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집에 생명이 있는가. 언뜻 보기에는 철근에 시멘트와 모래를 붓고 목재와 유리로 마감한 무생물적 덩어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전선과 전화선 수도관 가스관이 깔리고 이를 조절하는 스위치와 리모콘이 작동하면 유기체처럼 작용하게 된다. 인체에 있어 호르몬도 이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 기능이 복잡하지만 크게 성장과 발육, 생식과 미용, 환경에의 적응, 에너지 생산과 저장, 인간의 정동(情動)과 지성 등 5가지에 관여한다고 볼 수 있다.
호르몬은 생체기능을 조절하는 메신저
호르몬(hormone)은 ‘북돋우다’‘흥분시킨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동사에서 비롯됐다.호르몬은 한 조직으로부터 미량이 분비되고 혈액을 타고 흘러 다른 표적조직으로 운반돼 여러가지 생체유지에 필요한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생체기능에 관여한다.예컨대 세포와 조직의 성장,심장박동수와 혈압의 조절,신장기능,위장관운동,소화효소의 분비,모유의 분비는 모두 호르몬에 의해 콘트롤된다.
호르몬을 연구하는 의학의 한 분야를 내분비학(endocrinology)이라고 한다.특정 호르몬 분비의 과잉이나 부족으로 인해 생겨나는 질환의 원인과 치료법을 연구하고 호르몬의 새로운 기능을 발굴해내는 학문이다.내분비란 몸 안으로 분비한다는 말이다.안은 혈액을 의미한다.즉 타액이나 땀처럼 몸밖으로 분비되는 게 아니라 특정조직이나 선(腺)이 호르몬을 혈액 중에 흘려보내는 과정이다.호르몬은 표적조직에 도달해 고유의 시그널을 전달하고 이로 인해 관련 생체기능이 발현된다.
뇌가 호르몬 조절의 사령부
호르몬의 분비는 대체적으로 뇌(중추신경계)의 지배를 받는다.춥거나 더움,혈당의 상승과 하강,피곤함과 스트레스,성적 자극 등 외부환경으로부터 입수되는 감각이 뇌에 전달되면,뇌는 내분비시스템을 동원해 이에 적절히 대응케한다.
중추신경이 감지한 신경자극은 시상하부를 거쳐 뇌하수체로 전달된다.뇌하수체는 기억이나 판단과 같은 뇌의 일반적인 기능은 하지 않는다.뇌하수체는 달걀처럼 생긴 콩만한 크기의 뇌조직이다.뇌하수체는 전엽과 후엽으로 나뉜다.전엽은 우리가 알만한 웬만한 호르몬의 분비를 관장한다.반면 후엽은 옥시토신(oxytocin)과 바소프레신(vasopressin) 등 두가지 호르몬만 분비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시상하부에서 부신피질자극호르몬방출인자(CRH:corticotropin releasing hormone)가 분비돼 뇌하수체 전엽에 전달된다.이에 뇌하수체의 부신피질자극호르몬(ACTH:Adrenocorticotropic hormone)은 부신피질에 지령을 내려 부신피질호르몬이 분비되도록 유도한다.
부신피질호르몬은 크게 무기질코르티코이드와 당질코르티코이드로 나뉜다.무기질코르티코이드 중 대표적인 게 알도스테론(aldosterone)이다.알도스테론은 나트륨의 배출을 막고 칼륨과 마그네슘의 배출은 촉진시키는 항이뇨호르몬이다.알도스테론이 과잉 분비되면 소변은 적게 나오고 혈압은 올라가게 된다.활성형 안지오텐신(angiotensinⅡ)은 알도스테론에 지령을 내려 수분과 나트륨을 체내에 더 많이 보유하게 함으로써 혈압상승을 부추긴다.
당질코르티코이드에는 코르티솔(cortisol)·코르티손(cortisone)·코르티코스테론(corticosterone) 등이 있다.혈당을 높이고 염증과 알레르기를 억제하는 작용이 있다.스트레스를 받으면 분비량이 늘어나기 때문에 ‘스트레스호르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스트레스 자극이 가해지면 이에 대응하기 위한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해 혈당공급량이 늘어나야 하고,스스로 스트레스를 극복하기 위해 염증과 알레르기를 완화하려는 쪽으로 인체가 반응한다고 이해하면 쉽다.
부신의 껍질층이 피질이라면 내부는 수질이다.부신수질에서는 아드레날린이라는 호르몬이 나온다.싸움을 할 때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혈압을 올리며 위기시 무거운 물건도 솜털처럼 들어올릴 수 있는 힘을 주는 호르몬이다.
이밖에 뇌하수체 전엽에서는 갑상선자극호르몬(TSH:thyroid stimulating hormone),황체형성호르몬(LH:luteinizing hormone),난포자극호르몬(FSH:follicle stimulating hormone),프로락틴(prolactin 유즙분비호르몬 또는 황체자극호르몬),성장호르몬(GH:growth hormone 또는 somatotropin) 등이 분비된다.LH,FSH,프로락틴 등은 성선(고환과 난소)에 작용해 생식기능을 돕기 때문에 성선자극호르몬(Gn:gonadotropin)으로 부르기도 한다.
갑상선자극호르몬은 갑상선에 도달해 갑상선호르몬【테트라요도타이로닌(일명 티록신,약칭T4)과 트리요도타이로닌(약칭 T3)】이 분비되도록 명령한다.T3 및 T4는 체내말초조직의 산소소비,호흡,발열(체온상승),심장박출량 및 심장박동수 증가,혈액순환,단백질·지방·탄수화물 대사,효소체계 활성화,세포의 성장과 성숙,뇌발달을 촉진한다.T3는 T4에 비해 호르몬 활성이 3∼5배 높다.또 혈중 T3의 대부분(약80%)은 갑상선에서 분비된 T4가 생체 말초조직에서 변화돼 만들어진 것이다.혈중 칼슘농도를 낮추고 뼈속으로의 칼슘흡수를 돕는 칼시토닌도 갑상선호르몬의 하나다.
황체형성호르몬은 난자가 나온 뒤에 남은 여포를 황체로 발달시켜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 분비가 지속되도록 유도한다.남성에서도 고환의 정소에 있는 세포를 자극하여 테스토스테론 분비를 일으킨다.
난포자극호르몬은 난포의 성숙을 도와 궁극적으로 배란을 촉진한다.남성에서는 정세관(精細管)의 발육,조정세포(造精細胞)의 분열과 증식을 촉진해서 정자형성을 이끈다.
프로락틴은 유선의 발육,유즙분비,황체자극,전립선과 정낭의 발육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한다.임신한 여성은 임신하지 않은 여성의 10배에 달하는 프로락틴을 분비하다가 분만 후 수유할 때 급격히 감소한다.
뇌하수체 후엽의 옥시토신은 자궁수축호르몬이다.어원은 그리스어 ‘일찍 태어나다’에서 왔다.아기를 낳을 때 자궁근육을 수축시켜 진통을 유발하고 분만이 쉽게 이뤄지게 하며 젖 분비를 촉진해 수유를 준비하게 하는 호르몬이다.여성이 아기에 대한 친밀감,남성에 대한 모성애적인 사랑을 느낄때 왕성하게 분비돼 ‘사랑의 묘약’이라고도 불린다.
바소프레신은 신장에서 물을 재흡수하거나 혈관을 수축시키는 항이뇨호르몬(Anti Diuretic Hormone: ADH)이다.오줌색깔을 진하게 만들어 수분의 상실을 막는다.예컨대 탈수로 인해 혈장삼투압이 상승하면(혈액이 끈적해지면) 바소프레신은 신장에 작용해 집합세뇨관이 체내 수분을 오줌으로 내보내지 않고 혈액으로 되돌리게 함으로써 혈장삼투압이 더 올라가지 않게 한다.
호르몬의 과잉이나 부족은 질병으로 이어져
갑상선은 목 앞부분에 위치한 나비모양 기관이다.갑상선호르몬이 지나치게 많이 분비되면 갑상선기능항진증,반대로 부족하게 분비되면 갑상선기능저하증이 생긴다.
갑상선항진증(그레이브스병 또는 바세도우병)은 땀이 많이 나고,가슴이 뛰며,숨이 차고,식욕은 늘지만 체중은 줄고,목과 눈이 나오는 특징적인 증상을 보인다.체내 과다한 갑상선호르몬은 뼈속 칼슘을 녹여 소변으로 빠져나가게 하고,위장관에서 칼슘의 흡수를 저하시키고 뼈를 약하게 만들어 골다공증을 야기할 수 있다.갑상선항진증에 걸린 갱년기여성은 골다공증 예방 차원에서 여성호르몬을 같이 투여하기도 하는데 여성호르몬제가 간에 부담을 줄 수 있다.이 때 갑상선치료제의 용량을 줄이고 여성호르몬을 신중히 투여하는 한편 비스포스포네이트제제 계열의 골다공증약을 병용 투여하는 게 바람직하다.
갑상선기능저하증 중 여성이나 노인에서 만성갑상선염을 일명 ‘하시모토씨병’이라고 한다.갑상선호르몬 분비가 저하되거나,갑상선항체가 비정상적으로 자기 신체의 일부인 갑상선을 공격·파괴하거나,갑상선 제거 수술을 받은 환자에서 주로 발병한다.증상으로는 손발이 차고,다리와 얼굴이 붓게 되며,만성피로와 기억력 감퇴가 초래된다.심해지면 기운이 없어지다가 점액수종성 혼수상태에 이르게 된다.
갑상선호르몬이 부족하면 갑상선은 요오드를 포집하기 위해 애쓰게 되고 그 결과 조직이 비대해진다.예컨대 미국 및 중국의 내륙산간처럼 토양에 요오드가 부족해 먹을거리에 요오드가 충분히 들어있지 않은 경우엔 갑상선호르몬 섭취 부족이 단순성 갑상선종양을 일으킨다.하시모토씨병은 갑상선수치가 정상일 경우 치료를 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갑상선종양은 양성(良性)일 경우 매일 갑상선호르몬제를 복용함으로써 종양의 크기를 줄일 수 있다.
부갑상선호르몬은 혈중 칼슘 농도를 높이는 작용을 하는데 이 호르몬이 과잉 분비되는 부갑상선기능항진증은 장기내 칼슘 침착에 의한 결석,뼈의 칼슘상실에 따른 골절,근력감퇴,식욕부진,구토 등을 보인다. 반대로 이 호르몬이 부족한 부갑상선기능저하증은 혈중 칼슘농도 저하로 인해 신경근육의 흥분성이 증가하는 테타니(tetany) 증세를 보인다. 그 여파로 우울증·불안감이 자주 나타나고 젊은층의 경우는 지능저하가 초래될 수도 있다.
뇌하수체 기능에 이상이 생기면 이에 지에를 받는 호르몬의 분비나 역할에 이상이 생겨 각종 질병이 나타난다.말단비대증은 뇌하수체종양 등 뇌하수체 기능 이상으로 성장호르몬이 과잉 분비돼 신체 말단의 뼈와 조직이 과도하게 증식함으로써 손,발,코,턱,입술 등이 커지는 질환이다.턱이 길다든지 입술이 유난히 두툼하다든지 하는 특이한 얼굴 생김새가 나타나고 기타 여러 합병증이 발생한다.
요붕증(尿崩症)은 뇌하수체 후엽의 고장으로 바소프레신이 적게 분비되거나 기능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을 경우 나타난다.신장이 수분을 재흡수하는 양이 적어짐으로써 비정상적으로 많은 소변을 보게 되고 갈증을 느끼게 된다.
성선자극호르몬방출호르몬(GnRH)이 뇌하수체 기능이상,특정 약물 복용,과다한 운동과 체중감량,스트레스,비만 등에 의해 일정한 리듬을 타지 못할 경우 월경의 주기가 길어지거나 무월경이 오게 된다.
부신피질의 고장으로도 많은 호르몬 대사이상질환이 나타난다.부신이 결핵·매독 등에 감염되거나,종양 전이나 자가면역질환으로 파괴되거나,선천성 또는 수술로 무력화된 경우에는 강력한 소염·진통·면역억제기능이 있는 당질코르티코이드가 부족해지게 된다.이로 인한 질병이 애디슨병(Addison’s disease)으로 만성피로증후군과 무기력 증상이 나타나고 식욕이 떨어지며 속이 메스꺼울 수 있다.체중감소 저혈압 저혈당 근육약화 빈혈 등이 동반되기도 한다.
쿠싱증후군(Cushing’s syndrome)은 부신피질자극호르몬(ACTH)이 과도하게 분비되거나,이와 상관없이 부신에서 당질코르티코이드가 과량 생성되면 얼굴이 달덩이처럼 둥글게 되고 비정상적으로 목 뒤에 지방이 축적되며(물소 혹),배에 지방이 축적되어 뚱뚱해지는 반면 팔다리는 오히려 가늘어지는 중심성 비만을 보이는 질환이다.얼굴은 붉어지고 피부는 얇아지며 혈압 혈당이 상승하고 골다공증 위험이 높아진다.근력저하,성욕감퇴,우울증 등을 보인다.스테로이드 제제를 오남용할 때에도 이와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
부신성기증후군은 부신피질에서 남성호르몬이 과잉 분비돼 여성은 성기와 2차성징의 남성화,남자는 성조숙증이 나타나는 질환이다.
대표적인 성인병인 당뇨병도 췌장에서 분비되는 인슐린이 선천적 또는 후천적으로 부족하거나 인슐린이 제기능을 못해 생기는 대사성질환이다.혈당을 제대로 연소·처리하지 못하므로 망막·신장·신경 등의 미세혈관과 심장관상동맥·말초동맥·뇌혈관이 약해지거나 막혀 혈류가 정체되고 관련 세포나 조직이 괴사하는 다양한 합병증이 나타나게 된다.
인체는 호르몬 하기에 달려 있다
육체는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거나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말은 결코 허무한 동양의 유심론적 사고가 아니다.그 예로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콘트롤하느냐에 따라 호르몬의 분비양상이 달라지고 성격과 건강상태,걸리기 쉬운 병이 정해질 수 있다.
예컨대 ‘조정의 호르몬’으로 알려진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쉽게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세로토닌은 기분이 지나치게 들뜨거나 가라앉는 것을 조절해 평상심을 유지케하고 충동을 제어한다.따라서 세로토닌 분비량이 모자라거나,세로토닌이 관련 수용체에서 빨리 소실되거나,기능을 제대로 못하면 우울증,불안,스트레스성 폭식,충동장애,강박증,알코올·도박·게임중독,공황장애,생리전증후군 등에 걸리기 쉬운 체질이 된다.
부신수질에서 생성돼 교감신경에 작용하는 아드레날린은 외부의 스트레스나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혈관수축,혈압상승 등의 흥분을 일으키는 호르몬이다.중뇌 흑질 선조체에서 만들어지는 도파민은 보행 등 운동조절,감정과 동기 부여,욕망과 쾌락,인식과 학습 등에 영향을 미친다.도파민의 분비가 과다하거나 활발하면 조울증이나 정신분열증을 일으키며,반대로 줄어들면 우울증이 유발된다.도파민을 생성하는 신경세포가 손상돼 일어나는 운동장애가 파킨슨병이다.
세로토닌에 의해 지배되는 체질이면 차분하고 균형잡힌 삶을,아드레날린 체질은 강한 외향성과 순발력을 강점으로 삼는 삶을 보내게 된다.‘사랑과 창조’의 도파민은 행복한 삶과 예술가적 창조정신을 고양시켜준다.
선천성 또는 후천성 중증질환에 의해 호르몬의 균형이 깨진 것은 돌이킬 수 없다해도 나머지 호르몬 대사이상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개선될 수 있다.평상심과 긍정적인 마인드를 잃지 않는 삶이 무엇보다 중요하다.지나친 스트레스를 피하고 균형잡힌 식사를 하며 충분한 휴식과 운동,여행이나 명상 등 자기에게 알맞은 취미생활을 영위해나간다면 호르몬은 호호호(好好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