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싱가포르에서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마잉주 대만 총통의 역사적인 첫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정상회담이 이뤄졌다. 두 정상은 회담을 마치고 만찬장에서 대만 진먼다오(金門島)의 특산주인 1990년산 ‘진먼고량주’ 두 병을 나눠 마셨다. 진먼다오는 중국 대륙과 맞닿은 섬으로 중국과 대만의 갈등을 상징한다.
고량주(高梁酒)는 중국인이 사랑하는 술 중 하나다. 수수로 만든 증류주로 국내에서는 ‘배갈’ 또는 ‘백알’로 불린다. 고량주란 이름은 대만에서 주로 사용한다. 중국에서는 무색 투명하다는 의미로 ‘백주(白酒, 바이주)’라 칭한다. 배갈은 백(白)자에 수분이 거의 없는 알코올이라는 뜻의 간(干)이 합쳐진 배간(白干)에서 유래됐다. 한자어의 한국식 발음과 중국식 발음이 섞인 것이다. 중국인들은 배갈을 ‘바이간’으로 읽는다.
과거에 고량주는 중국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술이었다. 최근에는 저렴한 맥주가 생산되면서 고량주의 위상은 예전만 못하다. 하지만 중국 경제가 성장하고 중국인의 소득이 증가하면서 고량주의 소비량도 서서히 늘고 있다.
조호철 국세청 기술연구소 연구원은 “고량주는 세계 어느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고체발효법으로 제조한다”며 “잘게 부순 수수와 각종 곡식을 섞은 뒤 적당히 물을 뿌려 반고형상태로 만들어 나무나 벽돌로 만든 상자에 담아 밀봉시켜 반지하의 저장고에서 9~12일 간 저장한다”고 말했다. 이어 “발효가 끝난 고형체를 증류기에 넣고 증류시키면 알코올 도수 50~70도 가량의 고량주가 완성된다”며 “원료 확보가 용이하고 발효가 순조로운 겨울에 주로 만든다”고 설명했다. 과거엔 주질 개선을 위해 증류 후 남은 원료를 다시 사용했지만 최근에는 거의 하지 않는다. 증류를 통해 나온 알코올은 항아리에 넣고 3개월 이상 숙성시킨다.
중국 고량주의 역사는 5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증류주는 8세기 페르시아 출신 연금술사였던 아부 무사 자비르 이븐 하이얀(Abu Musa Jabir ibn Hayyan)에 의해 발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3세기 중반 몽골족이 서역을 정복하고 페르시아와 아랍의 문화가 중국에 전해지면서 고량주가 개발됐다는 게 정설이다. 최근에는 10세기 요나라 시절 처음 제조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요는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중북 북부 지역과 내몽고 사이에서 실크로드를 이용해 교역한 나라다.
1952년 중국 경공업부는 고량주 품평회를 거쳐 4종을 국가명주로 발표했다. 구이저우(貴州)의 ‘마오타이(茅台)’, 산시(山西)의 ‘펀주(汾酒)’, 루저우의 ‘루저우라오자오(瀘州老窖)’, 시안(西安)의 ‘시펑주(西鳳酒)’가 주인공이다. 1963년 이빈(宜賓)의 ‘우량예(五粮液)’, 하오저우(毫州)의 ‘구징공주(古井貢酒)’, 칭다오(成都)의 ‘취안싱다취(全興大曲)’, 준이(尊義)의 ‘동주(董酒)’가 추가로 지정했다. 이후 몇차례 품평회가 열려 몇몇 술이 추가되고 제외됐지만 8대 명주가 기본 틀을 유지하고 있다.
마오타이는 1915년 파나마 만국박람회에서 세계 3대 명주로 꼽혔다. 중국인들은 마오타이를 중국인의 혼을 승화시켜 빚은 술이라고 칭송한다. 마오쩌둥의 중국혁명을 기념하는 정부 공식만찬에 반드시 나오며, 미국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도 식탁에 올려졌다.
펀주는 당나라 시절 시인이었던 두목의 시에 등장하는 술로 산시성의 신천수를 이용해 만든다. 청나라 문헌인 ‘경화록’에서는 중국에서 생산되는 술 중 으뜸으로 기록돼 있다. 맑고 향이 짙은 게 특징이다.
루저우라오라오의 원산지인 루저우는 중국 내에서 술의 고향으로 불린다. 이 술이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양조장 동굴은 국보로 지정되기도 했다. 향긋한 향에 달콤하고 깔끔한 맛이 특징이다.
시펑주는 ‘주하이(酒海)’라는 독특한 용기를 이용해 숙성한다. 주하이는 싸리나무로 짠 거대한 바구니로 돼지피, 계란흰자, 밀랍, 유재기름 등을 일정한 비율로 섞어 겉에 바른다. 이 술은 단맛, 신맛, 매운맛, 쓴맛 등을 모두 갖췄다고 평가받고 있다. 시면서도 떫지 않고, 쓰면서도 달라붙지 않으며, 향기로우면서도 코를 자극하지 않고, 매우면서도 목구멍을 찌르지 않으며, 마신 후엔 단맛이 오래도록 감돈다.
우량예는 수수 외에 보리, 쌀, 조, 찹쌀 등을 이용해 만든 술로 향이 짙고 구수하다. 맛은 시원하면서 부드러우며 뒷맛이 깨끗한 게 특징이다.
구징공주는 맛이 순하며 향이 진하다. 과거엔 구징(古井, 오래된 우물)물로 만들어 ‘구징주(古井酒)’로 불렸다. 명나라 시절 중국 황실에 공물로 바쳐지면서 ‘공(貢)’자가 붙어 ‘구징공주’가 됐다.
취안싱다취의 산지인 칭다오는 맥주로 유명하다. 칭다오맥주가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취안싱다취는 쇠퇴의 길을 걷는 듯했지만 1998년 600여년 전 원나라 시절 사용된 세계 최고(最古) 양조장 유적이 발견되면서 반전을 이뤄냈다. 취안싱다취 제조업체들은 이 점을 착안해 마케팅에 활용하면서 이름을 알리고 있다.
동주는 장기간 보존한 증류원액을 재증류해 오래 발효시킨 술과 혼합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조니워커나 발렌타인처럼 일종의 블렌딩 고량주로 생각하면 쉽다. 103가지 약재를 첨가해 8대 명주 중 향미가 가장 독특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량주는 맛과 향기에 따라 ‘장향(醬香)’, ‘농향(濃香)’, ‘청향(淸香)’ 등 세 가지로 나뉜다. 외국인은 고량주의 맛과 향기를 가늠하기 힘들다. 장향은 마오타이, 농향은 우량예·루저우라오자오, 청향은 펀주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에서는 중국 산둥성 옌타이 지역의 ‘연태 고량주(煙臺古釀)’가 고량주 중 가장 유명하다. 알코올 도수가 30~40도로 일반 고량주보다 상대적으로 낮다. 포도주 제조로 유명한 장위(張裕)그룹에서 만든 것으로 2003년 국내에 처음 정식 수입됐다. 국내 고량주 시장의 약 50%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2006년부터 10년간 국내 매출액이 약 10배 늘었다. 지난해 판매량은 약 15만상자(90만명)에 이른다. 초기에는 중식당에서 주로 판매됐지만 최근에는 한식당, 일식당, 슈퍼마켓 등에서도 연태 고량주를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에서도 고량주가 생산된다. 1970년대 동해양조, 풍원양조 등에서 고량주를 제조했지만 중국산 저가 고량주가 수입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2010년 대구 지역의 수성양조가 수성고량주를 내세워 한국산 고량주를 선보이고 있다. 맛은 중국 고량주에 비해 크게 뒤쳐지지 않는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