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태·응급피임약에 대한 무조건적 부정적 시선이 ‘여성의 삶’ 옥죈다
유은정 좋은클리닉 원장
“선생님, 낙태수술할 수 있는 곳 좀 소개해주세요” 젊은 여성 환자들과 친해지면 자신의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오고 갈 수밖에 없는 게 정신과 진료실이다. 최근에도 20대 초반의 여성이 술 마시다가 취해서 첫 관계를 원치 않게 가진 것도 억울한데 생리가 두달째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 남자는 물론 연락조차 없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하거나, 현재 태아에 영향을 줄 약물을 복용하고 있다면 주치의로서 환자분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유리한 결론을 내리는 수밖에 없다.
낙태 수술의 찬반론은 이미 그 역사가 길다. 내가 미국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에도 낙태의 찬반 토론은 어느 수업에서나 있었다. 미국도 보수적 성향의 대통령이 집권하던 과거에는(집권당에 상관없이) 낙태를 금지했지만 현 버락 오바마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실상 낙태 금지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국내서는 생명윤리, 정치적인 고려, 일부 산부인과의 의학적 소신에 의해 현재까지는 낙태수술이 불법으로 간주되고 있다.
유전적 질환이나 전염병, 근친상간, 강간 등에 의한 임신이거나 임신이 산모의 건강을 해칠 경우에 한해 임신중절 수술(낙태)가 허용되고 있다. 하지만 진료현장에서 가장 흔하게 낙태가 이뤄지는 이유인 미혼 임신, 기혼자의 터울 조절 등에 대해서는 낙태수술시 2년이하의 징역이 내려지는 게 우리의 법률적 정의다.
수년 전부터 일부 산부인과 의사들은 낙태 반대를 결의하고 동료 의사를 고발까지 하는 운동을 전개해왔다. 생명존중과 도덕적 이유를 내걸고 말이다. 하지만 무조건 낙태를 불법화하는 것은 도저히 임신을 유지할 수 없고, 아이를 양육할 수 없는 힘없는 여성들을 ‘피해자’로 만들 위험도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기형아를 낳은 경험이 있고, 미혼에 덜컥 임신하고, 결혼할 사람이 아기를 책임지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하룻밤 만난 사람과 느닷없이 임신이 되었다면 그 여자는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혼자서 생명을 지켜나갈 것인가.
물론 가장 좋은 낙태는 ‘피임’이다. 철저하게 자신의 몸을 지켜서 피임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하더라도 원하지 않은 임신을 피임하지 못한 한 여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무조건적인 낙태 반대는 곤란하다. 출산과 양육에 대해서 사회적 지원 없이, 우리 사회가 성적 순결을 중요시하는 윤리가 과거와 같지 않은 상황에서 불의의 임신을 한 여성에게만 그 책임을 돌리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래서 여성계의 반발이 마음에 와닿는다. 요컨대 “사회가 길러주지도 않으면서 왜 낳으라고 강요하나”. 원치 않는 임신을 한 경우 낙태가 불법화되다 보니 산부인과에서는 낙태수술을 꺼려하고 있다. 낙태를 하기 위해서 중국까지 가서 불법 시술을 받는다고 한다. 국내서는 산부인과에서 부르는 게 값이고, 브로커까지 끼어들어 몇몇 유명한 낙태수술 병원을 임신한 여성에게 알선하고 고액의 수수료를 챙기면서 그 비용이 과거 수십만원에서 최근엔 100만원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음성적이고 은밀하게 이뤄지는 수술은 합병증 등의 위험이 높고 여성이 그 비밀을 끝까지 안고 가야 한다는 점에서 정신적인 부담이 막대하다.
뜻하지 않는 임신을 피하기 위해 등장한 게 사후피임약(응급피임약)이다. 사후피임약 ‘노레보’는 프랑스 HRA파르마가 1999년에 개발해 2002년부터 현대약품이 국내에 시판 중이다. 2001년 8월부터 프랑스, 미국, 영국 등 판매돼왔고 국내서는 종교단체와 교육계의 반대로 판매가 미뤄지다가 우여곡절 끝에 약국에 나왔다. 전문의약품으로 보험이 적용되지 않고 의사의 처방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 알에 14000원 정도이니 원치 않는 임신과 낙태 수술의 위험부담을 해결할 가장 유력한 방안이다.
이 약은 고용량의 프로게스테론을 함유하고 있어 복용하면 배란을 방해하고, 수정을 막으며, 자궁내벽을 변화시켜 착상을 저지함으로써 피임을 유도한다. 성관계를 가진 후 72시간 이내, 가급적이면 12시간 이내에 복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서구에에는 ‘모닝 필’(morning pill)로 불리며 성관계 후 아침에 사먹는 약으로 알려져 있다. 응급피임약은 자궁출혈, 두통, 구역, 현기증, 복통 등의 부작용을 보이긴 하지만 임신중절 수술은 물론 일상적인 사전피임약(일반 피임약)의 장기복용보다 부작용이 적다. 효과는 100% 신뢰할 수는 없다. 대한산부인과학회에 따르면 사후피임약의 피임실패율은 15%, 최대 42%에 달한다. 효과만 믿고 이 약을 오남용하면 피임실패율이 높아 불법 낙태가 늘어나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종교계와 일부 윤리학자는 응급피임약을 반(反)생명적 낙태약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그래도 여성의 주체적 삶을 위해 이 약의 활용은 불가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