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시행된 일괄 약가인하로 건강보험 등재 의약품 가격이 평균 14% 낮아지고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의약품 재분류, 리베이트 단속 등과 맞물려 대부분의 국내 제약업계는 큰 손실을 입고 벼랑 끝에 서있다.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 제약업계는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 전문화, 신약개발, 사업다각화 등으로 매출의 상승을 꾀하고 있다.
이 중 녹십자는 니치버스터 전략, 효율적인 R&D투자, 사업다각화 등으로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는 평가다. 실제로 의약품 일괄 약가인하 조치가 시행된 최악의 상황에서 상위 8대 제약사 중 유일하게 2분기 두 자리수 영업이익 증가율과 가장 높은 매출 신장률을 기록했다. 다른 상위 제약사들의 2분기 영업이익이 작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 47~96% 격감한 반면 녹십자는 홀로 15.2%나 증가했다.
넘버원보다는 ‘온리 원’ … 니치버스터 전략의 대표 성공작 ‘헌터라제’ 연간 4000억원 매출 기대
녹십자는 제약업계에서 ‘넘버 원’은 아니지만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온리 원(Only One)’을 지향해 업계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니치버스터는 제약업계의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고 있다. 커다란 틈새시장을 뜻하는 니치버스터(Niche Buster)는 블록버스터(Blockbuster)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통상적인 블록버스터 의약품은 매출 10억달러 이상, 복용 환자 수 1000만~1억명을 말한다. 반면 니치버스터는 1억~5억달러의 매출과 복용환자 수가 1만~100만명인 약으로 인종별·질환별로 특화된 치료제를 뜻한다. 녹십자는 지난해 총매출액 7700억원 중 대부분의 매출을 다른 제약사들이 집중하지 않는 백신이나 희귀병치료제 등으로 일궜다.
헌터증후군(Hunter syndrome)은 저능·저발육을 유발하는 희귀·유전질환으로 녹십자가 전 세계 두 번째로 치료제 개발을 완료했다. 올해 초 식약청으로부터 허가를 받은 ‘헌터라제’(성분 이두설파제-베타, idursulfase-β)는 국내외에서 연간 4000억원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헌터라제는 임상시험 결과 약효가 기존치료제보다 우수하고 최근 보험급여 목록에 등재돼 높은 치료비 등 경제적 부담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녹십자는 혈우병, 파브리병 등 희귀난치병의 치료제도 개발 중이다. 혈우병A 치료제 ‘그린진F’(성분 베록토코그알파, beroctocog-α)와 다발성경화증에 효과가 있는 ‘면역글로불린’(immunoglobulin)제제의 임상 3상이 현재 미국에서 진행 중이다. 오는 2014년부터 제품화가 예상되는 이들 치료제는 이미 미국 ASD헬스케어와 3년간 5400억원 규모로 공급계약이 체결됐다. 그린진F는 미국에 시판되면 연간 약 1400억원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국내 제약업계 사상 최대 규모의 완제의약품 수출 계약이다.
녹십자 관계자는 “신약으로 승부하는 게 좋지만 국내 제약사 특성상 투자여력이 부족한 만큼 신약 임상시험을 공동 진행하면 파트너사에 주도권을 내줄 수밖에 없다”며 “충분한 임상 데이터를 갖추고 이미 검증된 완제품을 내세워 프로모션 능력이 있는 파트너사와 제휴함으로써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앞서 녹십자는 2009년 신종플루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할 당시 예방백신을 개발해 다국적 제약사가 제시한 가격의 절반 수준으로 백신을 공급했다. 이후 세계에서 12번째로 독감백신의 자급자족기반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수 년 동안 남들이 걷지 않은 길을 걸어온 녹십자의 노력이 시간이 흐를수록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올해 890억원 R&D 투자 … 2020년 국내외 매출 4조원,순익 400억원 목표
녹십자는 올해 초 지난해보다 무려 40% 늘어난 890억원을 연구개발(R&D)에 쏟아 붓는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2020년에 국내 매출 2조원, 해외 매출2조원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허은철 녹십자 최고기술경영자는 “글로벌 리딩 기업이 되기 위한 성장동력은 R&D에 있다”며 “지속적인 품질 개선과 글로벌 임상시험을 통해 세계시장에 진출,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할 제품으로 키울 계획”이라고 밝혔다.
녹십자는 혁신적인 신약 및 바이오의약품의 연구·개발·생산·마케팅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게 강점이다. 이를 통해 독감백신, 수두백신, 면역글로불린, 혈우병치료제, 헌터증후군치료제처럼 개발이 힘들고, 경쟁 제약사들의 진입장벽이 높아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제품으로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녹십자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혈액제제 생산능력을 갖췄다. 지난해에는 태국 적십자와 플랜트 수출 양해각서를 체결할 정도로 관련 분야의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 독감백신의 품질은 거대 글로벌 제약사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세계 네 번째로 산하기관에 의약품을 공급할 수 있는 국제입찰 참가 자격인 사전품질인증 (Pre Qualification, PQ)을 획득하기도 했다. 아울러 합성신약·바이오베터·세포치료제·유전자치료제·항암항체·천연물신약 등 20여종의 신약 파이프라인과 8건의 글로벌 R&D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프리미엄 맞춤형 분유 ‘노발락’ 국내 독점공급 … 기능성 화장품도 도입 계획
녹십자는 지난 3월 프랑스 유나이티드 파마슈티컬(United Pharmaceuticals, UP)의 프리미엄 맞춤형 분유 ‘노발락’의 국내 독점공급을 시작했다. 노발락은 영아의 연령별 영양 요구량에 맞도록 세밀하게 제조됐고, 특히 소아과 전문의의 연구로 수유 시 나타나는 배앓이·설사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특수 설계됐다.
노발락은 세계적으로 수많은 임상시험을 통해 효과와 만족도를 입증, 전세계 50개국에서 판매되고 있다. UP사가 직접 운영하는 목장에서 원유를 집유해 유럽 식품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HACCP)과 ISO 9001 인증을 받은 시설에서 제조되고 500가지 이상의 품질검사를 거친 후 제품이 출하된다.
녹십자 관계자는 “현재 온라인과 병원, 약국 등에서만 판매되는 노발락의 판매처를 대형할인마트 등으로 확대해 소비자들과의 접점을 넓힐 것”이라고 밝혔다. 녹십자는 UP와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기능성 화장품에 대한 공급도 추진할 계획이다.
녹십자는 주력제품군인 혈액제제와 백신의 해외수출과 희귀의약품 시장 등 니치버스터마켓 진출을 위해 매출액 대비 7%대의 연구개발비를 올해부터 10% 이상으로 확대했다. 그동안 녹십자가 개발한 백신·신약 중 일부는 품질문제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고, 신규 공장을 짓기 위한 투자로 경영상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2020년까지 국내외 매출 4조원을 달성하겠다는 중장기 목표는 불확실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신약개발 투자가 매출과 영업이익 증대로 이어지고 다시 R&D에 투자되는 선순환으로 이어진다는 가능성을 갖고 R&D투자를 통해 강력한 회사로 도약하겠다는 전략이다.
조순태 녹십자 사장은 “녹십자가 주목하는 분야는 다른 제약사들이 주목하지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의약품”이라며 “누구나 할 수 있는 분야는 아니기 때문에 제약사들에게도 경쟁력과 경제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꾸준한 개발과 노력으로 2020년 매출 4조원을 달성해 최소 4000억원 이상의 순익을 낼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