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쇼윈도 등 결혼생활 유지노력 비난할 수 없어 … 상대방 탓하며 회피말고 어려움 함께 헤쳐가야
유은정 좋은클리닉 원장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 까지’ 사랑할 것을 약속하며 신랑·신부의 행복한 미소로 결혼식은 마무리된다. 서로만을 바라볼 것을 맹세하며 행복한 부부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사는데에는 많은 충돌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를 극복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더 나아가 너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행복하게 살겠노라 다짐한 터라 서로 마음이 떴는데도 쉽사리 갈라서지 못하는 커플도 있다. 이 때문에 지금 이대로 현상유지하며 살아가는 게 낫겠다는 합의 하에 최근 자신들을 멋지게 포장하는 ‘쇼윈도 부부’가 적잖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할까?’ 혹은 ‘차라리 갈라서라’며 쇼윈도 부부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낸다. 쇼윈도 부부로 살고 싶은 사람은 누구도 없을 거라고 단정하면서…. 하지만 정말 쇼윈도 부부로 살고 싶은 사람이 없을까? 아니다. 분명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결혼 후에도 배우자·부모로서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한 경우에 흔하다. 특히 ‘피터팬 증후군’이 있는 남성은 자기 역할과 책임을 회피하면서 주위의 성화에 못이겨 ‘결혼하긴 해야 하니까…’라는 생각으로 혼인관계를 맺고서는 막상 새로운 관계에 피곤해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섹스리스 커플’도 사실상 쇼윈도 부부라고 볼 수 있다. 섹스리스는 1년을 기준으로 평균 한 달에 1회 미만의 성생활을 하는 부부다. 물론 대부분의 부부는 출산이나 육아과정을 겪으면서 섹스 횟수가 줄어들긴 하지만 감정적인 상처가 남게 되면 서로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경우에 섹스리스가 되기 쉽다.
부부는 사실 사랑의 감정뿐만 아니라, 연민의 감정, ‘저 사람도 불쌍한 사람이니 내가 도와야지 누가 돕겠냐’라는 동질의식이 있어야 한다. 다른 어떤 관계와도 차별화되는 것이 부부간 성생활인데 이를 소홀히 한다면 쇼윈도 부부가 되기 쉽다.
그렇다고 각방 쓰는 부부가 모두 쇼윈도 부부는 아니다. 건강상의 이유, 불면증이나 각종 질환, 갱년기, 자녀 학업 등으로 어쩔 수 없이 각방을 쓰거나 부부생활을 잠시 뒤로 미루는 부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정해진 기간에 서로 합의해 외도를 통해 성욕을 해결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있으면 쇼윈도 부부라 하긴 어렵다.
사실 ‘쇼윈도 부부’, ‘섹스리스 커플’, ‘외도’ 등의 단어는 기원전부터 있었을 법한 개념이다. 성경에서 다윗왕도 밧세바를 탐하면서 외도를 했고, 우리나라에서도 불과 100년 전만 거슬러 올라가도 첩이 존재했으며, 중국이나 중동지역은 지금도 일부일처제가 아닌 일부다처제를 버젓이 유지하고 있다. 사실 ‘가족’이라는 개념은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많이 다르다. 따라서 왜곡된 가족관계도 항상 동일한 형태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쇼윈도 부부의 거짓된 부부행세가 오히려 아이들에게 왜곡된 가족관계에 대해 가르쳐 대물림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혼을 미루고 부부의 모양을 갖추는 게 자녀들에게 더 안 좋다고만 볼 수는 없다. 이혼 후 자녀들의 버림받은 상처는 제대로 설명되고 납득되지 않을 경우 사별과 같은 효과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수치감 문화’가 팽배하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을 했으면 꼭 행복해 보여야만 한다’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굳이 애정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이면서까지 행복해보이는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하나의 이유다. 누가 부부 사이가 나쁜 것을 알면 굉장히 수치감을 느낀다.
결혼생활은 행복해야만 한다는 전제 아래에서는 부부가 서로 행복하지 못하고 겉돌고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특히 자기 성취감이 높고 경제적 자립, 직업적 성공을 경험한 경우 자기 개인일, 가정사가 평탄치 못한 것을 큰 수치로 여긴다.
단순히 수치감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이혼한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단지 내 배우자와 자녀와의 관계가 단절돼서가 아니다. 결국 내 가족을 아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서먹해지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는 사회적 위축이 오고, 이혼을 했다는 자책감과 ‘누가 알면 뭐라고 할까’라는 수치감 등으로 스스로를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에 가장 작은 단위가 부부이다보니 이혼은 대인관계나 사회생활에 상상치도 못할 악영향을 준다. 이는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쉽사리 이혼하지 못하고 부부의 모습을 가져갈 수밖에 없다.
물론 쇼윈도 부부 같은 관계가 오래 지속될수록 ‘이대로도 상관없다’는 자기기만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가식적인 관계란 어디까지를 말하는 걸까. 인간관계는 어느 정도 가식적인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나의 진실을 상대에게 다 알릴수도 없고 상대의 진실을 내가 다 알 수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쇼윈도 부부라는 용어 자체가 이혼의 빌미를 줄 수 있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서로 소통이 없으니 쇼윈도 부부이구나’라고 절망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부부만의 문제는 원래 주변사람들이 모르기 쉽고 모를 수밖에 없다.
만약 이런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이혼의 사유가 내 정서적인 결핍에 있는 것은 아닌지, 서로 소원했던 것을 해결하려는데 상대방의 동참의사나 해결의사가 전혀 없는 것인지, 관계를 청산해도 배우자를 아이들의 부모로서 원만한 관계로 만나기 위해 지금 내가 노력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배우자 외에 다른 이성과의 관계 때문에 서둘러 관계를 청산하려는 것은 아닌지,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후회는 없을 것인지 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쇼윈도 부부에 전적으로 반대하지만은 않는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러하듯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부부관계를 몇십년 동안 꾸준히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나뿐만 아니라 상대배우자 때문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쇼윈도 부부의 생활이 지속되면 해결되지 못하는 애정욕구가 결국 배우자에 대한 원망이나 결혼생활에 대한 불만족, 더 나아가 개인 정서의 피폐함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서로 대화 없이 한 배우자가 일방적으로 인내하면서 지속되는 관계라면 절대 건강하다 말할 수 없으므로 해결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쇼윈도 부부로 지내더라도 이를 유지하려는 의지를 비난할 수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인간관계의 흐름은 수십년에 걸쳐 너무나 많은 변화가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 배우자가 아플 수도 있고, 경제적 파탄을 겪는 등 다양한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 가족관계는 이런 어려움을 함께 헤쳐가면서 굳건해진다. ‘우리는 쇼윈도 부부니까 의미가 없어, 빨리 갈라 서’라는 태도로는 성숙한 인간관계에 이를 수 없다.
이혼의 사유로 정서적인 공감대 결여, 성격 차이, 부부갈등을 빌미로 삼는 경우가 흔하다. 자신의 정서적인 어려움을 상대 배우자와 결혼생활에 투사하면서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다.
정신과상담에서는 먼저 자신의 정서 상태를 돌아보기를 권한다. 성인으로서 제2의 사춘기(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는지, 직장이나 대인관계로 인해 스트레스·우울감이 극심해 행복감이 결여된 탓을 결혼생활이나 배우자로 돌리는 지 자문해보라고 말한다. 이처럼 자신의 감정 상태를 살펴본 다음에는 배우자에 대한 이성으로서 매력을 잃지 않도록 자기생활을 점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