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대 백중앙의료원은 산하 병원 중 부산백병원만 상급종합병원으로 남아 ‘80년 전통’이라는 명성에 타격을 받게 됐다.
순천향대 서울병원, 인제대 상계백병원, 가톨릭대 여의도성모병원 등 서울에 위치한 주요 대학병원들이 상급종합병원 간판을 내리게 됐다. 대신 경기서북부권에서 인천성모병원, 경남권에서 양산부산대병원과 울산대병원이 새로 상급종합병원으로 지정됐다.
이에 대해 지역우선 배분 방식에 따른 ‘역차별’이라는 불만이 나오고 있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의료환경에 대처하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한 결과’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23일 2015년부터 3년간 적용될 상급종합병원으로 43개 종합병원을 지정 발표했다. 올해 지정된 상급종합병원의 총 소요병상수(할당병상수)는 4만4637개로 2011년 대비 3.5% 증가했다.
순천향대 서울병원의 경우 현재 30여개 진료과에 700여병상을 운영하고 있고 서울 한남동이라는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갖췄기에 이번 결과가 의외라는 반응이다. 특히 지난 5월 이건희 삼성그룹이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졌을 때 신속한 대처로 박수를 받은터라 실망감이 크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지역우선 배분 방식으로 인해 다른 병원들보다 점수가 높은데도 상급종합병원에서 탈락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 때문에 순천향대 서울병원이 다른 병원보다 의료서비스의 질이나 장비 수준 등이 떨어진다고는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입지 조건이 오히려 독이 됐다는 시각도 있다. 지리적으로 서울대병원·서울아산병원·삼성서울병원·연세대 세브란스병원·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등 ‘빅5’는 물론 각종 종합·전문병원 사이에 둘러쌓여 있다보니 이 병원만의 뚜렷한 특색이나 주력 진료과목을 내세우기가 어렵다는 분석이다.
최근 발표된 적정성 평가 결과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지난 8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발표한 ‘2013년 요양급여 적정성 평가결과 종합보고서’에 따르면 급성심근경색, 관상동맥우회술, 제왕절개 분만, 외래처방 약품비 등 항목에서 3등급을 받아 서울내 다른 대학병원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다.
700여 병상을 운영하며 노원구·도봉구를 포함한 서울 북부지역 최대 병원으로 군림해 온 상계백병원도 탈락의 쓴잔을 마셨다. 인구수가 많고 65세 이상 노인 비율이 높은 지역 특성상 외래·응급실 이용하는 경증환자는 꾸준히 늘었지만 중증환자의 비율이 낮은 게 탈락 원인으로 추측된다. 병원 관계자는 “지역내에서 상급종합병원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데도 서울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보는 것은 역차별”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단순히 중증환자 비율로 상급종합병원을 결정하는 것은 지역적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주장도 있었다.
상계백병원의 탈락으로 인제대 백중앙의료원은 산하 병원 5곳 중 부산백병원 한곳만 상급종합병원으로 남아 ‘80년 전통’이라는 명성에 큰 타격을 받게 됐다. 박상근 백중앙의료원장이 대한병원협회장을 맡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같은 결과는 굴욕적이다. 2012년 이전까진 2010년 개원한 해운대백병원을 제외한 모든 병원이 상급종합병원으로 지정됐었다.
‘충분히 예상했던 결과’라는 반응도 많다. 실제로 인제대 산하 병원들은 몇 년전부터 수익성 하락 등으로 힘겨운 시기를 겪어왔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서울백병원의 경우 병상수가 300여병상에 불과하고 시설도 낙후된 편이라 인근 상급종합병원들과의 경쟁은 사실상 어려운 상태다. 게다가 최근 실시된 폐암 적정성평가에서 한전병원, 대전선병원, 서울의료원, 한양대 구리병원 등과 함께 5등급을 받는 불명예를 안았다.
서울시 확장에 따른 도심인구공동화 현상은 병원의 수익성 및 경쟁력 감소로 이어졌다. 현재 유동인구가 많은 명동 등에서 유입된 환자의 외래진료에만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다.
인제학원 설립자인 백낙환 인제대 명예총장도 2007년 출간한 자서전에서 “서울백병원은 생산성이 떨어지지만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유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서울백병원은 부지를 팔고 서울 금천구로 이전하는 방안이 모색됐지만 결국 백지화됐다.
일산백병원과 해운대백병원은 2012년에 이어 재차 상급종합병원에 도전했지만 중증환자 비율 등에서 다른 병원에 밀린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역동성이 떨어지는 조직문화가 원인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백낙환 명예총장을 중심으로 한 경영진의 보수적인 경영마인드가 산하 병원들의 경쟁력과 역동성을 떨어뜨리는 주원인”이라며 “경쟁병원들처럼 적극적으로 의료진을 영입하거나. 해외환자를 유치하거나, 연구역량을 강화하는 등의 노력을 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여의도성모병원의 탈락은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다. 2009년 조혈모이식센터(BMT, bone marrow transplantation)가 서울성모병원으로 이전한 뒤 병상수가 200병상 정도 줄고 중증·외래환자의 비율이 계속 감소했기 때문이다. 총진료비 청구액 등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경영 상황도 가톨릭대 산하 다른 병원들에 비해 좋지 않은 편이다. 최근 공개된 심평원의 ‘2013년 전국 상급종합병원 진료비 청구실적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이 병원의 진료비 청구액은 886억원으로 조상 대상이었던 당시 43개 상급종합병원 중 조선대병원(856억원)에 이어 가장 낮은 순위를 기록했다. 일부에서는 “실력있는 의사는 서울성모병원 등에서 모두 빼가니 병원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불만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상급종합병원은 3차 의료기관의 역할을 수행하는 종합병원으로 1차 의료기관과 달리 중증질환에 대한 난이도가 높은 의료행위를 전문적으로 수행한다. 상급종합병원으로 지정되면 일반 종합병원보다 5%p 많은 가산수가를 적용받고 신뢰도 높은 병원이라는 이미지를 줄 수 있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하다.
일반적으로 전문진료질병군 입원환자의 비율, 의사수, 진료과목, 전공의 수련병원 여부, 중환자실 설치 여부, 장비 등 항목을 평가한다. 특히 올해는 수도권으로의 환자쏠림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지역 우선배분 방식이 적용됐다. 전국 10개 권역의 병상 이용률을 토대로 ‘상급종합병원 소요 병상수’를 산출한 뒤 권역별 인구수에 따라 상급종합병원을 지정하고, 나머지 병원들을 전국 단위에서 상대평가하는 방식이다.
또하나 영향을 미친 요인은 중증도였다. 올해 평가에선 중증질환자 위주의 전문진료를 유도하기 위해 전문진료질병군 환자 비율을 12%에서 17% 이상으로, 단순진료질병군 환자 비율은 21%에서 16% 이하로 조정했다. 또 상급종합병원의 경증·만성질환 외래진료를 억제하기 위해 전체 외래환자 중 ‘의원중점 외래질환’ 환자 비율을 17% 이하로 하는 규정을 신설했다.
전문진료질병 환자 비율 등을 포함한 환자구성 상태 항목엔 60%의 가중치가 부여돼 평가 결과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번에 상급종합병원 지정에 탈락한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상급종합병원이 되면 일반 경증환자의 진입장벽이 높아질 수 있다”며 “경증 외래환자가 많은 특성을 살려 일반 환자들에게 친숙한 이미지의 병원으로 다가갈 것”이라고 위안을 삼았다. 의료수준은 상급종합병원에 못지 않되 치료비는 상대적으로 저렴하니 환자들이 이를 잘 활용하면 유리한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교수급 의료진이 상급종합병원이 아닌 종합병원 수준의 특진비를 받는 것을 비롯해 종별 가산료가 낮아지기 때문이다.
이번 평가에선 지역우선 배분방식이 역차별을 조장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이에 따라 복지부 등 정부당국은 다음 상급종합평가 지정 때까지 이 방법의 타당성을 재검토할 계획이다.
하지만 이번 결과를 무조건 지역에 따른 역차별로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적정성 평가나 진료비 수치 등을 분석해봤을 때 다소 저조한 성적을 낸 병원들이 탈락했기 때문이다. 빠르게 급변하는 의료환경에 대처하려면 대학병원이라는 현재 위치에 만족할 게 아니라 조직문화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연구·진료역량 강화 및 의료서비스의 질 향상에 힘쓸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