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 톱 배우 마이클 더글라스가 지난 2일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구강암에 걸린 것은 아내와의 오럴섹스(구강성교) 때문”이라고 발언해 최근 남성의 HPV(인유두종바이러스, Human Papillomavirus) 감염질환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그는 2010년 구강암 진단을 받고 지난해 방사선과 화학요법으로 설근(혀뿌리) 종양을 제거해 완치에 성공했다.
HPV 인지도 높지만 ‘여성에게만 치명적’이라고 아는 사람 대부분
HPV는 여성의 자궁경부암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로 정상적인 성생활을 유지하는 거의 모든 성인은 일생 중 한번이라도 감염될 수 있다. 보통 성 접촉을 통해 전염되고 성관계 파트너의 수가 많을수록 HPV 감염률이 유의하게 높아진다.
HPV에 감염돼도 대부분은 증상이나 큰 건강문제를 유발하지 않는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여성에게 자궁경부암, 생식기 사마귀인 곤지름(콘딜로마), 질암, 외음부암, 항문암을 초래할 수 있다. 남성에게는 곤지름, 음경암 등을 유발한다. HPV는 100여종이 있는데 이 중 14가지 남짓이 종양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고위험형이다. 나머지는 생식기 사마귀 등의 다소 가벼운 질환을 일으키는 저위험형(13종)이거나 미분류군, 고위험추정군 등이다.
지난해 10월 차영주 중앙대 진단검사의학과 교수팀이 2006~2011년에 HPV 세포검사를 받은 18~79세 여성 6만775명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HPV 감염률이 34.2%(2만787명)에 달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국내 여성 3명중 1명이 HPV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이 중 성생활이 상대적으로 활발한 젊은층인 18~29세에서 49.9%를 기록했다.
HPV가 여성암 사망원인 2위를 차지하는 자궁경부암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HPV 예방백신을 맞는 여성도 점차 늘고 있다. 여러 대학에서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HPV 예방백신을 저렴하게 접종하는 행사를 마련하기도 했다.
HPV 예방백신은 두 가지 종류가 있고, 자궁경부암 원인의 80%를 차지하는 HPV 16, 18번과 생식기사마귀 원인 바이러스 6, 11번 감염을 예방하는 한국MSD의 ‘가다실(Gardasil)’과 자궁경부암의 큰 원인이 되는 16번과 18번만을 타깃으로 한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의 ‘서바릭스(Cervarix)’가 있다.
HPV, 남성에게도 ‘두경부암’ 유발한다는 연구결과 존재
보통 성 접촉으로 전염되는 HPV바이러스는 이를 보유한 남녀 간에 상호 감염을 일으킬 수 있다. 남녀 성생활 인구 5명 중 1명은 50세 이전에 한번 이상 감염되기도 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 바이러스는 보통 ‘여성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인식돼 있다.
하지만 이번 마이클 더글라스의 발언으로 HPV가 남성에게도 심각한 암을 유발시킬 수도 있다는 의문과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 2011년 이와 관련된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안나 귈리아노 미국 모픽트 암센터 암·전염병과 교수는 “남자가 HPV에 감염되면 머리와 목에 생기는 두경부암(구강·설·비강·인두·후두암)이 생길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혀와 편도선에 생기는 암의 65% 이상은 HPV 때문이며 이 중 80%는 남자에게서 발생한다는 내용이다.
연구진은 18~70세의 건강한 남자 115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0%가 생식기에서 HPV가 나왔으며 이 중 6%가 HPV로 인한 두경부암의 증상인 피로를 느꼈다고 밝혔다. 귈리아노 박사는 “물론 구강성교가 유일한 바이러스 감염원인은 아니다”며 “바이러스가 입으로 들어갈 가능성은 다양하며 키스, 구강성교 등 성적 행위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구강암은 대부분 흡연과 음주가 주요 원인으로 지목돼왔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최근 20년간 구강·인두암 환자가 급격히 늘어난 원인으로 HPV 감염을 꼽고 있다. 전체 구강·인두암 중 HPV 양성 비율이 1984~1989년에 16%에서 2000~2004년 72%로 급증한 게 하나의 증거가 되고 있다. 반면 HPV에 감염되지 않는 사람의 두경부암은 발생률이 감소했는데, 이는 흡연율 감소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또 올해 미국의사협회 저널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오럴섹스를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HPV에 2배 많이 감염돼 있었다. 하지만 어떤 종류든 섹스를 하는 사람은 하지 않는 사람보다 구강이 HPV에 8배 많이 감염돼 있었다.
호주, 정부 차원서 남성 대상 ‘HPV 예방백신’ 접종 계획 밝혀
이런 연구결과가 나오자 최근 호주 정부는 12∼13세 남학생들에게 향후 4년간 2110만 달러를 투입해 HPV 예방백신을 무료로 접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호주는 2012년 7월에도 세계 최초로 남학생도 HPV 국가 백신접종 프로그램에 포함시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호주에서는 HPV 학교 백신접종 프로그램 실천을 위해 모든 주가 협력하고 있으며 올해 28만명의 호주 남학생들이 백신을 접종받게 될 예정이다.
타냐 플리버섹(Tanya Plibersek) 호주 보건 장관은 “백신접종을 통해 여성들의 자궁경부암 발생률을 낮추고, 남학생들을 곤지름 등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며 “정부가 함께 노력한 덕분에 호주의 HPV 백신접종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으며, 2007년 백신접종 캠페인 이후 HPV 관련 감염이 크게 줄어들었다”고 설명했다. 플리버섹 장관은 “남성을 대상으로 한 백신접종 프로그램 확대가 향후 HPV 관련 질환을 감소시킬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오럴섹스, 정말 남성에게 치명적인 암 유발할까?
일각에서는 오럴섹스가 구강암 등을 유발한다는 연구결과가 과장됐다고 반박하고 있다. HPV 양성 구강·인두암의 경우 16번 HPV가 주요 원인으로 생각되는데, 16번 HPV는 여성 자궁경부암의 주요 원인 바이러스이기도 하다.
하지만 구강성교로 암에 걸렸다는 더글러스의 말에 대해 미국내 전문가들은 ‘터무니 없다’는 말로 일축했다. 마이클 브래디 성 건강 전문의는 “구강성교가 더글러스의 암 발병에 일조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를 단 하나의 원인으로 꼬집기에는 문제가 있다”며 “HPV에는 수백 가지 종류가 있고 이들 대부분은 인체에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심리학자이자 성치료사인 새러 로젠퀴스트 박사는 “오럴섹스는 일부 두경부암의 위험요인일 수는 있지만 현시점에서 그같은 연관성은 추측에 불과하다”며 “암의 발병에는 개인의 면역력을 비롯한 여러 요인들이 작용한다”고 말했다.
모라 길리슨 오하이오주립대 암연구 부서장은 “오럴섹스의 증가가 HPV 관련 두경부암을 늘린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 HPV감염에 의한 암 증가는 오럴섹스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성교에도 두루 해당한다”고 말했다.
이소희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내과 교수는 “질병예방통제센터(CDC) 등 미국내 자료는 두경부암의 발병률이 급증하는 추세를말해준다”며 “HPV에 감염됐다고 모두 암이 생기는 것은 아니며 인체 면역시스템에 의해 HPV가 다시 소멸되면 암의 위험이 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