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질환 약물에 치중하고 있는 미국 바이오젠(Biogen, BIIB)은 올 1월 승인된 ‘레켐비’(Leqembi, 성분명 레카네맙 lecanemab)의 매출에 대해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중간’(modest) 수준의 매출을 기대한다고 지난 15일(현지시각) 예측했다. 마케팅 비용이 많이 들고, 항아밀로이드 항체 계열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바이오젠은 이날 2022년 4분기 및 연간 실적을 발표했다. 작년 4분기에 매출 25억4000만달러를 냈다. 전년 같은 기간보다 7%가량 줄었지만, 시장 추정치(24억4000만달러)를 웃돌아 저조할 것으로 예상한 시장의 우려를 잠재웠다.
2022년 전체로는 101억7300만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2021년 거의 110억달러의 매출을 달성했지만 다발성경화증(MS), 척수성근위축증(SMA) 관련 제품군, 바이오시밀러(삼성바이오에피스 제품을 대행 판매) 등이 하향세를 보여 전체 실적이 후퇴했다. 특히 다발성경화증 치료제 가운데 가성비가 높았던 ‘텍피데라캡슐’(Tecfidera, 성분명 디메틸푸마레이트, dimethyl fumarate)이 특허 만료로 카피 제품이 등장함에 따라 매출이 감소한 영향이 컸다.
바이오젠의 매출의 절반가량은 여전히 텍피데라, ‘티사브리주’(Tysabri 성분명 나탈리주맙 natalizumab), ‘뷰메리티’(Vumerity, 성분명 디록시멜 퓨마레이트, Diroximel Fumarate) 등 다발성경화증 치료제들이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바이오젠에 악재는 산재해 있고, 이를 돌파하기 위해 파이프라인의 구조조정과 인수합병이 진행돼야 할 상황이다.
아두카누맙에 내려진 FDA의 부작용 경고 라벨 강화
우선 바이오젠의 첫 번째 항아밀로이드 알츠하이머병 치료제인 ‘애듀헬름’(Aduhelm 성분명 아두카누맙 aducanumab)에 대해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추가 경고를 내렸다.
제품 라벨에 “환자의 뇌내 출혈 위험에 대해 모니터링할 것을 의사에게 당부한다”는 내용이 새로 삽입된다. 애듀헬름은 2021년 6월, FDA 가속승인을 받아 출시됐으나 곧장 유효성, 높은 가격, 안전성에 대한 논란에 휩싸였다.
2021년 11월, 바이오젠은 이 약으로 치료받은 75세 여성이 아밀로이드 관련 영상 이상(amyloid related imaging abnormalities, ARIA)으로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2021년 7월부터 9월까지 3건의 다른 ARIA 사례가 보고되었으며, 모두 미국 바깥에서 발생했지만 입원이 필요할 정도로 위중했다.
새로운 의약품 라벨 변경에서 FDA는 “의사에게 애듀헬름을 복용 환자에서 드물지만 직경 1cm를 초과하는 뇌내 출혈 사례가 나타날 수 있음을 환자에게 알리라”고 권고했다. 항혈전제나 혈전용해제를 함께 투여하는 환자에선 뇌출혈 위험이 더 높을 수 있다고 FDA는 명시토록 했다.
추가 안전 경고는 미국 공공 의료보험인 메디케어 및 메디케이드가 애듀헬름의 사용 범위를 심각하게 제한했기 때문에 애듀헬름 매출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애듀헬름은 2022년에 겨우 480만달러 어치가 팔렸다.
구조조정 차원서 ‘빅소트리진’ ‘오렐라브루티닙’ 개발 중단
바이오젠은 매출 위축과 관련, 경비 절감 차원에서 파이프라인 정리에 나섰다. 이 회사 연구개발 책임자인 프리야 싱할(Priya Singhal)은 이날 두 가지 신약후보물질을 폐기한다고 밝혔다.
신경병성 통증 치료 후보로 임상 단계에 있는 빅소트리진(vixotrigine)과 다발성경화증을 목표로 임상 중인 오렐라브루티닙(orelabrutinib)이 그것이다. 빅소트리진은 경구용 나트륨 채널 차단제로서, 2상 CONVEY 임상시험에서 1일 2회 200mg 투여가 12주 후 일상적인 통증을 상당히 완화시킨다는 가능성을 보여줬으나 이번에 임상이 중단됐다.
바이오젠이 2021년 7월, 중국 베이징의 이노케어파마(InnoCare Pharma Limited, 諾誠健華醫藥有限公司)로부터 도입한 경구용 저분자 브루톤 티로신 인산화효소 억제제(Bruton's tyrosine kinase inhibitor, BTKi)인 오렐라브루티닙은 이노케어파마와의 라이선스 계약 해지에 따라 반환될 예정이다. 당시 바이오젠은 이노케어에 경구용 브루톤의 티로신 키나제 억제제인 오렐라브루티닙을 중국 업체에 반환한다. 2021년 7월, 계약 당시 바이오젠은 1억2500만달러의 선불 계약금을 이노케어에 지불했다.
그래도 믿을 건 … ‘주라놀론’ ‘레켐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오젠은 세이지테라퓨틱스(Sage Therapeutics 나스닥 SAGE)로부터 도입해 공동 개발 중인 항우울제 후보 세이지테라퓨틱스(Sage Therapeutics와 함께 개발한 주라놀론(zuranolone, 개발코드명 SAGE-217/BIIB125)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이 신약후보는 지난 6일 FDA 우선심사 대상으로 지정돼 오는 8월 5일 허가 여부가 결정날 예정이다. 주라놀론은 주요우울장애(major depressive disorder, MDD)와 산후우울증(postpartum depression, PPD) 적응증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바이오젠은 2020년 11월, 세이지테라퓨틱스로부터 주라놀론을 도입하는 조건으로 당시 15억2500만달러(선불금 8억7500만달러, 지분투자 6억5000만달러)를 썼다. 추가 마일스톤으로 최대 16억달러도 약속했다.
또 하나의 희망은 지난달 6일 FDA 가속승인을 받은 레켐비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일 수 있듯 FDA는 레켐비 승인 직후인 같은 달 19일, 동일 계열 알츠하이머병 라이벌 신약후보인 도나네맙(donanemab, 개발코드명 LY3002813)에 대해 승인을 거절하는 대응종결서신(CRL)을 보냈다. 피험자 수를 늘리고 기왕이면 정식 승인으로 다시 도전하라는 시그널이었다.
레켐비의 연간 약값은 2만6500달러로 책정됐다. 애듀헬름의 ‘탈선’으로 한동안 좌표를 잃고 방황했던 바이오젠은 레켐비를 통해 연간 수십억 달러의 매출을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바이오젠과 파트너인 일본 에자이는 레켐비를 가속승인이 아닌 정식승인으로 전환하기 위해 증빙 자료를 지난 1월 6일, FDA에 제출했다. 에자이는 이르면 올해 7월 정식승인이 나올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뷰메리티’와 ‘스핀라자’에겐 한번 더 영광을
바이오젠은 2016년 12월, 최초의 척수성근위축증(Spinal Muscular Atrophy, SMA) 치료제로 승인받은 ‘스핀라자주’(SPINRAZA, 성분명 뉴시너센나트륨, Nusinersen)와 텍피데라의 후속 제품으로 개발한 다발성경화증 치료제 ‘뷰메리티’에 대해 여전히 기대고 있다.
스핀라자는 첫 SMA 치료제로, 2021년 5월 이후 복제약이 나오고 있긴 하지만 브랜드파워가 높다. 현재까지 이 질환에서 가장 많이 처방된다. 스핀라자의 작년 4분기 매출은 4.1% 증가한 4억5880만달러로 월가 추정치인 4억2510만달러를 웃돌았다.
빅파마가 활발할 때 바이오젠은 잠잠했던 인수합병 … 새 CEO 추진 시사
2022년 11월, 위기에 빠진 바이오젠을 구하기 위해 부임한 크리스토퍼 비에바허(Christopher Viehbacher) CEO는 대규모 인수합병을 추진할 뜻을 비쳤다. 그는 이날 실적 발표 자리에서 “바이오젠이 애완동물과 다른 기타 사업에 돈을 썼다”며 “다시 초심으로 면역질환, 정신질환, 희귀질환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알츠하이머병 같은 정신질환의 경우 신약개발에 필요한 임상시험 기간도 많이 걸리고, 투자자들도 호의적이지 않지만 방향은 바람직했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그는 지속성장을 위한 자원의 효율적 배분 차원에서 신약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하고, 기존 사업을 구조조정한다고 밝혔다. 이런 맥락에서 신경병성통증 치료제인 빅소트리진도 폐기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바이오젠은 성장전략의 하나로 인수합병을 꼭 해야 한다고 검토하지 않았다”며 “이 회사가 인수합병을 하고 싶지 않았다면 나를 고용할 이유가 많지 않았다”고 말해 인수합병을 추진할 의지를 비쳤다. 그는 2011년에 사노피가 젠자임(Genzyme)을 200억달러에 인수할 때 관여했던 주역이다.
바이오젠은 작년 12월 말 기준 60억달러 상당의 현금, 현금 등가물, 유가증권을 보유하고 있다. 또 삼성바이오에피스 지분 매각으로 향후 15개월간 12억5000만달러를 추가로 받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많지는 않지만 인수에 필요한 기본 실탄이 있다는 얘기다.
바이오젠은 20여년 전 아이덱(Idec)과의 합병한 이후 더 큰 규모의 인수를 추구하지 않았다. 세이지의 주라놀론 도입 정도가 그나마 큰 거래였다. 바이오젠은 늘 인수 대상자로 거명되지만 막상 결행한 바는 없었다. 이에 따라 슈퍼 딜을 통해 몸집을 키워나간 다른 빅파마와의 경쟁에서 밀리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새 CEO가 새 바람을 일으킬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