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당뇨병은 운동과 식사조절로 혈당을 낮추고 효과가 없으면 먹는 약,인슐린을 순차적으로 투여하는 게 치료의 정석으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당뇨병은 인슐린 결핍에 따른 것이므로 당뇨병 초기 단계부터 정상적인 생리적 인슐린 분비양상에 맞게 인슐린을 투여하면 당뇨병을 보다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국내서는 최수봉 건국대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당뇨병센터 소장)가 대표적인 인슐린펌프 강력 옹호론자다.
인슐린펌프요법은 지속경피주입법(continuous subcutaneous insulin injection :CSII)과 같은 의미다. 인슐린펌프는 인공췌장이라 불리면서 1983년 획기적인 인슐린 치료방법으로 처음 소개됐다.1993년 미국 DCCT(Diabetes Control and Complication Trials)가 연구 발표한 보고서로 인해 인슐린펌프의 유용성이 부각되면서 사용빈도가 늘어나고 다양한 제품이 상용화됐다.
인슐린펌프는 당뇨병 환자에게 정상인의 췌장과 같은 패턴으로 인슐린을 공급해주는 장치.소모지 현상(somogyi phenomenon 밤에는 저혈당이다가 아침에는 고혈당)과 여명현상(dawn phenomenon 밤에는 정상혈당이다가 아침에는 고혈당)을 걱정할 필요 없이 24시간 동안 혈당조절이 거의 정상으로 유지된다.평상시에는 미소한 양의 기초인슐린(속효성 인슐린)을 지속적으로 주입하고 식사시에는 보다 많은 양을 투입한다. 대체로 기저인슐린과 식사 관련 인슐린의 양이 거의 같으므로 속효성 인슐린의 절반은 상시적으로 점적(조금씩 미세하게 물방울 떨어뜨리듯) 주입하고 나머지 절반은 아침 식전: 점심 식전: 저녁 식전으로 나눠 3차례에 걸쳐 4:3:3의 비율로 주사되도록 한다.무엇보다도 일상생활에 큰 변화가 생겨도 일반인처럼 생활할 수 있다. 과식은 안 되지만 보통사람처럼 충분히 식사해도 어느 정도 괜찮다. 인슐린펌프는 미세한 주사침을 복부 피하지방에 꽂고 보턴 또는 리모콘을 이용해 저장고에서 적정량의 단효형 인슐린(인체 내에서 만들어지는 인슐린과 같은 효능의 인슐린, 속효성 인슐린)이 체내로 공급되도록 조정한다.속효성인슐린을 한달에 2∼3병(200~300단위) 쓰기 때문에 약값이 월 2만6000~3만9000원으로 환자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는다.
단점은 늘 허리에 차고 다녀야 한다. 무게는 60g으로 가볍지만 착용감이 불편함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다. 또 사전에 철저한 인슐린펌프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적절한 인슐린 투여량(기초인슐린 주입량과 별도 주입량) 산출, 인슐린펌프 작동 프로그램 작성, 부주의시(관 막힘, 관 연결 끊김, 인슐린 고갈 등)의 조치 등 익혀야 할 게 많다. 펌프 부착 위치를 낮과 밤에 따라 하루 한두번 수시로 바꿔야 한다. 건전지 수명이 8주 정도이므로 잊지 말고 주기적으로 갈아야 한다.
펌프 자체의 가격이 고가(50만원선)이라서 경제적 부담이 큰 편이다. 기구를 청결하게 다루지 않으면 피부가 오염돼 염증이 생기거나 짓무르게 된다.혈당이 100㎎/㎗ 이하로 잘 유지되고 있는 환자에게는 갑작스런 저혈당쇼크 위험이 올 수 있다. 펌프의 작동 불량, 건전지 소모, 인슐린 소모, 주사바늘 이상 등의 문제가 생겨 인슐린 투입이 중단된 경우에는 수 시간 내에 고혈당과 당뇨병성케톤산혈증(DKA)이 나타날 수 있다. 인슐린이 항시 공급되는 상태가 되므로 안심하고 음식물을 과다 섭취하게 되고 인슐린의 지방합성 촉진 작용에 따라 체중증가 및 비만이 유발될 수 있다. 특히 비만한 인슐린 비의존형 당뇨병 환자에서는 더 문제다.따라서 인슐린 주사요법은 필요하되 인슐린펌프요법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필수나 최선이 아닐 수 있다.
최 교수의 견해는 인슐린펌프를 이용해 발병 초기부터 인슐린을 투여하면 췌장의 인슐린 분비기능이 차츰 회복돼 궁극적으로는 어떤 약물의 도움도 받지 않고 당뇨병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그는 2010년 10월 ‘제36차 대한당뇨병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인슐린 펌프를 이용해 장기간 당뇨병을 치료하면 제2형(성인형) 당뇨병 환자의 혈장내 C-펩타이드 농도가 상승하고 당화혈색소(HbA1c)도 정상화된다”는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이는 2005년 9월부터 2010년 9월까지 5년 동안 인슐린펌프 치료를 받은 217명의 당뇨병 환자를 추적조사한 연구결과다.이에 따르면 인슐린을 분비하는 췌장 베타세포의 기능을 가늠할 수 있는 식후 C-펩타이드 농도가 치료 전 평균 4.50ng/㎖에서 5년 치료 후 7.09ng/㎖로 증가한 것으로 확인됐다.당뇨병 유병기간이 짧을수록,혈당을 정상에 가깝게 조절할수록 췌장의 C-펩타이드 분비 능력이 더욱 잘 회복됐다.또 장기간의 혈당변화 추이를 반영하는 당화혈색소(전체 헤모글로빈 중 혈당과 결합한 것의 비율)는 치료 전 평균 8.43%에서 치료 후 6.87%로 정상치(6.5%미만)에 가깝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슐린 치료의 기존 인식은 인슐린을 투여하면 췌장에서 인슐린 분비가 지속적으로 감소돼 종국엔 고혈당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최 교수는 처음부터 당뇨병을 인슐린펌프로 치료하면 베타세포의 기능이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당뇨병은 궁극적으로 식사량에 맞는 인슐린 분비량이 부족한 것이므로 인슐린을 적정하게 투여하면 정상 범위를 초과하는 혈당으로 인해 베타세포를 포함한 모든 세포들이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을 면할 수 있다는 게 최 교수의 독특한 주장이다.
비만과 인슐린저항성이 당뇨병의 원인이라는 주류 학계의 이론에 대해서도 최 교수는 반박하고 있다.우선 서구에 비해 한국인은 마른 당뇨병 환자가 많고 뚱뚱한 사람들이 모두 당뇨병에 걸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비만은 당뇨병의 결과일 수 있으나 원인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아직도 연구될 게 많다고 최 교수는 주장했다.그는 “비만하다는 것은 체내 동화작용이 왕성하고 췌장기능과 치료반응도 좋다는 단서가 될 수 있다”며 “실제 인슐린펌프로 당뇨병 환자를 치료해보면 체중이 증가하는데 이 중 근육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불어난 근육이 혈당을 낮추는데 도움을 준다”고 설명했다.
인슐린저항성은 인슐린 양이 정상치보다 다소 부족할 뿐인데 인슐린의 효율성과 수용체의 기능이 떨어져 세포 단위에서 혈당을 연소시키는 능력이 저하된다는 이론.최 교수는 “당뇨병 발생 원인은 어느 누구도 확실하게 밝혀내지 못했다”며 “어떤 원인인지 모르나 당뇨병 발병 10여년전부터 인슐린 분비량이 감소하는 게 선행되고 이후 인슐린저항성이 후행한다는 게 최근 부각되고 있는 학설”이라고 강조했다.
이같은 이론적 기반에 따라 비만한 사람의 비중이 높지 않은 한국의 당뇨병 환자에게 무조건 소식과 운동만을 강요하는 기존 치료법은 잘못됐다고 최 교수는 지적했다.그는 “영양이 제대로 몸에 공급되지 않아 마르게 되는 당뇨병 환자들이 소식과 운동을 실천하면 영양상태가 더욱 나빠지고 결국 합병증이 초래된다”며 “하지만 인슐린펌프는 식사를 충분히 해도 혈당이 정상적으로 잘 조절되고 몸의 영양 상태도 좋아져 합병증 발병도 줄어든다”고 말했다.그의 연구 결과 기존 당뇨병 치료로는 환자의 76%에서 망막 합병증이 발병하지만 인슐린펌프 치료는 3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 교수는 “장기간 인슐린펌프로 치료해 이후 펌프를 달지 않고도 정상 혈당을 되찾게 된 환자가 7명이나 되고 이들 중에는 유병기간이 최장 15년에 달한 환자도 있어 당뇨병을 얼마나 오래 앓았는지에 상관없이 인슐린펌프 치료를 통해 정상 혈당을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말했다.또 “인슐린펌프 치료 시작 당시에 비해 인슐린 하루 총 투여량이 45% 정도 감소한 것은 베타세포의 기능이 그만큼 회복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