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중순 흐리긴 했어도 멀쩡했던 하늘이 대관령 터널을 지날 즈음에는 하늘은 시커메지고 천지가 짙은 안개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안개 터널을 빠져나가자 거짓말같이 하늘이 개이고 푸른 바다가 눈앞에서 일렁인다. 동해시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동해 휴게소를 지나면 이내 아름다운 푸른 물결이 푸른색 명주실처럼 이어지며 푸른 도시 삼척시가 펼쳐진다.
강원도 동남단의 삼척은 동해시와 경상북도 울진군 사이에 있다. 동쪽에는 맹방 등 아름다운 해변이 굽이굽이 이어지고 서쪽 땅은 백두대간이 너무 높아 잠시 머무르기에는 좋지만 오래 머무르며 살 곳은 못된다고 할 정도로 험준한 산맥이 펼쳐진다. 그런가 하면 ‘논에 종자 한 말을 뿌리면 40말을 거둔다’고 할 정도로 기름진 땅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삼척은 신라 파사왕 때 신라에 병합됐고 경덕왕 때 삼척군이 됐다. 조선 태조 2년에는 태조의 4대조인 목조의 처가가 있던 고을이라 하여 부로 승격됐다. 태종 3년에 군정의 중심이자 오늘날 특례시에 정도에 해당하는 도호부가 됐다.
지금의 동해시와 태백시는 과거에 모두 삼척군에 속했으나 1980년 삼척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이 통합하여 동해시로 떨어져 나갔다. 1981년에는 삼척 장성읍과 황지읍이 합해져 태백시로 분리됐다.
삼척시 도계읍 구사리 백산 근처 큰덕샘에서 발원한 하천이 장장 60km를 흘러 근덕면 정상리 동해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백두대간 발원지에서 동해까지 무려 50여 회를 휘돈다 하여 오십천이라 부른다. 이 오십천은 보물 213호로 지정된 죽서루(竹西樓) 아래를 휘돌며 못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 삼천포가 되어 동해로 흘러든다.
오십천이 휘돌아가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죽서루가 우아하게 서 있다. 관동팔경 중 제1경이다. 관동은 대관령의 동쪽을 말하고, 관서는 금강산 북쪽 끝자락인 철령의 서쪽을 뜻한다. 관북은 철령의 북쪽으로 이른 바 함경도 지역이다. 관남은 조령관의 남쪽을 말하는데 흔히 영남이라 한다. 영남은 고개의 남쪽이란 뜻으로 문경새재가 조선팔도의 대표적 고갯길로 각인돼 있어서다.
관동팔경은 삼척 죽서루를 비롯해 고성군 간성읍 청간정(淸澗亭), 강릉시 경포대, 고성군 삼일포(三日浦), 북한 강원도 통천군 총석정(叢石亭), 양양군 낙산사(洛山寺), 울진군 평해읍 월송정(越松亭), 울진군 근남면 망양정(望洋亭)을 말한다. 월송정 대신 통천군 흡곡면(歙谷面)의 석호인 시중호에 인접한 시중대(侍中臺)를 꼽기도 한다. 관동팔경 모두 바다와 근접해 있으나 죽서루만이 바다와 직접 면하지 않았다.
동국여지승람에 “죽서루는 객관 서쪽에 있다. 절벽이 천 길이고 기이한 바위가 총총 섰다. 그 위에 날아갈 듯한 누각을 지었는데 죽서루라 한다. 아래로 오십천에 임했고 냇물이 휘돌아서 못을 이루었다. 물이 맑아서 햇빛이 밑바닥까지 통하여 헤엄치는 물고기도 낱낱이 헤아릴 수 있어서 영동 절경이 된다.” (신정일의 택리지에서 재인용)
개장을 십여 분 앞둔 죽서루는 정적이 감돌았지만 10여 년 전 겨울 찾았다가 실망감만 안고 돌아섰던 죽서루가 아니었다. 입구에는 널찍한 주차장을 갖추었고 관광안내소도 설치돼 있었다. 어엿한 관광 명소의 면모를 풍기고 있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죽서루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 듯한 남루한 정자에 불과했지만 오늘날의 죽서루는 문헌의 기록이 걸맞게 단장했다.
우선 죽서루를 감싸고 있는 울창한 숲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래된 나무들이 연륜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죽서루 입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회화나무 세 그루는 수령 350년이 넘어 보호수로 지정됐다.
관동팔경 중 바닷가에 접하지 않는 유일한 정자인 죽서루는 정면 7칸에 측면 2칸으로 지어졌다. 규모 면에서 단연 압도적이다. 죽서루는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가 처음 지었다. 이승휴는 고려 충렬왕 때 기울어가는 고려 왕조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원의 횡포와 왕의 실정을 비판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개성, 삼척 등을 전전하였다. 나중에는 아예 삼척(지금은 동해시) 두타산 아래 은거하며 ‘제왕운기’를 집필했다.
그 뒤 조선시대 태종 3년(1403년)에 삼척부사 김효손이 중창하였다. 죽서루를 세울 당시 죽죽선(竹竹仙)이라는 기생이 살던 집이 누각 동쪽에 살아 죽서루라 이름지었다 한다. 또는 누각 동쪽에 절집인 죽장사(竹藏寺)가 있어 죽서루라는 설명도 있다.
죽서루는 여러 면에서 압도적이다. 규모가 그러하고, 누각을 올릴 때 자연 암반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기둥을 ‘그랭이질’하여 암반에 맞추고 위치에 따라 길이를 달리 한 점 등 건축적 솔루션도 단연 돋보인다. 한국 건축의 모든 것이라고 극찬한 책도 있다.
암반 위를 조심스럽게 올라 누각 앞에 서면 불현듯 펼쳐지는 풍광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오십천 물길이 그지없이 평화롭기만 하다. 비 갠 봄날의 풍경은 우화등선한 듯 신비감을 자아낸다.
누각 안에는 수많은 묵객들이 남긴 현판 등이 눈길을 끈다. 숙종과 정조의 어제시를 비롯해 율곡 이이(1536~1584), 송강 정철(1536~1593), 미수 허목(1595~1682) 같은 쟁쟁한 문인의 글이 걸려 있다. 남인의 영수였던 허목이 쓴 ‘제일계정(第一溪亭)’, 이성조가 쓴 ‘관동제일루’, 이규헌이 쓴 ‘해선유희지소’ 등의 현판이 돋보인다. 죽서루 오른편에는 ‘관동별곡’을 남긴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송강은 전남 담양의 식영정(息影亭)에서 ‘성산별곡’을, 이곳 죽서루에서 ‘관동별곡’을 지었다.
이규헌은 1835년(헌종 원년)부터 1839년(헌종 5)까지 5년 동안 삼척부사로 재직하면서 백성들의 세 부담과 요역 감면을 위해 노력했으며 유학을 장려했다. 죽서루 아래 방수제를 쌓고 ‘빙월루’, ‘원풍루’ 등의 현판을 써서 걸었다. 죽서루 앞 동헌 터에 그의 ‘흥학비’가 남아 있다.
죽서루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화가인 겸재 정선이 1738년에 그림으로 남겼다. 뿐만 아니라 단원 김홍도, 표암 강세황이 50년 뒤인 1788년에 죽서루를 그렸다. 다만 단원의 그림은 후배 화가가 모사한 것인지 아직 명확하지 않다. 당시 그림에는 누각 좌우에 가히 높이 10m쯤 되는 회화나무로 추정되는 두 거목이 버티고 있다. 당시 그림 속 좌우의 부속 누각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죽서루의 왼편 대나무 숲 인근 선사시대 암각화와 용문바위 등도 놓쳐서는 안 될 볼거리이다. 보통 해안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기기묘묘한 바위가 넓게 분포돼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죽서루 용문바위는 신라 제30대 문무왕이 삼척의 오십천으로 뛰어들 때 생겨난 바위라고 한다. 문무왕은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켰는데 어느 날 오십천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죽서루 옆 바위를 뚫고 지나가면서 바위에 구멍이 뚫린 것이 지금의 용문바위다. 그 후 용문바위는 장수와 다복, 다산을 비는 기원처가 되어 많은 이들이 찾아온다.
그런가 하면 용문바위에 여성 생식기 모양의 구멍을 새겨 넣은 성혈(性穴)이 남아 있다. 성혈은 선사시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원시 신앙의 한 형태인데 조선시대에는 아녀자들이 성혈터를 찾아가 구멍에 좁쌀을 담아 놓고 치성을 드린 다음 그 좁쌀을 한지에 싸서 치마폭에 감추어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기자(祈子) 민간신앙이 성행했다고 한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칠월칠석은 이런 이벤트가 성황을 이뤘다. 죽서루 암각화에는 직경 3~4cm, 깊이 2~3cm크기의 성혈 10개가 남아 있다.
죽서루 주변은 삼척 도호부 관아 유적지 복원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라 다소 어수선하다. 공사 현장을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면 삼척읍성의 흔적이 남아 있어 천천히 둘러보기 좋다.
기록에 따르면 삼척읍성은 고려 시대에 토성으로 축성됐고,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다시 쌓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민가 건축 등으로 흔적이 많이 훼손되어 원형 파악이 쉽지 않다. 2010~2012년 죽서루 주변 복원사업 과정에서 삼척읍성의 토성과 석성이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