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 병자호란, 청나라 용골대가 10만명의 철기군을 이끌고 조선 백성들을 유린하는 동안 사대부들은 편전에 앉아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를 고민하며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임진왜란 때처럼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에도 고통은 백성들의 몫이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인조와 서인들은 시류를 읽지 못했다. 시대를 역행한 친명배금 정책은 명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세우고 있던 청나라를 자극했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함경도, 평안도, 경기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수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속수무책이었던 조정은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지만 이미 김포 부근까지 들이닥친 적군에 막혀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47일 후 성내 식량이 거의 떨어졌다. 결국 인조는 서문을 통해 삼전도로 가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한 나라의 왕이 머리에 피가 날 때까지 절을 하며 항복을 구하는 비극적인 장면은 세계사에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해 6월 국내 11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남한산성(사적 제57호)은 한민족의 회한이 서려 있는 곳이다. 소설가 김훈의 베스트소설 ‘남한산성’으로도 대중에게 잘 알려졌다.
경기도에 따르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인 지난해 7~12월 남한산성 방문객은 140만9290명으로 하루 평균 1만1500여명이 찾은 것으로 조사됐다.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83만6000여명보다 69%가 증가한 수치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때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쪽의 방어기지다. 서쪽의 청량산, 북쪽의 연주봉, 동쪽의 망월봉과 벌봉을 연결해 쌓은 대규모의 석축산성이다.
성 안에는 45개의 연못과 80여개의 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쪽 엄미리 방향으로 침식협곡이 발달해 물자의 수송이 원활하고 천연요새로서 지리적인 조건을 갖췄다. 특히 팔당지역에서 한강하류에 이르는 넓은 수계가 시야에 들어와 내륙 수운을 장악할 수 있고, 한강 이북의 아차산·불암산·인왕산까지 조망이 가능해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남쪽에서 한양으로 가거나 북쪽으로부터 한강 이남지역으로 내려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남한산성은 672년(문무왕 12년) 신라가 당의 침공에 대비하여 쌓은 주장성을 기원으로 한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시에도 사용됐고,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이 성에 들어가 항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 잘 보존된 성곽, 옹성, 수어장대 등 수많은 문화재가 어우러져 병자호란 당시 치열했던 항전의 기록과 민초들의 삶을 보여준다. 1년 내내 마르지 않는 샘과 계곡을 품은 우거진 수목, 야생화군락, 희귀조류 등 천혜의 자연환경도 볼만하다.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 24㎞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 63%가 경기도 광주시, 24%는 하남시, 13%는 성남시에 속한다.
서울 송파구, 하남, 성남 등과 이웃해 접근하기 편하다. 남한산성 유원지 입구와 남문 및 동문 주변에 공영주차장이 마련돼 있다. 지하철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에서 남한산성까지 9, 9-1, 52번 버스가 다닌다. 지하철 5호선 마천역부터 등산로를 이용하면 산성 서문까지 1시간이면 올 수 있다.
남한산성에는 △제1코스 역사와 함께 소요하는 생명의 길 △제2코스 행궁과 함께하는 법도의 길 △제3코스 기억과 함께하는 반추의 길 △제4코스 성곽과 함께하는 의지의 길 △제5코스 산성을 따라가는 옹성 미학의 길 등 총 5개 코스가 있다.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은 산성로터리-남문-수어장대-서문-북문-산성로터리로 이어지는 1코스를 이용하는 게 좋다. 거리는 3.8㎞로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전체 성곽을 한 바퀴 도는 5코스는 7.7㎞로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당일 여행 코스로는 남한산성 행궁에서 출발해 숭렬전과 수어장대에 들렀다가 북문에서 서문으로 내려오는 일정이 적당하다.
남한산성 행궁(사적 제 480호)은 임금이 도성 밖으로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던 행궁 가운데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갖추고 있다. 행궁은 국가에 전란이 일어났을 때 임시수도의 역할을 담당했다. 정조가 화성(수원)에 행궁을 뒀고, 선조도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불타자 지금의 덕수궁(경운궁 또는 정릉동 행궁)을 행궁으로 썼다. 남항산성 행궁은 조선 인조 때 만들어진 이 곳은 일제강점기에 파괴됐다가 2012년 보수공사를 거쳐 재탄생했다. 행궁 안에는 ‘한강 남쪽 제일의 누각’이라는 의미의 한남루, 내행전, 외행전 등이 있다. 주말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책 만들기와 부채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5군영 중 하나인 수어청의 근거지였다. 1917년까지 290년 동안 광주부 관아가 있던 조선시대 최대의 산악 군사행정 구역이었다.
남한산성이라는 지명은 선조 대에 자주 등장한다. 조선 초기에는 일장산성이라고 불렸다가 한강과 한양의 북쪽에는 북한산과 북한산성이 있고 남쪽에는 남한산과 남한산성이 있다는 논리에 따라 남한산성으로 개명된 것으로 보인다.
대중에게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대군에 맞서 저항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제강점기 의병운동의 기점이 되기도 했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광주, 이천, 여주 지역 의병 1600명으로 이뤄진 연합의병부대가 주둔하면서 삼남지방 및 강원도 지역 의병 3000명과 합세해 서울로 진격하려 했던 을미의병의 시작점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항거한 을사의병,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 해산령에 반발한 정미의병도 이곳에서 일어났다. 결국 일제는 산성 안 행궁과 사찰을 불태우고 철저하게 파괴했으며 광주읍성도 성 아래로 옮겨버렸다.
이밖에 남한산성에는 무기제작소 사무를 관장하던 침괘정, 군사들의 훈련을 위해 건립한 연무관, 백제 온조왕의 사당인 숭렬전, 승군이 주둔했던 장경사 등 수많은 문화재가 보존돼 있다.
수어장대(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에서 서문을 거쳐 북문까지 가는 코스는 소나무숲이 울창하고 쉼터가 조성돼 있어 삼림욕을 즐기며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남한산성 장대 중 유일하게 남은 곳이다. 성안에 남아 있는 건축물 중 가장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서문 옆 병암에는 정조 때 서문 근처가 파괴된 것을 주민들이 자진해 보수한 것을 찬양하는 글이 새겨졌 있다.
빠르게 수어장대와 서문까지 오르려면 숭렬전, 국청사를 거치는 숲길 코스를 선택한다. 숭렬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호)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축성 책임자인 이서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이 단축 코스는 야간에 길을 잃을 우려가 있으므로 해가 진 뒤에는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좋다.
군사 훈련을 위해 건립된 연무관(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호)과 병자호란 때 항복을 끝까지 반대한 윤집·오달제·홍익한 등 3학사를 기리는 현절사(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호)가 오붓한 자태로 남아 있다. 인근에는 시인이면서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을 기린 만해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무기 제작을 관장하던 침괘정(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5호)은 산성내 마을 동쪽 언덕 위에 있는 정각으로, 이서가 축성에 착수했을 때 수풀 속에서 이 건물을 발견했다고 한다. 축조 시기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남한산성 서문 성곽 위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야경은 일품이다. 이 곳에서는 서울 송파구를 중심으로 강남 일대와 하남시가 아득하게 내려다보인다. 전망대는 서문 성곽 아래 쪽에 있지만 성곽 위쪽이 야경을 감상하기에 더 좋다. 서문 쪽은 큰 길이 닦여 가족이나 연인이 함께 산책하며 오붓하게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