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소주는 희석식, 엄밀히 증류주 아냐 … 증류식 소주, 원료 향미 고스란히 담아 정성 듬뿍
최근 영국 주류 전문지 ‘드링크스 인터내셔널’이 국제 시장 조사 기관인 ‘유로모니터’와 함께 지난해 세계 180개 증류주 브랜드의 판매량을 조사한 결과 1위는 6138만 상자(1상자 9ℓ 기준)가 팔린 진로의 소주 ‘참이슬’로 나타났다. 2위인 미국 보드카 ‘스미노프’(Smirnoff)의 판매량 2470만 상자의 2.5배에 달하는 압도적 1위다. 롯데주류의 ‘처음처럼’은 2390만 상자를 팔아 2위와 근소한 차이로 3위에 올랐다.
진로와 롯데의 판매 실적을 더하면 약 8528만 상자로 위스키 ‘조니워커’의 전세계 판매량(1800만 상자)의 약 5배에 달한다.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스웨덴산 보드카 ‘앱솔루트’(16위·1121만 상자), 미국산 위스키 ‘잭 다니엘’(19위·1058만 상자) 등은 한국 소주 판매량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유명 위스키 ‘발렌타인’은 전 세계에서 647만 상자를 팔아 소주 판매량의 7.5%에 그쳤다.
참이슬은 전체 생산량의 94% 이상, 처음처럼은 96% 이상이 국내 시장에서 판매되는 전형적인 ‘로컬(local)’ 술이다. 지난해 조사(2010년 판매분)에선 금복주의 참소주(11위), 무학의 화이트(14위), 대선주조의 C1소주(18위) 등 총 5개 소주가 세계 증류주 판매 20걸에 들었다. 한국인의 폭음 문화가 한국 로컬 술을 세계 20대 증류주 명단에 올리고 있다.
증류주는 양조주보다 순도 높은 주정을 얻기 위해 1차 발효된 양조주를 증류기에 넣고 끓여 정제한 술로 알코올과 물의 끓는점 차이를 이용해 만든다. 양조주를 서서히 가열하면 끓는점이 낮은 알코올이 먼저 증발하는데, 이 기체를 모아 냉각시키면 고농도의 알코올 액체를 얻을 수 있다.
대표적인 증류주로 위스키(Whisky), 브랜디(Brandy), 진(Gin), 럼(Rum), 보드카(Vodka), 테킬라(Tequila), 아콰비트(Aquavit) 등이 꼽힌다. 알코올 도수가 다른 종류의 술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평균 35~90도이며 90도 전후의 술도 존재한다. 바로 마시기도 하며 칵테일의 기주(밑술)로도 사용한다.
기초적인 증류법은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바빌로니아인은 증류의 원리를 탐구하고 원시적인 증류 장치를 개발해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초기에는 바닷물로 식수를 얻거나 향수를 만드는 데 증류법이 사용됐다. 현재 흔히 사용되는 증류법은 8세기 중세 이슬람 화학자에 의해서 개발됐다. 화학자 자비르 이븐 하이얀은 와인을 증류해 얻어진 물질에 알코올이란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술을 금하는 이슬람권의 문화에 따라 알코올을 술로 사용하지 않고 향수나 다른 화학물질의 원료로 썼다.
이슬람에서 개발된 증류주는 유럽으로 건너가면서 본격적으로 개발됐다. 14세기 중반 유럽인의 3분의 1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페스트가 창궐하자 알코올은 급격히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페스트의 원인도 모르고 치료제가 없는 상황에서 알코올이 불가사의한 질병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5세기 독일의 연금술사 브라운 쉬바이그는 ‘증류 기술’이란 책을 통해 증류법을 정리해 발표했다. 이를 통해 증류주의 생산이 촉진됐고 거대한 증류기를 이용한 위스키, 브랜디, 보드카, 진 등의 생산이 이뤄졌다.
러시아나 북유럽 등 추운 기후 지역에서는 술을 얼리는 방식으로 증류주를 얻기도 했다. 알코올은 물보다 어는 점이 훨씬 낮아 술을 얼려 위에 얼음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알코올 도수를 높였다.
대표적인 국내 전통주로는 소주, 청주, 막걸리 등이 꼽힌다. 전통주를 만드려면 먼저 쌀로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어야 한다. 시간이 지나 누룩이 밑에 가라앉으면 맑은 술이 위로 뜨게 된다. 용수(대나무로 만든 일종의 체)로 맑은 술을 뜬 게 청주다. 지게미와 함께 남은 술을 거른 게 막걸리다. 청주를 불로 지펴 얻은 순도 높은 알코올은 전통소주다. 이 셋 중 증류주는 전통소주가 유일하다.
국내 증류식 소주는 한 번 증류함으로써 고구마, 보리, 쌀 등 각 곡류가 가진 풍미를 담는다. 숙성 역시 일반적인 소주에 비하면 긴 편이다. 100일에서 1년 정도는 숙성하는 경우가 많다.
전통소주 이외에 진도홍주도 국내 증류주로 이름이 높다. 홍주는 다른 증류주와 달리 인공색소를 넣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붉은 빛을 자랑한다. 고려시대 한반도를 점령한 몽골군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설과 함경평안도 유민이 내려와 홍주 제조법을 알려줬다는 설 등으로 기원이 나뉜다. 고려시대부터 만들어졌지만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조선시대부터다. 당시 진도홍주는 ‘지초주(芝草酒)’로 불리며 최고 진상품으로 꼽혔다. 보리, 쌀, 누룩 등을 발효 및 증류시켜 막 얻은 뜨거운 원주를 지초애 떨어뜨려 지초의 붉은 색소와 약 성분을 적당량 용출시켜 만든다. 한방에서 지초는 독을 풀어 염증을 없애고 새살을 돋게 하는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드링크스 인터내셔널 조사에 오른 한국식 소주가 엄밀하게 증류식 소주는 아니다. 대형 주류회사에서 판매하는 저렴한 소주는 대부분 증류식 소주에 물을 희석시킨 희석식 소주다. 이는 연속식 증류기에 두 번 증류해 뽑아낸 순도 85% 이상의 알코올에 물을 넣은 것이다. 원료의 맛이 거의 나지 않으며 순수한 알코올 자체만 남아 원료의 풍미를 느끼기 힘들다.
희석식 소주는 1920년대 한국에 도입됐다. 가격이 싼 전분질을 당분으로 만든 후 알코올 발효를 시켜 술을 만들고 이것을 여러 차례 증류와 정제 등의 과정을 거쳐 주정을 완성시킨다. 주정에 물과 각종 감미료를 타면 희석식 소주가 만들어진다. 주정을 만드는 전분질은 과거에 고구마, 감자 등이 쓰였으나 이것도 가격이 올라 요즘은 열대 돼지감자인 타피오카나 수입쌀, 오래 묵은 국산 쌀 등을 사용한다.
제대로 만들어진 증류식 소주는 가격이 비싸다. 이에 비해 희석식 소주는 싸게 취할 수 있게 한다. 희석식 소주는 한국의 주정 정제와 감미료 첨가 기술이 뛰어나서인지 맛도 나쁘지 않다. 국산 농산물로 괜찮은 우리 술을 만들어도 희석 소주와 경쟁하기는 쉽지 않다. 이미 희석식 소주에 길들여진 한국 사람의 주머니 사정과 입맛을 바꾸기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