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 명의라는 중국의 화타와 한국의 허준은 사람의 걸음걸이나 발음,얼굴의 혈색과 인상만 봐도 병을 짐작하고 예방책을 가르쳐 죽음을 면하게 해줬다고 한다. 지금처럼 첨단 방사선 영상사진이나 혈액·소변 화학검사법이 나오지 않은 옛날에는 직감이 중요했을 것이다. 물론 전래돼오는 의서를 통해 이런 노하우들이 체계적으로 정립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기본기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짐작된다.
역시 직관력이 좋고 많은 환자를 경험해본 의사들이 더 나은 치료효과를 보이고 명성도 얻었을 것이다. 또 특이한 처방이나 처치법이 비방으로 전해져왔다고 하나 공개되지 않으니 계승적 발전이 어려웠다. 비방을 소장한 의사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해 맥이 끊긴 경우도 상당수였을 법하다.
건강 분야를 만17년간 취재해온 필자에게 많은 이들이 특정 질환 분야에선 누가 명의냐고 물어온다.
대개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고 해당 의학회에서 이름난 간판교수를 소개해준다.또는 누구에게 수술환자가 몰린다더라, 누구의 수술솜씨가 기가 막힌다더라, 누가 내시경으로 쪽집게처럼 내과 질환을 판명하더라하는 구전을 빌어 명의를 안내해준다. 하지만 이런 의사들은 수개월 내지 1년이 넘는 진료예약환자가 대기해 있어 소용이 없을 때가 많다.
명의를 지인에게 소개할 때 더 답답한 점은 확신없이 웬만한 의대 교수 중 아무 분이나 일러주는 것이다.의사들간의 세세한 비교우위를 잘 모르는데다가 모든 게 공개되고 의학자간의 검증을 통해 불합리한 것은 버려지고, 합당한 것만 선택하는 현대의학의 시스템 상 의대 교수라면 비등한 실력을 갖췄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의를 이렇게 정의하게 된다. 어느 의대를 나오든 다양한 환자를 많이 치료한 경험이 있으면 실력이 늘어 명의가 될 수 있다. 명의는 태어나는 게 아니고 만들어진다. 이게 명의의 핵심인 것 같다.오늘날 명의는 만들어지기 때문에 첨단시스템을 갖춰놓고 다양한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 예컨대 대학병원 교수들이 명의가 되기에 유리한 고지에 서 있다. 물론 타고난 관능적 감각에 따라 치료능력이 좌우될수 있다. 손이 빠르고 매서운 외과 의사는 손이 둔한 외과 의사에 비해 뛰어난 수술결과를 가져올 것이란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훌륭한 외과의사는 환부를 덜 째고, 수술후 왠지 통증이 덜하며, 합병증이 없을 것이다.
명의가 되는 또 하나의 부수적 조건은 열심히 새로운 이론과 테크닉을 배우고 이를 위해 해외학회에서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유력 제약업체나 의료기기회사의 후원을 받아 대단위 연구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학문적 실력 차이가 치료성적에도 비례적으로 관계하는가, 명의로부터 치료받는 환자가 만족감도 크냐는 별개의 것일 수 있다는 회의를 많이 하게 된다.
첨단의학이 발전하면서 문진이나 촉진의 비중은 줄어들고 영상검사나 데이터(혈액 및 소변검사 수치 등)에 치중해 진단 치료하는 경향이 우세하다. 대학병원에 입원하면 고작해야 일주일에 한번 의대 교수를 볼수 있는 게 지금의 비인간적 시스템이다. 의사들은 낮은 의료수가와 연구 부담에 따른 바쁜 일정과 피로감으로 환자를 친절하게 대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 맞다. 그러나 이를 핑계로 다가온 죽음과 지속되는 고통 속에 떠는 환자들의 손을 따스히 잡아주지 못한 점은 없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1990년대 이전만 해도 간에는 김 아무개, 척추질환에 석 아무개, 위암에 김 아무개 등 국가적 브랜드 네임을 갖는 의대 교수가 있었다. 이들은 일찍이 미국이나 일본에서 첨단의술을 배우고 귀국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면서 유명 의대에 속하지 않은 교수들도 해외연수를 나가게 됐고 실력이 점차 평준화되면서 명의의 권위는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더욱이 인터넷의 발달로 최신기본지식은 외국을 나가지 않아도 습득할수 있는 상황이다.
또 약7년전만 해도 언론에서 ‘명의 시리즈’를 연재하면 학회에서 추천한 유명 의대 교수들이 연장자순으로, 어쩌면 기계적으로 언급됐으나 이제는 이게 무의미하다는 판단이 섰는지 요즘엔 이런 시리즈를 거의 볼 수 없다. 과학성을 추구하는 현대의학의 특성상 허준과 같은 신비감을 주는 명의는 다시 나올수 없을지 모른다. 다만 풍부한 임상경험에 열정과 친절,양심까지 갖췄다면 의사라면 존경받아야 하고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명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