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협-건보공단 2013년도 수가협상서 연명치료 확산 국민운동 시도하다 좌초된 배경과 향후 입법 전망
1997년 보라매병원에서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의사가 살인죄로 기소됐고, 2009년에는 연세대 의대 세브란스병원에서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떼게 해 달라는 가족들의 요구를 대법원이 처음으로 받아들여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김할머니 사건)을 인정했다. 대한병원협회와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최근 2013년도 수가협상을 타결하면서 부속합의사항으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합의했다가 종교계와 학계 등의 반발 여론이 거세지자 관련 문구를 삭제했다.
당시 합의 내용은 ‘협회는 만성질환 예방 및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등 국민운동을 전개한다. 목표지표를 설정하고 그 성과에 대한 별도의 인센티브를 고려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국민의 생명을 경제적 관점에서 접근한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는 지적과 함께 환자의 생명을 지켜야 하는 국가가 헌법에 보장된 국가의 생명보험 의무를 저버리고 있다는 비난을 몰고 왔다. 이에 따라 병원협회와 건보공단은 지난 10월 31일 ‘인명경시’ 논란이 됐던 이 같은 내용의 부속합의사항을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대국민운동’에서 ‘건강한 노후를 위한 대국민운동’으로 수정했다.
이같은 공단과 병협의 논의가 나온 배경에는 연명치료로 인한 의료비지출을 줄이고, 많은 인력과 시간에 투입되는데 비해 상대적으로 부가가치가 낮은 연명치료 환자 관리(중환자실 운영)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이 상통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연명치료 중단을 유도해 병상 활용도를 높이고, 더 많은 장기이식용 장기를 구득할 수 있는 것도 의료계가 희망하는 속내 중 하나로 비친다.
지난달 2일에는 대통령 직속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로 했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시행해야 하는 것인지, 한다면 어떤 조건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일정한 기준을 제시하고 의료현장의 현실과 국민인식조사를 통해 추진을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김할머니 사건 당시 대법원은 연명치료 중단에 필요한 기준으로 △환자가 회복 불가능한 사망단계에 진입했는가 △환자의 사전 의사표시 △사전의사 표시가 없을 경우 평소 가치관 등으로 추정 △사망단계 여부는 전문의로 구성된 위원회가 판단할 것 등을 제시했다.
정부가 연명치료 중단 대상 및 방식을 법제화한다는 방안에 따라 의료계·시민단체·환자단체·법학자 등 7~10명이 참가하는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산하 특별전문위원회가 구성되고 있다. 이 위원회는 연말부터 본격 활동에 돌입할 예정이다. 위원회가 논의 결과를 토대로 법제화 여부를 정부에 제시하고, 정부는 이르면 내년 하반기부터 입법절차를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김 할머니 사건 이후 연명치료 중단을 선택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환자가 무의미한 생명연장치료를 원하지 않을 경우 작성해 병원에 내는 ‘사전의료의향서’(Advanced Directives)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을 때 심폐소생술·인공호흡기·수혈 등의 사용여부를 미리 정해두는 제도로, 건강할 때 결정하거나 임종이 가까워지면 환자나 가족이 정한다.
2010년 12월부터 지금까지 사전의료의향서에 6500명이 서명할 정도로 김 할머니 사건 이후 의료현장에서도 이 제도를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 이전에는 세브란스병원 등 1~2곳만 사전의향서를 사용했지만 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서울아산병원,삼성서울병원, 강북삼성병원, 이대목동병원, 중앙대병원 등 17곳이 활용하고 있다. 이밖에 한양대병원, 전남대병원, 순천향대병원 등 대다수 병원들도 심폐소생술만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활용하고 있다.
이같은 추세지만 연명치료 중단 법제화가 되기까지 논란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복지부가 지난해 5~6월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해 조사한 결과 72.3%가 찬성했다. 이유로는 가족들의 고통, 고통만 주는 치료, 경제적인 부담, 환자의 요구 등을 들었다. 반대한 27.7%는 생명 존엄성 훼손, 신의 영역, 남용 위험, 생명경시 풍조 만연 등을 이유로 반대했다.
손명세 연세대 보건대학원장은 “종교계 등이 연명치료 중단을 반대하기 때문에 우선 사전의료의향서만이라도 법에 담아야 한다”고 말했다. 윤영호 서울대 의대 암연구소 교수는 “사전의료의향서에 서명하면 완화의료(호스피스) 비용을 면제하는 등 인센티브를 주는 것도 고려해볼만 하다”고 제안했다. 허대석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교수는 “연명치료 중단을 조속히 법제화하고 사전의료의향서를 표준화해야 현장의 혼란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종교계는 의료비 부담이 과도한 현실에서 이를 허용할 경우 경제적 이유로 존엄사가 남용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고, 학계는 자살방조나 살인공모 등 범법행위를 야기할 수 있다며 반대하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