 분석한다. 이 연구체계가 발전돼 신약개발에 활용되면 소규모 제약사가 비용과 기간을 대폭 줄여 블록버스터급 약물 개발을 두고 ‘빅 파마’와 경쟁하는 게 가시화될 것으로 업계는 기대하고 있다.
생명공학정책연구센터 자료에 따르면 전체 헬스케어 및 신약연구개발 비용 중 AI를 활용한 연구 건수와 금액이 큰 폭으로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2년 26건, 9400만달러(약 1034억원)에서 2016년 173건, 13억2700만달러(약 1조4600억원)로 4년 사이 14배 이상 늘어났다.
지난 15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최된 ‘AI Pharma Korea Conference 2018’에서 AI플랫폼 기업인 이노플렉서스의 최고경영자 건잔바르 박사는 “맥킨지컨설팅의 연구에 따르면 인공지능이 의료 및 생명공학 분야에 미치는 영향이 1조달러(약 11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며 “인공지능은 신약개발과정에서 참여자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실리콘밸리 혁신기업인 뉴메디의 바이오의학 책임자 마이클 제뉴지크 박사는 “신약개발에는 보통 10년 동안 50억달러(약 5조5000억원)가 소요돼 시장가치가 있는 치료제에만 집중하기 마련”이라며 “인공지능으로 방대한 생물학·임상 데이터를 활용하면 시간과 비용을 10분의 1 수준으로 줄이고 개발할 신약의 다양성도 확보할 수 있다”고 밝혔다.
글로벌 대형 제약사는 AI기업과 협업해 신약개발에 착수하고 있다. AI 기업들은 제약사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솔루션을 공급하면서 신약후보물질 발굴, 신약 용도변경 등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일부 기업은 자체 신약후보물질 파이프라인을 보유하고 직접 개발하는 경우도 있다.
AI 기술을 신약개발에 활용하는 스타트업은 전 세계 100여개 이상 설립됐으며 미국, 유럽에선 AI 및 바이오인포매틱스(Bio Informatics) 분야 기업이 제약사와 활발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화이자, 테바 등은 IBM의 ‘왓슨’을 도입해 면역항암제, 호흡기·중추신경계 질환 분석에 활용하고 있다. AI기술 스타트업인 영국의 베네볼렌트AI(Benevolent AI)는 얀센과, 스코틀랜드의 엑스사이언티아(Exscientia)는 사노피 및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과 제휴해 임상단계 후보물질에 대한 평가 및 난치성 질환 신약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신약후보물질에 대한 정보와 임상시험에 관련된 방대한 빅데이터를 구축하고, 약물·표적(바이오마커)·질병에 관한 정보를 탐색하고 있다.
실제 신약후보물질을 발굴한 사례도 있다. 지난 9일 네이처지에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미국 워싱턴 벨뷰컬리지(Bellevue college) 연구팀은 유전체분석 결과 등 빅데이터만을 활용해 치쿤구니아 바이러스(Chikungunya virus: 열대숲모기·흰줄숲모기에 물려 전파되며 고열과 다발성관절통을 유발) 치료 신약후보물질을 발견했다. 일체의 실험없이 컴퓨터 프로그램을 활용한 결과로 신약개발연구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사례로 기록됐다.
국내 제약사도 AI기술 활용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최근 SK바이오팜은 SK C&C와 함께 중추신경계 특화 연구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AI기반 ‘약물설계(Drug Design) 플랫폼’을 개발했다. 기존에 특허등록된 물질 이외에 새로운 화합물을 설계할 수 있는 최초의 플랫폼이다.
이밖에 한미약품·대웅제약 등 제약사가 병원, 연구기관과 빅데이터 및 AI활용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으나 글로벌 시장과 비교해 역부족이라는 평가다. 빅데이터를 체계적으로 분류 및 관리하는 시스템조차 구축돼 있지 않아서다. 복제의약품(제네릭) 제조에 치우쳐있던 구조 속에서 최근에야 글로벌 신약개발에 눈을 뜬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가 AI기술을 활용한 한단계 빠른 혁신이 요구되지만 넘어야 할 장벽이 높다.
AI 스타트업 업체인 스탠다임의 송상옥 최고혁신책임자는 “국내 제약사는 데이터나 기술적인 준비보다 AI를 활용한 신약연구에 대한 새로운 자세가 필요하다”며 “이 비즈니스엔 창의적 노력이 많이 필요한 점을 이해하고 그 가치에 대해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도 최근 이 분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산업 지원을 위한 걸음마를 시작했다. 지난 6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선 ‘제약산업 육성지원 종합계획’에 인공지능을 이용한 신약개발 지원계획‘이 포함될 수 있도록 결정했고, ‘인공지능 신약개발 지원센터 설치 및 운영’ 근거를 신설했다. 혁신형 제약기업 인증을 신청할 수 있는 범위에 신약개발 전담부서 운영기업을 추가하고 AI 이용 신약개발 투자기업도 대상에 포함시켰다.
양현진 신테카바이오 박사는 “한국의 상황에서 정부의 AI 상용화에 필요한 규제 완화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인공지능 관련 정부지원 연구과제가 꾸준히 나오는 것은 작지만 긍정적인 변화”라며 “일부라도 데이터가 공유되고 있어 제도개혁을 이루는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AI를 활용한 제약바이오산업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100% 정확도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기존 방식에서 발생하는 손실을 80% 이상 방지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의 견해다. 한국의 미래 먹거리인 제약바이오산업이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려면 AI 활성화를 통한 혁신이 필요하다.
AI 전문기업인 투엑스알의 앤드류 라딘 최고책임자는 “효율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기업은 더욱 발전하겠지만 변화의 흐름을 따르지 못하는 기업은 도태될 것”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