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량진역 주위는 각종 시험이나 취업을 위해 밤낮없이 공부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이들은 시간과 돈을 아껴가며 공부하느라 식사는 간단히 허기를 달래는데 그친다. 노량진역 3번 출구를 나서면 컵밥을 판매하는 노점상으로 차도 쪽이 빽빽하다. 컵밥은 몇 년전까지만 해도 수험생의 음식이었지만 2010년 전후 노량진 수험생들 중심으로 그 맛이 알려지면서 이젠 지역의 문화상품으로 진화했다.
컵밥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주먹밥이 등장한다. 먹을거리가 부족했던 시절에 별다른 양념 없이 소금만 발라 간단하게 만들 수 있어 전쟁시 병사는 물론 서민들의 중요한 비상식량이었다. 주먹밥의 특징은 ‘빨리빨리’와 ‘간단하게’로 지금의 컵밥과 비슷하다.
노량진에서 자취를 하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한 학생은 “자취방에서 밥 해먹을 시간이 부족하거나 귀찮으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컵밥”이라며 “가격도 저렴하고 양도 푸짐해 주변 사람들과 즐겨 먹는다”고 말했다.
지금의 컵밥 먹자골목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부터 형성됐다. 그전엔 떡볶이, 순대 등을 파는 노점뿐이었다. 컵밥을 판매하는 노점상이 많아지면서 메뉴도 다양해졌다. 가게마다 메뉴가 다르지만 김치볶음밥에 토핑을 선택해 먹는 것은 거의 모든 가게가 같다. 가격은 기본 2000원부터 추가되는 재료에 따라 올라간다.
컵밥 노점상을 운영하는 한 상인은 “컵밥은 쉽게 들고 다닐 수 있어 바쁜 노량진 학생들에게 이상적인 메뉴”라며 “학생들의 형편이 대부분 어려워 박리다매 전략으로 판매한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요우커(遊客, 중국인 관광객)들도 노량진을 방문해 컵밥을 맛본다. 한국에 사는 중국 유학생들이 웨이보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이용해 노량진의 먹거리 사진을 올리면서 입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주변 노량진 수상시장 덕도 보고 있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주인공 김수현이 수산시장에서 개불을 사는 모습이 나오면서 요우커들에게 필수코스가 됐다. 수산시장을 들렀다가 육교를 건너 자연스럽게 컵밥골목으로 넘어온다.
컵밥의 인기에 힘입어 노점상들도 조금씩 늘고 있다. 노량진역 일대는 약 50곳이 밀집해 있어 혼잡으로 인한 민원이 적잖게 발생했다. 관할 지방자치단체인 동작구청은 꾸준히 불법 노점상 철거에 대한 공문도 보내고 단속도 실시하지만 실효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2012년 명품거리를 조성하겠다며 컵밥 판매를 금지하고 노점상을 철거하는 등 강경하게 나서기도 했다. 노점상들은 이에 맞서 메뉴도 바꾸고 컵밥에서 ‘호일밥’으로 꼼수 영업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차 단속은 뜸해졌고 흐지부지 되는 모습이다.
위생문제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컵밥을 먹고나서 변비나 배탈이 났다고 호소하는 사람이 꽤 있다. 노점상 특성상 위생 관리도 제대로 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위치가 차도 바로 옆에 있어 먼지나 오염물질이 음식에 들어가기 쉽다. 여름에는 음식이 상하기 쉬워 더욱 주의해야 한다. 노량진 주변 병원에 장염 증상으로 방문하면 문진표 중 길에서 컵밥 등 음식을 먹었냐는 문항도 있다.
식당은 농수산물 원산지 표시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음식에 들어가는 육류는 모두 원산지를 표기해야 하지만 컵밥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컵밥 노점상들은 무허가 점포이므로 이를 지켜야하는 의무가 없다.
컵밥에는 신선한 채소가 드물어 양질의 섬유소를 섭취하기 힘들다. 시든 채소류나 김치 같은 질 낮고 거친 섬유질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기름기가 많아 느끼하고 당연히 고열량 고지방식으로 몸에 해로울 수 있다.
컵밥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식품업계들은 집에서도 쉽게 먹을 수 있는 제품을 속속 내놓고 있다. 지난해 10월 27일부터 한달간 오픈마켓 옥션이 조사한 간편가정식 판매량은 2013년 같은 기간에 비해 판매량이 35% 늘었다. 구매자의 40%는 20대와 30대였다. 즉석밥은 함께 먹을 반찬과 국이 필요하지만 컵밥은 제품 하나로 끼니를 해결할 수 있어 점차 판매량이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에서는 대기업들의 출시도 구매 증가에 한 몫을 차지한 것으로 평가한다. 청정원, CJ 등은 젊은층을 고려한 제품을 내놓았으며 천일식품과 비락 등 중견기업도 1000원대 컵밥을 선보였다. 하지만 출시 때부터 대기업이 노점상 고객까지 노린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하지만 이런 논란으로 컵밥의 제품이 널리 알려졌고 본고장인 노량진에서도 컵밥 매출이 증가하는 덕을 봤다.
외식업체들도 싱글족을 공략하기 위해 컵밥을 이용하고 있다. 테이크아웃 형태 또는 매장을 직접 방문해 먹는 싱글족의 경향을 파악, 이 부분을 만족시킬 수 있는 메뉴를 개발하고 있다. 지지고, 컵데이, 컵밥앤국, 야미고프 등 컵밥 전문점이 속속 등장했으며 가격 대비 뛰어난 맛과 품질, 양 등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컵밥은 해외진출도 시도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싱가포르의 상징으로 꼽히는 마리나베이샌즈호텔에서 열린 ‘한국 문화 알리기 행사’에서 하얀 쌀밥에 불고기와 채소를 덮은 컵밥이 선보였다. 하나에 7000~8000원 정도로 현지에서 한 끼 식사를 먹을 수 있는 가격이 책정됐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