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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투어
고구려 흔적의 아차산성과 조선의 탯줄 건원릉이 있는 구리 여행
  • 변영숙 여행작가
  • 등록 2022-06-28 10:02:24
  • 수정 2022-06-28 18:3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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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양주군 구지면+망우리면 합쳐진 전국 최소 지자체 市 … 한강, 용마산과 어깨 나란히

경기도 구리시는 북쪽으로 남양주시, 서쪽으로 서울시 광진구·중랑구·노원구,  남쪽으로는 한강 너머 서울 강동구와 접한다. 마한의 영토였으며, 삼국시대에는 차례로 백제, 고구려, 신라의 영토에 속했다.  


구리는 조선시대에 양주군에 속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대개편 때 구리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했다. 양주군 구지면(九旨面)과 망우리면(忘憂里面)의 글자를 따서 구리면이라 했다. 1973년 읍으로 승격됐고 1980년에는 양주군에서 분리된 남양주군에 속했다가 1986년 남양주시에서 분리돼 구리시로 승격됐다. 


구리시는 전국 지자체 중에서 가장 면적이 작은 도시다. 경기도 면적의 0.33%에 불과하지만 경기도 정중앙에 위치해 있어 수도권 제1외곽순환도로를 비롯해 중부고속도로, 북부간선도로와 연결되는 사통팔통 교통의 요지다. 동구릉과 아차산을 제외하면 특별한 문화유산이나 유적지는 없는 편이지만, 아차산 일대에서 다량의 고구려 보루(堡壘)와 유물들이 출토됨으로써 국내 최대 고구려 유적지로 주목받고 있다.


남쪽 향해 솟은 야트막한 아차산과 테뫼식+포곡식의 山腹式 아차산성


경기 구리시에 서울 광진구와의 경계 지역에 야트막한 아차산(阿且山, 峨嵯山, 阿嵯山 등으로 혼용)이 있다. 남쪽을 향해 솟아오른 산이라 하여 ‘남행산(南行山)’이라고도 하며,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끼산, 아키산, 에께산, 엑끼산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고려사에 처음 ‘아차산’이란 명칭이 등장한다.


중랑구 면목동, 망우리동, 중곡동의 능선을 따라 흐르는 용마산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아차산은 해발 296m 남짓으로 산세가 험하지 않아 많은 시민들이 찾는다. 정상까지 40분~1시간이면 충분하다. 아차산은 험하지 않으면서도 전망이 뛰어나 더 많은 사랑을 누리고 있다. 북쪽으로 북한산과 도봉산이 손 닿을 듯 솟아 있고, 아래로는 중랑천과 왕숙천이, 멀리 한강까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아차산 정상부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아차산성(사적 234호)이 있다. 구리시 아천동에서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에 걸쳐 있다. 산성의 대부분 지역은 광진구에 속하며, 성벽 북쪽과 장대지 등 일부가 경기도 구리시에 속한다. 아단성, 장한성, 광장성으로도 불린다.


아차산성은 아차산의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오는 능선의 중앙부에 축조됐다. 산봉우리(정상부)를 둘러싸며 쌓은 테뫼식과 산골짜기를 포함하여 쌓는 포곡식(包谷式)이 혼합된 산복식(山腹式) 산성이다. 산성의 둘레는 약 1km에 달하고 성 내부의 면적은 2만5000평 정도다. 성 안에는 우물과 배수구도 있다.


아차산과 아차산성은 한강 유역을 둘러싼 삼국시대의 치열한 패권 다툼의 현장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286년 백제 책계왕(責稽王) 때 축성됐고, 396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이 공격하여 점령했다는 기록이 있다. 475년 개로왕 때 거대한 궁궐 개축 공사로 백제가 위태로워진 틈을 타 고구려가 쳐들어오자 개로왕이 성 밖으로 도망쳐 나가 항복했다. 고구려 장수 걸루는 개로왕에게 세 번 침을 뱉고 죄목을 물어 아차산 아래서 처형했다고 한다. 고구려는 보루를 쌓는 등 적의 침략에 대비했지만 결국 신라에 패하고 말았다. 한편,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였던 온달장군이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재탈환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아차산성 아래서 전사했다는 설도 전한다.


아차산 일원에는 고구려의 남하정책과 관련된 약 20여 개 보루가 집중 분포돼 있는데 이 중 17개 보루가 사적 제455호로 지정돼 구리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아차산성 4보루

보루는 둘레 100~300m 정도의 작은 규모의 성으로 10~100명의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었다. 아차산 보루군에서는 토기, 화살, 궁궐 축성에 사용된 기와 등 다양한 삼국시대 유물이 출토됐다. 이들 유물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 신라와 백제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한강 유역의 패권을 상실하기까지의 역사를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특히 10개의 고구려 보루는 남한에 분포하는 고구려 관련 유적 가운데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고구려대장간마을’ … 현무를 숭상하는 거믈촌, 난방 및 취사 겸한 고구려 온돌방


구리시 아천동 우미내마을에 조성된 고구려대장간마을은 고구려 벽화와 아차산 보루군 중 아차산 4보루에서 발견된 간이대장간 등을 바탕으로 2006년에 재현한 구리시 공립박물관이다. ‘아차산고구려유적전시관’과 ‘야외전시장’으로 구성돼 있다.


야외전시장은 대장간마을과 야외공연장, 산책로 등으로 꾸며져 있다. 대장간마을에는 나무로 지어진 목조 가옥이 빼곡히 자리잡고 있는데 얼핏 봐도 건축 양식이 특이하다. 우리네 농촌마을에서 볼 수 있는 농촌가옥과도 다르다. ‘이 마을은 고구려 벽화 속에 나오는 집 구조를 바탕으로 상상으로 재현해 놓은 것’이라는 설명을 읽고 나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대장간마을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성격 급한 사람은 10분이면 휘리릭 다 둘러볼 수 있고, 아무리 찬찬히 돌아봐도 30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비록 상상을 더하긴 했어도 고구려의 가옥 형태나 문화 등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공간이다. 우리나라에는 흔치 않은 고구려 유적으로 진지하게 관람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 잠시 상상의 날개를 펴면서 고대 고구려 시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 보자.


구리시 고구려대장간마을의 고구려식 온돌이 설치된 담덕채

가옥 입구에는 이름과 간단한 설명이 곁들여 있다. ‘담덕채’에는 방 중심에 온돌이 있고, 온돌 주변으로 생활공간이 있다. 마치 우물처럼 보이는 온돌은 오늘날처럼 방 전체를 데우는 것이 아니라 방 안에서 불을 지펴 일부분을 데우는 ‘쪽구들’ 형식이다. 취사와 난방을 동시에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온돌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됐는지를 설명해준다.


‘연호개체’에서는 고구려인들의 기본 실내공간 활용 방식을 엿볼 수 있다. 고구려인들은 언제든지 말을 타고 나갈 수 있는 입식 생활을 선호했으며 쪽구들을 놓은 공간, 의자를 놓아 접대할 수 있는 공간, 평상이 놓인 공간 등으로 구분했다. 회의 장소였던 ‘경당’도 있다.


‘대장간’에는 아차산 4보루에서 발견된 간이대장간 시설을 바탕으로 상상을 더해 만든 공간으로 풀무, 모루 등 대장간의 가장 중요한 상징들을 볼 수 있다.


‘거믈촌’에는 청룡(동), 백호(서), 주작(남), 현무(북) 등 4신 중 현무를 숭상하는 마을을 뜻한다. 현무는 거북과 뱀이 합쳐진 상상의 동물로 냉철함과 지혜를 뜻한다.


다수의 TV 드라마와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드라마 ‘태왕사신기(2007)’가 대표적이다. 고구려 왕자 담덕이 광개토대왕으로 등극하기까지의 일대기를 그린 판타지 사극으로 야외공연장 뒤편에 모형 ‘광개토대왕비’와 ‘담덕상’이 세워져 있다. 이밖에 시크릿가든, 선덕여왕, 바람의 나라, 자명고, 쌍화점, 쾌도 홍길동, 계백, 신의, 역린, 사임당 빛의 일기, 안시성 등의 영화가 그 뒤를 잇는다.


‘아차산고구려유적전시관’에는 아차산 보루군에서 출토된 유물과 아차산 4보루 모형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고구려대장간마을에는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대장간마을에서 놀자’는 고구려 역사문화 체험 프로그램으로 풀무질 체험, 와당문양찍기, 활체험, 탁본, 보루 완성하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유아에서부터 성인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지역사회 연계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아차산의 명물, 큰바위얼굴 … ‘욘사마’ 배용준이 ‘태왕사신기’ 촬영하다 발견 


2007년 드라마 ‘태왕사신기’ 촬영 당시 배우 배용준이 처음 발견했다는 아차산 큰바위얼굴

대장간마을 옆쪽으로 아차산 등산로 입구가 이어진다. 작은 시냇물을 건너면 곧바로 숲길로 이어진다. ‘아차산 4보루, 큰바위얼굴, 3층석탑’ 안내판을 따라 10분 정도 오르면 ‘큰바위얼굴’이 나온다. 눈, 코, 입의 모양이 선명하다. 영락없는 사람의 얼굴이다. 장군의 얼굴처럼 위엄이 가득하다. 이 바위는 2007년 드라마 ‘태왕사신기’ 촬영 당시 배우 배용준이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배용준의 인기가 하늘 모르고 치솟을 때 ‘욘사마’를 보려고 찾아온 일본인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꽤 이름이 알려졌다고 한다.


계속 등산로를 따라가면 작은 암자 ‘대성암’이 나온다. 대성암은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수도를 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종각 등이 있다. 일반 가정집처럼 커다란 철제문이 세워져 있는 것이 갈 때마다 특이한 느낌을 갖게 한다.


대웅전과 삼성각 뒤에 ‘쌀바위’라고 불리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쌀바위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한다.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수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많은 대중들이 의상대사를 보기 위해 절로 찾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을 공양할 곡식이 필요했는데, 이 바위틈에서 쌀이 나와 공양을 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는 법. 바위틈이 넓어지면 더 많은 쌀이 나올 거란 생각에 사람들은 바위틈을 넓히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때부터 잘 나오던 쌀은 나오지 않고 쌀뜨물과 타버린 쌀만 수삼일 동안 나오다가 그마저도 아예 나오지 않게 됐다고 한다. 많은 욕심이 언제나 화를 불러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들은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부처나 예수가 아닌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쌀바위 근처 의자에 앉아 한강을 바라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천천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느긋하게 보인다.


동구릉, 조선왕릉 중 최대 규모 9기 … 태조, 문종, 선조, 현종, 영조, 헌종까지 묻혀


구리시 검암산 자락에는 조선시대 왕릉 중 최대 규모인 동구릉(東九陵)이 자리하고 있다. 면적이 약 59만평에 달한다.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잠들어 있다. 


고려 공민왕릉인 현정릉을 본 따 조성된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과 세종 때 완성된 ‘국조오례의’의 규정에 따라 만든 현릉(문종의 릉), 전쟁의 피해가 능에도 영향을 미친 목릉(선조의 릉)에 이르기까지 조선 왕릉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왕릉군이다.


9기의 왕릉이 모셔진 곳이니 두말할 필요도 없이 명당 중의 명당이다. 마지막으로 제24대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를 모신 경릉이 조성되면서 동구릉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북방의 억새만 쓸쓸히 나부껴 - 태조의 건원릉


9개의 왕릉 중에 가장 방문객이 많이 찾는 곳은 태조 이성계의 묻혀 있는 건원릉(健元陵)이다. 태조는 자신의 계비인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희망했지만 태종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을 알고 고향 함흥에 묻어달라고 한다. 그러나 태종은 ‘조선 개국의 시조이자 아버지인 태조를 궁에서 너무 먼 함흥에 묻을 수 없다’며 동구릉에 안장했다. 그러고는 마음에 걸렸는지 함흥에서 억새를 가져다 심었다.


태종은 계모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貞陵)을 파헤치고 지금의 정릉 자리로 이장했다. 이장하는 과정에서 병풍석은 광통교의 기단으로 사용되거나 야산에 버려지기도 했다. 정릉을 묘로 격하시키기도 했다.


건원릉에는 벌써 푸른 억새가 수북하게 뒤덮여 있다. 억새가 과연 태종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의 발로였는지 여전히 의구심이 남는다. 그러나 역사는 어떤 가정도 허용치 않는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실체는 억새일 뿐이다. 억새는 가을에 봐야 제맛이다. 늦가을 하얗게 휘날리는 태조 능의 억새는 기이하면서도 장관이다.


두 여인의 비극적인 삶 – 선조의 목릉


건원릉 홍살문 옆으로 난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면 조선 14대 임금 선조가 묻힌 목릉(穆陵)이 있다. 목릉은 선조와 그의 원비 의인왕후 박씨와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같은 언덕에 정자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묻히는 형태의 동원이강릉(東原異岡陵)으로 동구릉에서 세 번째로 조성됐다.


원비 의인왕후 박씨(1555~1600)의 능에는 병풍석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능침의 규모도 왕릉에 비하면 훨씬 적은 편이다. 석물들 사이에 푸른 이끼도 많이 끼어 있고 비바람에 의한 마멸도 심해서 석물들의 윤곽이나 조각이 많이 흐릿해진 상태다.


의인왕후는 선조 2년에 15세의 나이로 왕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렸으나 아이를 낳지 못했다. 성품이 온화하여 후궁들이 낳은 아이를 자신이 낳은 아이처럼 보살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선조는 후궁인 인빈 김씨와 피난을 떠나고 박씨는 혼자서 피난길에 올라야만 했다. 선조의 박대로 마음고생이 심했다 전해진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병을 얻어 소생 없이 4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삶이 쓸쓸해서일까. 유택마저도 더 쓸쓸해 보인다.


인목왕후 김씨(1584~1632)는 1602년(선조 35년)에 계비로 책봉됐다. 당시 김씨의 나이는 열다섯 살로 선조와는 32살이나 차이가 났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 실권을 장악한 대북파에 의해 아들 영창대군과 아버지 김제남이 살해당하고, 자신 또한 폐서인되어 서궁(경희궁)에 유폐되는 비운을 겪었다. 인조반정으로 인목대비로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됐고 국정에도 관여했다. 그러나 여인으로서의 삶은 다분히 비극적이다. 조선왕릉은 조선 여인들의 삶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곳이다.


복원된 외금천교 홍예 … 43번 국도 넓히려 철거, 옛 감흥은 없어져 


동구릉에는 다른 왕릉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동구릉을 들어서면 산책로 옆에 동구릉 석물 부재와 복원된 외금천교 홍예가 전시되고 있다. 원래 동구릉 입구에는 왕릉과 속세 공간을 구분하는 금천이 흐르고, 그 위에는 ‘외금천교’와 물길이 모여드는 ‘외연지’가 있었다. 외금천교는 43번 국도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철거됐다. 당시 철거돼 보관하던 부재의 일부를 사용해 외금천교의 일부인 홍예가 복원돼 전시 중이다. 그런데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홍예는 어떤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탐방객들로부터도 외면을 받는 모양새다.


보물로 지정된 건원릉, 목릉, 숭릉의 정자각들


동구릉에는 건원릉, 목릉, 숭릉(崇陵, 현종과 현종비의 릉), 의 정자각이 보물로 지정됐다. 정자각은 봉분 앞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J자 모양으로 지은 건물이다. 건원릉(보물 제1741호) 정자각은 ‘조선 건국자의 정자각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조선왕릉 조성 제도에서 정자각의 표준이 된 건물로서 가치가 크다’는 점이 인정됐다. 


목릉(보물 제1743호)의 정자각은 조선시대 정자각 가운데 ‘유일한 다포형식의 건물로 기둥 상부 이외에 기둥 사이에도 공포(栱包, 처마를 지탱)를 배열한 건축양식이다. 살미(山彌)의 형태나 구조가 장식화 되기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어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으로 가치가 크다. 전체적으로 17세기 초에 재건된 문묘 대성전 포의 구성과 유사하다.


숭릉(보물 제1742호)의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한 팔작지붕으로 숙종 즉위년(1674)에 창건된 이래 처음의 형태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17세기 정자각의 다양한 유형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사례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일 년에 두 번 개방하는 ‘왕릉 숲’


영조와 정순왕후가 묻힌 원릉

문화재청은 일 년에 두 번, 봄 가을로 평소에는 폐쇄되어 있던 왕릉숲을 개방한다. 이에 따라 동구릉도 6월 말까지 원릉(元陵, 영조와 정순왕후의 무덤)에서 휘릉(徽陵,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까지 이어지는 숲길 1400m와 경릉(景陵)에서 자연학습장까지의 1300m 구간을 일반에게 개방한다. 왕릉 숲 입장 시간은 오후 4시 30분까지로 제한된다. 시간 엄수가 필수다.


일 년 중 숲이 가장 아름다운 6월은 왕릉 숲 개방과 맞물려 왕릉의 방문객들도 증가한다. ‘신의 정원’이라고 불리는 왕릉 숲에서 휴식과 치유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자.

일년에 두 번 개방하는 동구릉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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