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월성 교육과 인문교양 갖춘 창조적 직장인 양성 병행해야
일각에서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에 대해 ‘안철수의 새정치’, ‘김정은의 생각’처럼 알 수 없는 것이라 꼬집고 있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창의적 아이디어, 상상력과 과학기술, 정보통신기술이 결합된 창의적 자산이 활발하게 창업 또는 기존 산업과 융합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시장과 산업을 생겨나게 함으로써 양질의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새로운 성장전략’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창조경제에 맞춰 문·사·철이 조화된 인문적 교양과 통섭적 지식을 갖춘 사람이 대기업이나 공기업이 뽑는 인재상으로 부각되고 있다. 예컨대 인문학을 전공한 컴퓨터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가 엄청난 ‘일’을 낼 것이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라도 문·이과 통섭교육을 받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단지 문학, 사학, 철학인 줄 알았더니 사전에는 ‘인간의 사상 및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영역’으로 문·사·철 외에도 언어(language)·언어학(linguistics)·법률·고고학·예술·예술사·예술비평 등을 망라한 것이라 돼 있다.
하지만 김상근 연세대 신학대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전쟁과 약육강식, 질투와 시기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이 생존을 위해 골몰했다가 남긴 ‘처세학적 종합교양’이 인문학(휴마니타스, humanitas)의 씨앗이었다고 한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이런 인문학의 정신을 담은 대표적인 저작이란 설명이다.
창조경제는 요컨대 이것저것 ‘짬뽕(hybrid)’해 새로운 부가가치와 업태를 창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려면 각 분야 기초학문 및 응용과학에서 첨단을 달리는 사람과 여기에 인문학적 숨결을 불어넣어 새로운 모양으로 아우르고 창조해낼 인재가 동시에 배출돼야 한다. 첨단은 아닐지라도 세상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근사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내놓으려면 난잡한 공상보다는 인문학적 직관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아무래도 창조경제는 교육에서 시작돼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박근혜 정부도 문·이과 통합 고교 교육과정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문·이과 통합 수능시험은 당초 예상한 2017년보다 4년이나 미뤄진 2021년으로 연기될 전망이다.
창조경제에 강조되는 인재는 결국 두루 알고, 이를 응용할 능력이 있으며, 자신은 물론 세상(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유능한 사람이다. 어차피 학문발전이나 첨단기술연구에 한국을 리드할 사람은 극소수이고 정해져 있으며 타고난다. 이는 극소수의 엘리트교육으로 커버해야 한다.
그런데 실상은 어떤가하면 대학을 나왔다는 상당수 사람들이 원자기호 C가 탄소인지, OH(수산화기)가 어떤 물성을 내는지, 에탄올(술)을 마시면 취하지만 메탄올을 마시면 눈이 먼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낫놓고 기역자 모르는 것과 똑같다.
따라서 지금의 수능 위주 편식 학습은 시정돼야 할 필요가 있다. 문과생은 이과적 지식을 갖춰야 하고, 이과생도 문과적 소양을 겸비해야 한다. 아울러 음악 미술 체육 등에 관한 교육, 영어 아닌 제2외국어 교육, 세계사 및 국사 교육 등이 강화돼야 한다. 이런 걸 등한시하니 감성이 메마르고 세계관이 좁다.
하지만 문·이과 통합교육에 앞서 서울대 이공계 신입생의 5분의 1가량이 수학을 못해 교과과정을 원활하게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은 웬말인가. 5년전 서울의 한 고교에 취재차 갔더니 과학교과서가 너무 얇고 그림책처럼 사진 등으로 알록달록했다. 그래서 느꼈다. 아무리 암기위주 학습의 폐악이 지적된다하지만 외울 게 없으니 자연히 지식의 양이 모자라고, 머리에 든 게 없으니 응용할 팩터가 부족한 것이다.
이런 우려를 필자가 만나는 요즘 젊은층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인터넷에서 뭘 잘 찾아내는데 총체적인 지식의 양이 모자라 종합적 사고가 떨어지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답답해서 나무라면 ‘네이버에 있는데 그걸 다 알 필요가 있나요’ 하는 식으로 냉소적인 답변이 돌아온다.
또 학창시절 과제물도 노트 대신 컴퓨터 파일로 제출해서 그런지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도 엉망인 것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기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극히 사적인 해결대안은 모든 교과서를 단일 국정으로 만들되 매우 두껍게 만들어서 학습량을 늘리고 가난한 집 아이가 고가의 참고서를 살 필요가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 범위 안에서만 지식을 습득토록 하고, 시험도 그 범위 안에서 조금만 응용해서 내면 어떨까 한다. 나머지 지적 호기심은 스스로의 노력과 교사의 가이드를 통해 얼마든지 채울 수 있다.
그리고 지금보다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더 많이 뛸 수 있게 해야 한다. 수행평가나 자원봉사활동처럼 학생과 학부모를 괴롭히고, 객관적이거나 자연스럽지도 않으며, 교사도 괴롭히는 한국여건에 맞지 않는 평가제도는 폐지되거나 수정돼야 한다.
학습의 뿌리인 언어(국어)교육은 말하고 읽고 쓰는 교육으로 재편돼야 한다. 논문시험은 종합적인 지식의 양과 판단력, 개성, 창조성, 문법 숙지능력을 가장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기에 강화돼야 한다. 솔직히 그동안 논문시험은 당락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고 수능점수나 내신평가의 곁다리로 활용한 측면이 많지 않았나. 결국 유명 논술고사 강사라는 사람들만 돈을 챙겼다.
창조도 결국 모방에서 나온다. 모방이란 결국 인류가 일궈놓은 체계적 지식을 습득하는 게 아닐까. 이런 기본이 없으니깐 ‘얼치기’ 달인만 많고 ‘진정한’ 달인은 없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나라 사람 중에 어떤 학문의 스테디셀러 개론교과서쯤 되는, 약 2000페이지가 넘는 책의 저작자가 나올 것인가. 이런 교과서의 한두 챕터를 맡는 게 아니라 전체를 통괄할 줄 아는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전인적 지식인말이다. 이런 진정한 지식인이 양산되는 게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 배출보다 더 의미있는 일 아닐까.
문·이과 통합교육을 하고, 특목고를 최소화하되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업수준에 따라 계층별 수업을 적절히 용인해서 수월성(秀越性)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하위권을 맴도는 학생이라도 1~2학년 때에는 정말로 공부 잘하는 아이와 친구로 지낼 수 있다면 우리사회의 양극화는 의식적, 경제적으로 완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로는 교육효율이 크게 떨어진다 비판하기 어려울 것 같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한 때 장쩌민, 후진타오, 원자바오 등 이공계 출신이 장악했다. 그러다보니 관리자가 아닌 밑바닥에서 민중을 알고 올라갔고, 세상을 폭넓게 봤으며, 과학기술 중심의 사회발전을 리드할 수 있었다. 정치도 공학처럼 하다보니 아직까지 중국 공산당의 1당독재는 효율이 높고, 부작용을 통제할 수 있는 범위에서 작동된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합리적인 사회발전을 원한다면 향후 펼쳐질 문·이과 통합교육에선 이과 비중을 다소 높게 가져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