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사회에서 환경 문제는 언제나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였다. 고도 경제성장이 어느 정도 가시화되면서, 환경오염에 경각심을 갖기 시작했고, 1990년대 후반 환경호르몬 이슈가 등장했다.
내분비계 교란물질(endocrine disruptors), 즉 환경호르몬은 동물이나 사람의 체내에 들어가 내분비계기능을 방해하거나 혼란시키는 화학물질이다.
환경호르몬이라는 명칭은 1997년 5월 일본NHK에서 방송된 ‘사이언스 아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처음 등장했다. 프로그램 디렉터인 이구치타이 센 요코하마시립대 이학부 교수와 아카야마후지오 자치의과대 조교수는 외인성 내분비교란 화학물질보다 시청자가 이해하기 쉬운 이름이 없을까 생각하던 중 이같은 명칭을 결정했다.
일본 외 다른 국가에서도 ‘Environmental Hormone’으로 불린 예가 있어 환경호르몬을 완전히 일본 명칭으로는 볼 수 없다. 보통 해외에서는 ‘Endocrine Disruptors(내분비교란물질)’, ‘Endocrine Disrupting Chemicals(내분비교란 화학물질)’ 등으로 불린다.
환경호르몬은 생태계 및 인간의 생식기능 저하, 기형, 성장장애, 암 등을 유발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1996년 미국에서 발간된 ‘잃어버린 미래(Our Stolen Future)’라는 책은 환경호르몬을 오존층 파괴, 지구온난화와 함께 지구 생태계 전체에 위협을 미치는 3대 환경문제로 언급해 전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현재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화학물질은 800개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WHO와 국제연합 환경프로그램이 공동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환경호르몬은 유방암 및 전립선암, 불임, 당뇨병, 성조숙증, 비만, 자가면역질환, 천식, 심장질환, 뇌졸중,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기타 학습장애, 알츠하이머, 파킨슨병 등을 유발할 수 있다. 이 보고서에는 “수많은 합성 화학물질들이 호르몬 체계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아직 제대로 된 검사가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기록돼 있다.
홍윤철 서울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다이옥신, 폴리염화페닐(PCB) 등 환경호르몬에 장기간 노출되면 당뇨병 위험이 2배 이상 높아진다”며 “환경호르몬이 지방조직 등에 침투하면 잔류성 유기화학물질이 서서히 방출돼 인슐린 저항성이 커지고, 이는 제2형 당뇨병의 발생원인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화석연료에서 방출되는 화학물질은 연평균 2000여개에 달한다”며 “현대인은 이들 물질에 사실상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주의를 당부했다.
환경호르몬 종류로는 다이옥신, 유기주석(TBT), 살충제 DDT, 인공호르몬 DES, TPT(트리페닐주석), 비스페놀A, PCB 등이 있다.
다이옥신은 염소를 이용해 펄프를 표백한 공장 폐액에서 처음 검출됐고 이후 종이나 화장지 등에서도 자주 발견되고 있다. 식품의 경우 고기, 유제품, 어패류 등을 통해 인체에 축적될 때가 많다. 이밖에 생활쓰레기 및 유해폐기물 소각, 하수오염, 제철 및 제강산업, 자동차 배기가스, 종이, 판지, 종이펄프 등도 다이옥신의 발생원인으로 추측된다.
이 물질은 간암, 폐암, 인두암 등을 유발하고 기형이나 유산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 갑상선호르몬 과잉 분비를 유도해 구개열 같은 기형을 유발하고 정소를 위축시켜 생식능력에도 영향을 준다. 최근엔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 농도도 변화시켜 여성의 생식력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확인됐다.
유기주석(TBT)은 등뼈가 굽은 방어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물질로 독성이 매우 강하다. 주로 양식장에서 쓰이는 어망에 해조류나 조개가 달라붙지 못하게 하는 방오제(防汚劑)로 사용돼왔다.
TBT가 고농도로 축적되면 성장이 저해되고 인체의 파수꾼 역할을 하는 백혈구와 림프구가 감소한다. 양식장 물고기 등에 축적될 경우 암컷의 불임을 야기해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DDT(dichloro-diphenyl-trichloroethane, 다이클로로 다이페닐 트리클로로에탄)는 유기염소계 화학물로 ‘꿈의 살충제’, ‘죽음의 묘약’ 등으로 불린다. 곤충의 중추신경에 작용해 살충효과를 나타낸다.
천연 에스트로겐과 비슷한 작용을 하기 때문에 곡물이나 야채를 통해 인체에 축적될 경우 생식기능에 영향을 준다. 안정성이 매우 높아 자연분해되지 않고 오랜 시간 체내에 쌓여 치명적이다. 또 지방에 결합하기 쉬워 체내 지방조직에 축적되기도 한다.
비스페놀A(BPA)는 합성수지 원료·콤팩트디스크(CD)·식품저장용 캔 내부 코팅재료 등으로 쓰이는 물질로 내분비계의 정상적인 기능을 방해한다.
미국 국립보건연구소 산하 국립독극물프로그램(NTP)이 2008년 4월 16일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량의 비스페놀을 주입한 실험용 쥐에서 전립샘 종양·유방암·비뇨체계이상·성조숙증 등이 발견됐다. 유아의 경우 소량만 노출돼도 전립선이나 유선조직에 영향을 받게 되고 결국 암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 최근엔 농약이나 공업제품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플라스틱에서도 환경호르몬이 녹아 나오는 것으로 밝혀졌다.
프탈레이트(phthalate)는 플라스틱을 부드럽게 하는 데 사용하는 화학첨가제로 화장품·장난감·세제 등 각종 PVC(폴리염화비닐) 제품이나 가정용 바닥재 등에 광범위하게 쓰인다. 현재 환경호르몬 추정물질로 지목돼 사용이 금지됐지만 여전히 일상생활 곳곳에서 접할 수 있다.
최근 연구결과 이 물질은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유발하고 두뇌 발달도 저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붕년 서울대병원 소아정신과 교수는 “프탈레이트 대사물인 DEHP(Di(2-ethylhexyl) phthalate)가 높은 아동일수록 우전두엽과 측두엽의 피질 두께가 더 얇은 것으로 확인됐다”며 “우전두엽과 측두엽은 공격성, 과잉행동, 불복종, 짜증, 비행 등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 및 정서상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설명했다.
이들 환경호르몬은 근본적으로 폐기물 소각장, 화학공장, 음식물 잔류농약 등을 통해 인체로 전달된다. 먼저 산업시설에 의해 배출된 뒤 대기·수질·토양 등 환경을 오염시킨다. 이후 물고기나 축산물 등 생물체에 축적되고, 최종적으로 사람이 소비하는 음식물을 통해 인체에 들어온다. 음식을 포장할 때 사요하는 랩, 비닐, 플라스틱, 캔 등으로 유입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체내에 축적되면 가짜 호르몬으로 작용해 정자 감소, 불임증가, 생식계 이상, 행동 변화, 암 등을 초래한다. 또 뇌신경계와 아토피나 암 등 면역계 이상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지목된다.
세제 등에 첨가되는 계면활성제는 다량의 환경호르몬이 함유돼 피부막을 손상시키거나 습진과 발진을 일으킬수도 있다. 가정에서 자주 사용하는 주방용품, 식품 포장재, 플라스틱 등에서도 환경호르몬이 검출되기도 한다.
플라스틱 소재 용기를 데우거나, 페트병에 담긴 물을 마시거나, 쿠킹랩을 사용하거나, 통조림 음식을 먹는 행동이 유해한지는 전문가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환경호르몬이 얼마나 축적됐을 때 위험한지’가 과학적으로 명확히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히 밝혀진 게 없기 때문에 예방 차원에서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게 의료계 대부분의 입장이다.
환경호르몬 노출을 최소화하려면 가급적 유기농산물을 먹고, 플라스틱 용기 사용을 줄이는 게 좋다. 플라스틱 용기에 뜨겁고 기름기가 있는 음식을 담으면 환경호르몬 물질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전자레인지를 사용하기보다는 유리그릇 등에 담아 가스불로 직접 데워 먹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