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통근시간 58분, OECD 평균(28분) 2배 … 집값 싸면 통근거리 멀어, 직장 멀수록 행복도↓
국내 직장인들의 평균 통근시간(편도)은 58분으로 OECD 평균보다 두배 이상 길다. 출·퇴근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면 행복감이 떨어지고 우울증이 올 수 있다.
직장인 황모 씨(31)는 결혼을 앞두고 신혼집을 구하려 서울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턱없이 비싼 집값 탓에 발길을 돌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교통이 편리한 도심뿐만 아니라 외곽지역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발품을 팔아 부천 중동 쪽에 신혼집을 마련했지만 너무 먼 통근거리가 문제였다. 회사가 서울 강남구에 있다보니 출·퇴근에만 편도로 1시간 15분 정도가 걸렸기 때문이다. 아침 저녁으로 사람에 치이다보니 피곤과 짜증만 늘었고 신혼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부부관계도 소원해졌다. 하지만 의정부에서 강남까지 출·퇴근한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그나마 다행’이라며 위안을 삼고 있다.
대도시 직장인에게 출근길은 전쟁터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인파에 치여 짜증지수가 오르고, 차를 가져가도 꽉 막힌 도로 위에서 당황할 때가 많다. 비나 눈이라도 오는 날엔 불쾌지수가 두 배는 높아진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출·퇴근 시간이 길어질수록, 통근거리가 멀어질수록 삶의 만족도와 행복감이 떨어지고 심한 경우 우울증 등이 올 수 있다.
통근거리는 보통 소득이나 집값 등 경제적 상황과 맞물린다. 2012년 발표된 한국교통연구원의 ‘광역급행철도와 통근 및 통행의 양극화 해소’ 연구결과에 따르면 살고 있는 집의 가격이나 전셋값이 높을수록 출·퇴근시간이 적게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매매가격이 1㎡당 800만원을 넘는 집에 사는 직장인은 통근시간(이하 편도)이 20~25분이었다. 반면 1㎡당 200만원 미만인 집에 거주하는 직장인은 출·퇴근에 140~160분 걸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극심한 경제불황 속에 가계 부채가 늘고 부동산가격이 끝없이 치솟으면서 서민들은 계속 서울 외곽이나 경기도로 밀려나고 있다. 부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한 예비 신혼부부들에게 ‘인(in) 서울’은 언감생심이다. 서울 밖이라고 해서 무조건 집값이 싼 것은 아니다. 고양시 일산이나 성남시 분당 등은 웬만한 서울 도심보다 부동산 가격이 비싸 이사는 엄두도 내기 어렵다.
즉 서민들의 경제적 조건에 부합하는 집들은 직장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국내 직장인들의 평균 통근시간은 58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인 28분보다 2배 이상 길다. 출근 소요시간이 가장 짧은 노르웨이(14분)와 4배 이상 차이난다. 미국은 평균 21분, 영국 22분, 호주 25분, 독일 27분, 이탈리아 34분, 일본 40분으로 모두 한국보다 통근시간이 짧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직장인들은 1주일에 5시간 가량을 의미없이 길 위에 버리고 있는 셈이다. 혹자는 대중교통 안에서 책이나 신문을 보길 권하지만 흔들리는 차량 안에서 인쇄물을 보면 눈이나 척추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등교나 출근에 1시간 이상 걸리는 장거리 통학·통근족 수는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2011년 통계청이 발표한 ‘2010 인구주택총조사 인구이동·통근·통학 표본집계 결과’에 따르면 통근·통학인구 2849만명 중 통근·통학 시간이 1시간 이상인 사람은 433만명(15.2%)에 달했다. 이는 5년전보다 105만명 증가한 숫자다. 이같은 통계는 직장은 계속 도심에 몰리는 반면 주거지는 서울 근교나 경기도로 옮겨가는 데 따른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집에서 직장이 멀고, 대중교통 환승을 많이 하면 삶에서 느끼는 행복감이 떨어지게 된다. 지난달 서울연구원이 대중교통으로 서울 도심에 있는 직장에 출·퇴근하는 직장인 1227명의 행복지수를 조사한 결과 출근거리가 짧고 환승 횟수가 적을수록 행복지수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출근 거리가 5㎞ 미만인 군의 행복지수는 73.9점, 5~25㎞는 71.6점, 25㎞ 이상은 70.1점이었다.
유은정 좋은클리닉 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은 “지하철이 ‘지옥철’로 불리듯이 대중교통에선 자기만의 공간이 확보되지 않고, 자가용을 이용해도 도로가 막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장거리통근이 피로감을 유발하는 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통근거리가 멀면 행복지수가 낮다는 연구결과는 정신의학적으로 장거리통근을 하는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연관될 수 있다”며 “도심에서 먼 외곽지역에 거주할 경우 경제적 문제로 인한 우울증 등 정신의학적 어려움을 겪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국내엔 장거리통근과 삶의 질 및 정신 건강의 연관성을 의학적으로 입증할 만한 연구결과가 아직 없다. 하지만 해외에서 실시된 각종 연구에 따르면 장거리통근은 정신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미국 여론조사기관인 갤럽이 통근시간과 행복지수의 상관관계를 조사한 결과 집에서 사무실까지 가는 데 오래 걸릴수록 행복도가 낮았다. 통근시간이 평균 90분 이상인 사람의 40%는 ‘불필요한 걱정’을 안고 사는 것으로 드러났다. 반대로 10분 이내인 사람은 28%만이 매일 불필요한 걱정을 한다고 답변했다. 게다가 긴 통근시간은 피로감을 높여 업무효율도 떨어뜨린다.
통근시간과 행복도의 연관성을 연구해 온 영국 카디프대연구소 교수의 다니엘 뉴먼 의학박사는 “여러 선행 연구결과를 종합해보면 장거리 통근은 신체적·정신적인 악영향을 미친다”며 “장거리 통근자들은 운동시간이 적고 집에서 만든 음식을 먹기 어려우며 불면증이나 관절통증에 시달릴 확률이 높다”고 설명했다. 이어 “통근시간이 길수록 자신의 직업이나 일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높아 우울증이나 무력감을 쉽게 느끼게 된다”고 강조했다.
긴 출·퇴근 시간은 개인 시간을 줄여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미국 브라운대 연구팀에 따르면 통근시간이 1분 길어지면 운동 시간은 0.0257분, 음식 준비 시간은 0.0387분, 수면 시간은 0.2205분 줄었다. 찰나의 시간이지만 출·퇴근으로 인해 개인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면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크리스틴 호에너 미국 워싱턴대 의대 교수는 2012년 ‘미국 예방의학저널(American Journal of Preventive Medicine)’을 통해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 사람은 운동 등 신체적 활동이나 친구와 교제할 수 있는 시간이 적으므로 우울증, 분노, 사회적 고립 등을 겪을 확률이 높다”고 밝혔다.
또다른 연구에 따르면 통근시간이 45분 이상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이혼율이 40%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홍윤철 서울대병원 예방의학과 교수는 “장거리 출·퇴근으로 체내 유해활성산소가 많아지면 산화스트레스에 의해 피로가 쌓이게 된다”며 “장거리 출·퇴근은 사회적 문제로 개인의 노력을 통해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생활습관 개선과 긍정적인 사고와 규칙적인 운동으로 건강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어 “주기적으로 휴식하고 비타민제를 복용하면 피로를 줄이는 데 도움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