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일어설 때 머리가 핑 하고 도는 느낌이 자주 들고 현기증이 났던 주부 박 모 씨(46)는 지속적으로 철분제를 복용하다 낫지 않아 병원을 찾았다. 박 씨에게 내려진 진단은 빈혈이 아닌 ‘기립성 저혈압’. 앉았다 일어나거나, 누웠다 일어날 때 어지러워 멈칫했다거나, 속이 메스껍다고 느꼈다면 기립성 저혈압을 의심해봐야 한다.
기립성 저혈압은 심혈관계 질환, 빈혈은 혈액계 질환
저혈압은 막연히 혈압이 낮은 상태를 일컫는 말로 명확한 기준이 없지만 일반적으로 혈압이 수축기 혈압이 90㎜Hg 이하, 이완기 혈압이 60㎜Hg 이하인 경우를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혈압보다 더 무서운 게 저혈압’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고혈압에 비해 저혈압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저혈압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피가 모자라서 생기는 병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어지럼증 때문에 저혈압과 빈혈을 혼동하기도 하는데, 이 둘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최유정 을지대병원 심장내과 교수는 “저혈압은 심장 기능의 이상 등으로 혈관 내 압력이 낮아져 발생하는 것으로 심혈관계와 관계가 있는 반면 빈혈은 혈액 속의 산소를 운반해 주는 헤모글로빈이 부족해서 생기는 혈액계 질환이므로 차이가 명확하다”고 말했다.
저혈압의 세 가지 분류와 기립성 저혈압의 진단
저혈압은 원인에 따라 본태성 저혈압, 2차적 저혈압, 기립성 저혈압 등 세 가지로 나뉜다. 본태성 저혈압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저혈압으로 수축기 혈압이 100㎜Hg이하인 상태를 기준으로 한다. 명확한 원인이 없고 증상이 미미하다.
2차적 저혈압은 여러 심장질환이나 내분비질환이 원인이 된다. 질환과 관련해 저혈압을 포함한 다양한 증상이 나타난다.
기립성 저혈압은 평소 눕거나 앉은 상태에서는 다리에서 심장까지 혈액이 도달하는 과정에서 중력의 영향을 덜 받지만, 누워있거나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일어날 때 심장으로 들어가는 혈류량이 일시적으로 줄고 뇌로 가는 혈류량도 함께 줄어들면서 발생하게 된다.
기립성 저혈압은 진단을 위한 측정 방법이 정해져 있는데 누운 자세에서 혈압을 측정한 다음 일어나서 적어도 3분 내에 혈압을 잰다. 이 때 지속적으로 수축기 혈압이 20㎜Hg, 이완기 혈압이 10㎜Hg 이상 떨어지면서 분당 맥박수가 20회 이상 적절히 늘지 않으면 기립성 저혈압으로 진단한다.
혈류량 감소, 노인성 질환이 기립성 저혈압을 불러와
나이 먹을수록 심혈관계의 상태를 빠르게 변화시키고 자율신경계의 반사작용을 조절하는 기능이 저하돼 기립성 저혈압이 노인들에게서 흔하게 나타난다. 고령에서 흔히 동반되는 뇌경색 등으로 인한 뇌손상, 파킨슨병, 당뇨병, 말초신경병증이 혈압을 조절하는 신경에 이상을 가져와 기립성 저혈압을 유발할 수도 있다. 특히 평소 이뇨제·혈관확장제·안정제 등을 장기 복용하거나, 당뇨병·알코올중독 등으로 인한 말초신경병증이 있거나, 기립성 저혈압 가족력이 있는 경우 더 쉽게 발생할 수 있다.
증상 심할 경우 낙상으로 이어져 골절 입기도
보통 저혈압은 심장질환, 신경계질환, 약물, 체액감소, 출혈 등에 의해 발생하기도 하고, 특별한 원인 없이 혈압만 낮게 측정되는 경우도 있다. 보통 저혈압은 증상이 잘 나타나지 않지만, 기립성 저혈압은 증상이 비교적 명확하다.
최유정 교수는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갑자기 심한 어지러움을 느끼는 것부터 현기증, 무기력, 전신 쇠약감, 구역질 등의 증상을 동반한다”며 “증상이 심한 환자나 고령 환자의 경우에는 눈앞이 하얘지면서 몸의 중심을 잡기가 힘들고, 결국 낙상으로 이어져 골절을 입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지난 3월 발표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의대 크리스틴 존스 박사팀의 연구에 따르면 기립성 저혈압을 보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심부전 발병 위험이 평균 54% 높은 것으로 나타나 주의가 요구된다.
그러나 단순히 어지럼증 하나만으로 기립성 저혈압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어지럼증을 일으키는 질환은 기립성 저혈압 외에도 다양하기 때문에 정확한 진단이 선행되야 한다. 특히 중추신경계질환으로 인한 어지럼증은 뇌에 치명적인 후유증을 남길 수 있으므로 증상이 나타나면 빠른 시일 내에 전문의를 찾아 진단을 받도록 한다.
일상생활 속 작은 노력들로 개선 가능
기립성 저혈압으로 의심되는 증상들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는 경우라면 작은 노력들로 개선할 수 있다. 먼저 앉았다 일어나기, 누웠다 일어나기 등 체위를 바꿀 때에는 급격하게 바꾸기 보다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주는 것이 좋다. 일어난 후 잠시 그대로 서 있으면 반사작용으로 뇌혈류량이 회복된다. 이른 아침에 증상이 심하게 나타나는 경우에는 베개를 조절해 머리를 15~20도 이상 높게 하고 자는 것이 좋다. 장시간 서 있을 경우 수시로 스트레칭을 해주거나 다리 정맥혈의 정체를 막기 위해 탄성 양말(스타킹)을 신으면 도움이 된다. 또 심한 온도 차이가 나는 곳의 노출을 피하며,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규칙적인 운동을 한다. 과격한 운동은 오히려 해를 주므로 주의한다.
규칙적인 식사를 통해 미네랄과 비타민 등의 영양분을 충분히 섭취하고 음주는 혈관을 확장시킬 수 있으므로 삼간다. 하루 2~2.5ℓ의 물을 충분히 마시고 적당량의 염분을 섭취하는 것도 기립성 저혈압 치료를 위한 좋은 방법이다. 심한 환자의 경우 혈압을 올리는 약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누워있을 때는 오히려 고혈압이 되고 평생 복용해야 하므로 실제로 잘 사용되지 않는다.
도움말=을지대학병원 심장내과 최유정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