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격진료 허용을 둘러싸고 정부와 의사단체간 충돌이 극에 달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 등 의사단체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보건복지부는 29일 의사·환자간 원격진료를 허용하는 의료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복지부는 지난 11일 개정안을 입법예고할 계획이었지만 의사단체의 반대에 부딪혀 잠정 연기한 바 있다. 개정안은 한 달 뒤인 내달 29일 국회에 제출돼 논의 과정을 거친 후 2015년부터 본격 시행된다.
개정안에 따르면 원격진료 대상은 위험성이 낮은 재진 환자 중 상시적 질병관리가 필요한 경우로 제한된다. 혈압·혈당 수치가 안정적인 고혈압·당뇨 등 만성질환자, 장기간 진료받는 정신질환자, 퇴원 후 추적 관찰이 필요한 환자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거동이 어려운 노인·장애인, 도서·벽지 주민,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 군·교도소 종사자 등은 초진도 원격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원격진료 가능 의료기관은 동네의원으로 한정된다. 원격진료가 대형병원으로의 환자 쏠림현상을 가속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수술 퇴원 후 관리가 필요한 재택 환자, 군·교도소 종사자,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는 병원급 의료기관에서도 원격진료를 받을 수 있다.
복지부 관계자는 “그동안 실시된 정부·민간 합동 시범사업으로 원격진료가 만성질환 관리 및 의료접근성 강화 등에 효과적이라는 게 입증됐다”며 “미국·일본 등 의료선진국도 의사·환자간 원격진료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의료계는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를 포함한 38개 의사단체는 29일 성명서를 통해 “원격진료 허용은 1차의료기관은 물론 의료시스템 전체의 붕괴를 가져온다”며 “정부가 개정안 통과를 밀어붙인다면 의사들은 올바른 의료제도를 지키기 위해 정부와의 일전(一戰)을 불사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협 등 의사단체는 “현재 전국에 산재한 1차의료기관들은 지리적 접근성에 기반해 생존을 유지하고 있다”며 “지리적 접근성을 무시하는 원격진료가 허용되면 1차의료기관간, 의료기관 종별간 무차별 경쟁이 발생하게 되며, 결국 동네의원과 동네약국은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노환규 대한의사협회장은 “의협의 반대에도 입법예고를 했다는 사실은 원격진료가 환자를 위한 정책이 아닌 정치적 목적으로 도입됐음을 시사한다”며 “캐나다나 뉴질랜드 등은 의사 수가 우리나라의 10분의 1 수준이기 때문에 원격진료가 가능한 것일 뿐 우리나라에서는 역기능이 훨씬 많다”고 주장했다.
정치권도 이번 개정안 입법예고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김미희 통합진보당 의원은 “온라인상에서 환자의 질병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며 “정확한 진단이 없으면 제대로 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원격진료 시범사업인 ‘글로벌헬스케어 시범사업’을 통해서도 안정성·효율성 등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다”며 “시범사업 결과를 발표하기로 한지 3달이 지났는데 결과보고서는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원격진료는 병·의원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더욱 부추기게 된다”며 “이같은 문제에도 복지부가 입법예고를 한 행위는 전형적 불통행정의 예”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