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은 점령지마다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을 전파했다.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금의 와인 산지가 대부분 로마시대에 개척됐다. 로마는 프랑스 남부 론(Rhone)과 랑그도크(Languedoc) 지방을 시작으로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부르고뉴(Bourgogne)와 보르도(Bordeaux)를 와인 산지로 개척했다.
특히 보르도는 지롱드강(Gironde Rivier)과 대서양을 이용해 영국으로 와인을 이송할 수 있다는 편리함 덕분에 로마인이 적극적으로 개척한 곳이다. 지롱드강은 가론강과 도르도뉴강이 합류하는 벡당베스에서 대서양에 이르는 하류의 약 72㎞를 가리킨다.
12세기부터 15세기까지 약 300년간 보르도는 잉글랜드(England) 땅이었다. 로마가 패망하면서 보르도 지방에는 아키텐(Acquitaine)공국이 자리잡았는데, 아키텐의 공녀 엘레노어(Eleanor)가 잉글랜드 왕과 결혼하면서 보르도 땅을 지참금으로 가져갔기 때문이다.
1137년 엘레노어는 15세에 아버지를 잃고 아키텐공국의 상속자가 됐다. 그녀는 후견인이었던 프랑스왕 루이 6세의 아들 루이 7세와 결혼했지만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아 결혼 15년만인 1152년에 이혼했다. 이후 영국 귀족 헨리 플랜타저넷(Henry Plantagenet)과 재혼했는데 그가 나중에 잉글랜드왕 헨리 2세가 된 인물이다.
자국에서 와인을 생산할 수 없는 잉글랜드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 와인을 수입했다. 1330년 기준 와인 1갤런 가격이 독일 와인은 6실링, 이탈리아산 베르나키아가 32실링으로 최고급이었던 반면 보르도 와인은 4실링에 불과했다. 보르도 와인은 서민을 위해 대량 수입하던 저급 와인이었던 셈이다.
당시는 메독(Medoc)과 생테밀리옹(Saint-Emilion)이 개발되기 전인데다가 포도 재배와 양조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보르도 와인은 색과 향이 약하고 타닌만 강한 거친 와인이었다. 잉글랜드에서는 보르도 와인을 클라렛(Claret)이라고 불렀다. 불어로 흑장미를 뜻하는 클래레(Clairet)에서 왔다. 와인색이 장미색처럼 연하고 힘이 없어 저가에 대량으로 팔리던 벌크 와인(bulk wine) 수준이었다. 잉글랜드 외에는 다른 나라로 수출할 길이 없다 보니 보르도 와인 수출량의 80%를 잉글랜드가 차지했다.
잉글랜드 와인 수입상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보르도는 잉글랜드 덕분에 살림살이가 피다보니 잉글랜드가 지배했던 300년 내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심지어 잉글랜드의 일부라고 당연시하게 됐다. 하지만 프랑스왕은 유럽 최대 와인 산지인 보르도가 영국 땅인 것에 불만을 품다가 영토 회복을 위해 백년전쟁(1337~1453)을 촉발하기에 이르렀다.
15세기 중반 잉글랜드는 전쟁에서 패해 보르도를 잃었고 보르도 와인에 높은 관세를 매겼다. 잉글랜드 상인들은 보르도의 대안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새로운 와인 산지를 개척했다. 보르도는 큰 고객을 잃었을 뿐 아니라 경쟁자까지 생긴 셈이었다. 저품질의 보르도의 와인산업은 위기에 봉착했지만, 이는 고급와인 생산기지로 발전하기 위한 전환점이 됐다.
보르도 와인은 약 200년간 긴 암흑기를 보내다 17세기 중반에 와서야 고급화의 길로 서서히 접어들었다. 이를 주도한 사람이 아르노 드 퐁탁(Arnaud III de Pontac)으로, 보르도 지방의회 초대 의장을 지낸 귀족이었다.
퐁탁은 보르도에 샤토(chateau) 개념을 도입한 주역이다. 퐁탁은 보르도 바로 남쪽 페삭(Pessac)에 있는 자신의 와이너리 테루아르(terroir토양)가 특별해 다른 곳에서 생산된 와인보다 맛이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네고시앙(negociant·도매상)들은 보르도의 여러 와이너리로부터 와인을 오크통째로 사들여 숙성시킨 뒤 블렌딩해서 자기들 상표를 붙여 팔았으므로 품질과 가격의 차별화를 꾀할 수 없었다. 이에 퐁탁은 자기 와인에 다른 와인보다 두 배 이상 비싼 가격을 매겼고 네고시앙들도 퐁탁의 와인을 다른 와인과 섞지 않고 별도로 비싼 값에 팔기 시작했다. 1660년부터 아예 자기 와인에 고유한 이름을 붙여 직접 판매하기 시작한 게 지금도 보르도 5대 명품 와인으로 꼽히는 오브리옹(Haut-Brion)이다. 퐁탁은 훌륭한 와인 제조가였다기보다는 뛰어난 마케터로 보는 게 맞다. 테루아르란 판단 가치를 만들고 이를 극대화해 상품성을 높였다는 측면에서 그는 개척자다. 더욱이 그는 아들을 영국으로 보내 오브리옹 와인을 독점 판매하는 폰탁스 헤드(Pontack’s Head)라는 주점도 오픈했고 사상가 존 로크(John Locke),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 다니엘 디포(Daniel Defoe), 걸리버 여행기를 쓴 조나던 스위프트(Jonathan Swift) 등이 이곳을 자주 방문케 하는 명사 마케팅을 썼다.
이후 17세기 후반부터 메독(Medoc)이 개발되면서 오브리옹을 모델로 삼은 샤토 와인 시대가 정착됐다. 메독은 보르도의 다른 와인 산지에 비해 훨씬 늦은 17세기에 네덜란드 상인들에 의해 개발됐다. 화란 상인은 당시 영국에서 인기를 끌던 보르도 남쪽 그라브(Graves) 지역 와인이나 포르투갈 와인과 대적할 만한 와인을 만들어 팔 생각으로 포도밭을 물색하다가 메독을 선택했다. 당시 메독은 지롱드 강가 서쪽에 위치한 드넓은 습지로 가축에게 먹일 풀을 생산하던 곳이었다. 네덜란드 상인들이 이 습지에서 물을 빼내자 뜻밖에도 포도를 기르기에 최적인 자갈밭이 드러났다. 이곳이 최상의 테루아임을 알아본 몇몇 화란인들은 바로 땅을 사들였고 오브리옹처럼 자신들의 이름을 붙인 와인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메독의 대표적 명품 와인인 라피트(Lafite), 라투르(Latour), 마고(Margaux), 무통(Mouton) 등이 탄생하게 됐다.
지금도 12~15세기의 보르도 와인의 주산지인 보르도 남쪽 그라브나 북쪽 앙트르 두 메르(Entre Deux Mers)에서 활발하게 와인이 생산되고 있지만 아무래도 브랜드 가치에서 메독 와인에 크게 밀리는 실정이다. 특히 1855년 파리 엑스포를 통해 61개 샤토를 1~5등급으로 매겨 발표한 것은 프랑스 와인산업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이 때 보르도 상공회의소와 와인상연합회는 보르도의 우수 샤토, 즉 그랑 크뤼(Grand Cru)를 뽑아 공표했다.
하지만 그랑 크뤼 등급은 이미 좋은 등급을 받은 와이너리 소유자의 기득권 때문에 그동안 딱 두번만 바뀌었다고 한다. 하나는 실수로 누락된 샤토 캉트메를(Cantemerle)을 1855년 말 5등급에 포함시킨 것이다. 두 번째는 무려 118년이 지난 1973년 샤토 무통 로쉴드(Mouton-Rothschild)가 2등급에서 1등급으로 승격된 것이었다. 무통 로쉴드는 유대인 출신 영국인이라는 이유로 등급 판정에서 배척받다가 끈질긴 로비 끝에 저평가된 한을 풀었다고 한다. 오래된 그랑 크뤼 등급을 곧이곧대로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수 있다. 와인 애호가답게 각자의 취향대로 선택해 마시면 최선일 것이다. 프랑스 와인은 원산지 표시가 엄격하다. 원산지 호칭 통제제도(Appellation d’Origin Control’ee, AOC)에 의해 확실이 인정된 지역에서 생산되고 품질과 시음 기준에 적합해야 승인을 거쳐 ‘아펠라숑’을 붙일 수 있다.
샤토(Chateau)는 프랑스어로 성이나 저택을 의미하지만 당시 와이너리들 중에는 성이나 저택을 소유한 곳이 드물었다. 그들에게 샤토는 17세기 말부터 이어온 자신들의 전통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상징적 표현에 불과했다. 실제로 와이너리에 고풍스러운 저택을 짓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 이후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