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동부에 위치한 광주(廣州)는 동쪽으로는 양평군과 여주시, 서쪽으로 성남시, 남쪽으로 용인·이천시, 북쪽으로 하남시, 남양주시와 접하고 있다. 특히 양평, 하남, 남양주와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광주산맥에 둘러싸인 분지형 지역으로 도시 면적의 대부분이 산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경안천이 동서를 관통하며 흐른다.
택리지에서는 광주 땅을 ‘예부터 한수 남쪽의 토양이 기름진 곳’이라 했으며 고려말 문신 유백유는 ‘빼어난 기운은 정기를 저장하여 준걸을 낳았으니 조선 인물의 빛이 있구나’라고 노래한 바 있다. 오늘날 광주는 시 승격 20주년을 넘기며 인구 40만 시대를 맞아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초대형 포곡식 산성 … 수어장대의 위용, 청량당 ‘이회 장군의 恨’
‘강화로 피난길을 잡았던 인조의 어가 행렬은 청군에 길이 막히자 남한산성으로 방향을 돌린다. 그 행선지가 남한산성이란 말을 듣고 임금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들은 제 살 길을 찾아 우왕좌왕 흩어졌다. 그날 조선의 임금은 한번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초라한 행색으로 남한산성으로 숨어 들어갔다. 정묘호란 이후 9년 만의 일이다.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살기 위해 숨어드는 조선 임금의 입성은 참담했다.
임금과 조정은 남한산성 안에서 45일 동안 혹독한 겨울을 버텼다. 그 기간 단 한차례의 전투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전투도 없었다. 유일한 전투에서 군사 3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척화와 화친으로 나뉜 대신들은 끝없이 서로를 물고 뜯었다. 병자년 이듬해인 정축년에 영의정 김류와 이조판서 최명길의 화친이 이겼다.
임금은 홍예가 낮은 서문으로 허리를 굽혀 나와 들길을 걸어 서울시 송파구의 삼전도로 갔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 청나라의 칸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었다. 정축년 1월 30일의 일이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 등이 청의 심양으로 볼모로 잡혀갔고 임금은 다시 한양의 궁으로 돌아갔다.
잘려나간 병사들의 목이 성 안에 걸렸다. 떨어져 나간 팔다리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제 짝을 찾기도 어려웠다. 봄이 되자 성채에는 이름 모를 꽃들과 잡초가 무성했다.
참혹하고 치욕스러운 역사로 기록되는 병자호란의 현장인 남한산성은 1963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71년 도립공원이 되었다. 2014년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도시계획이 이뤄졌고 군사유산이라는 점, 지형지물을 이용한 축성술과 방어 전술의 시대적 층위가 결집된 초대형 포곡식(包谷式, 성 안의 계곡을 둘러싼 능선에 성을 축조) 산성이라는 점 등이 세계적 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오늘날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있는 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의 시조 온조가 도읍을 정하고 성을 쌓았다는 설이 있기도 했으나 발굴된 토기 등을 근거로 신라 문무왕 12년( 672)에 쌓은, 당시 동양 최대의 주장성(晝長城) 이라는 설이 힘을 받고 있다.
남한산성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개축된 것은 인조 2년(1624년)의 일이다. 그 해부터 2년 4개월간 본격적인 개축이 이루어져 성벽 둘레 8 km, 옹성 3개, 대문 4개, 암문 16개, 포대 125개를 갖춘 거대한 성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성안에는 광주부의 읍치(邑治, 읍성)를 옮기고 행궁과 함께 관아 건물도 들어섰다. 이후 정조 시대에도 대대적인 증개축이 이뤄졌다. 그러나 1907년 일본군에 의해 크게 훼손되어 오늘날까지도 복원 공사가 이어지고 있다.
북한산성과 함께 한양의 외곽을 수비하던 남한산성의 규모는 성벽 길이 12.35km, 성 내부 면적은 212만㎢에 달한다. 순조 때까지 산성 안에 각종 시설이 정비돼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가장 완벽한 성으로 꼽히며 1914년까지만 해도 500여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남한산성은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을 두고 있는데 그 중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문은 성곽의 서남쪽에 위치한 남문이다. 정조 3년에 개축하고 자하문이라 불렀다. 아름다운 홍예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문루를 갖추었다. 1976년 문루가 복원됐고 2009년 정조의 글씨를 집자해 제작한 ‘자하문’ 현판이 걸려 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와 어가 행렬은 자하문을 통해 성 안으로 피신해 들어갔다. 1637년 1월 30일 서문을 통해 삼전도로 나아가 청 태종(홍타이지) 앞에 무릎 꿇고 항복했다. 이날 인조는 곤룡포 대신 남색옷을 입고 한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의 예를 갖춰 성 밖으로 나와 ‘조선은 청에 대하여 신의 예를 행한다’는 항복 문서에 합의했다. 이날 산성에서는 곡소리가 가득했다고 한다. 청 태종은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을 볼모로 삼아 심양으로 돌아갔다.
서문에서 성곽길을 따라 ‘수어장대’(守禦將臺)로 향한다. 장대란 전투 시 장수의 지휘 초소를 말한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장대가 있다. 청량산 정상부에 세워진 수어장대(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는 남한산성에서 가장 화려하고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수어장대는 단층 누각으로 서장대라고도 했다. 영조 27년에 2층 누각으로 증축하며 내편은 ‘무망루’(無忘樓)라고 명했다. 청나라에 8년 동안 볼모로 잡혀 있다 돌아온 봉림대군(효종)의 원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이 담겨 있다. 영조와 정조는 여주 영릉(寧陵)의 효종 묘를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는 항상 무망루에 들려 그날의 치욕을 되새겼다고 한다.
그 옆 청량당(淸凉堂)은 이회 장군과 그의 부인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회(李晦, 1567~1625)는 당시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였다. 그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다. 축성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삼남지방으로 떠났던 부인 송씨는 돌아오던 길에 남편의 처형 소식을 듣고 투신자살한다.
이회는 죽는 순간 자신의 무고를 주장하며 “매 한 마리가 날아오면 내가 죄가 없음을 알라”고 했는데 정말로 매 한 마리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후에 그의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았던 공사가 가장 잘 된 공사임이 알려지자 사람들이 사당을 지어 주고 이들 부부의 넋을 위로했다.
남한산성은 워낙 거대해서 한 번에 둘러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산성 안에 조성된 역사 테마길(국왕의 길, 장수의 길, 옹성의 길, 산성의 길)을 참고삼아 구간별, 테마별로 탐방 계획을 세워보는 것도 좋다.
광주시 목현동에서 남한산성까지 12km 구간 숲길에는 조선시대 관원들의 군사정보 전달과 지방 선비들의 과것길을 따라 ‘한양삼십리 누리길’이 조성돼 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남한산성의 성곽길은 주봉인 청량산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치욕의 역사’는 역사책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남한산성 축조한 승려들 기거한 장경사, 망월사, 개원사
남한산성을 개축할 때 벽암(碧巖) 각성대사(覺性大師, 1575~1660)를 도총섭(都摠攝, 승려의 우두머리)에 명하고 전국 팔도의 승군을 동원했다.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해 축성 전부터 있던 망월사와 옥정사 외에 장경사, 개원사, 한흥사, 국청사, 천주사, 동림사, 동단사 등 7개의 절을 새로 지어 동원된 승군들을 머무르게 했다.
장경사는 인조 16년에 지어진 절로 대웅전, 진남루, 칠성각, 대방, 요사채, 종각 등이 있다.
망월사는 산성 축성 이전부터 있던 절로, 남한산성에서 가장 연대가 오래된 절이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있던 장어사를 허물고 그 안에 있던 불상과 금자 화엄경과 금솥 등을 옮겨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일제 강점기 때 모두 파괴되었고 현재의 망월사는 근래에 복원된 것이다. 망월사 대웅보전 옆에 서 있는 13층짜리 탑에는 인도의 인디라 간디 수상에게서 직접 받아 온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 장경사와 망월사 모두 동문 쪽에서 진입하는 것이 좋다.
조선 후기 광주부윤이 건립한 연못 섬 위의 ‘지수당’
남한산성 행궁사거리에서 동문 방향으로 가는 도로변에는 ‘지수당’(池水堂)이라는 정자가 있다. 차를 타고 지난다면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으니 행궁 관리사무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돌아보는 것이 좋다.
지수당은 연못 속에 유유히 떠 있는 듯하다. 네모난 모양의 연못 속, 작은 섬 위에 지어진 지수당은 무엇보다도 시원스러운 건물이 인상적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정자 건물이 매우 날렵하다.
정면에서 보면 정자 뒤로 연못이 있는 듯 보이나 실제론 연못 위에 있다. 건립 당시에는 세 개의 연못이 있었으나 한 개는 매립돼 논밭이 되었고, 두 개만 복원되었다. 연못이 지수당을 감싸고 있는 듯한 모양새인데 옆에서 보면 한글의 ‘ㄷ’자를 연상시킨다.
지수당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광주부윤 이세화(李世華 1630~1701)가 현종 13년(1672)에 지은 정자이다. 부윤은 지금으로 치면 시장이다. 고려시대 광주산성에서 벌어진 몽골군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광주부사(副使) 이세화(李世華, ?∼1238)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세화는 서인으로서 조선 숙종 15년(1689)에 계비인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정주로 유배를 갔다가 풀려났다. 인현왕후의 복위 후 세자 빈객(賓客, 정2품 관직, 스승)과 공조·형조·병조·예조 판서 등을 지냈다. 청백리로 선정되고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함경도 관찰사를 지낸 이유로 무산군 풍계면의 충렬사에 배향됐으며, 고향인 파주시 문산에 충신 정문(旌門)과 묘지가 세워졌다. 시호는 충숙, 호는 쌍백당(雙柏堂)이며 저서로 ‘쌍백당집’이 있다.
지수당 동쪽에 이세화의 공덕을 기리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앞면에는 ‘부윤 이세화의 청덕민 선정비’, 뒷면에는 ‘숭정후 87년 갑오년 3월 일립(崇禎後 八十七年 甲午年 三月日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지수당 건너편에 또 하나의 연못이 있다. 네모난 모양의 연못 안에 흙을 쌓아 만든 작은 섬에서 향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이곳에도 순조 4년(1804년) 김재찬(金載瓚)이 지은 ‘관어정(觀魚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관어정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석만이 세워져 있다.
지수당은 봄, 여름, 가을 어느 계절이나 아름답다. 눈 내린 하얀 겨울날 꽁꽁 얼어붙은 연못 위에서 푸르게 솟아 있는 향나무와 소나무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옛 선비의 곧은 기상을 떠올리게 된다.
물안개, 철새, 연꽃의 향연 … 경안천 습지생태공원
퇴촌면 정지리 경안천변 습지에 ‘경안천습지생태공원’이 조성돼 있다. 경안천 습지는 1973년 팔당댐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일대 농지와 저지대가 물에 잠기면서 형성되었다.
하얀 목책을 따라 2 km 이상 이어지는 수변 산책로에는 봄이면 버드나무, 왕벚나무, 감나무, 소나무 등이 우거지기 시작한다. 여름이면 연꽃 명소로 변신하고 가을에는 갈대 군락지들이 멋을 더한다. 산책로 중간중간에 설치된 철새 조망대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날아드는 새들을 관찰할 수도 있다. 경안천에 사는 새와 곤충, 자생식물 등이 궁금하다면 정성스럽게 준비된 자료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른 아침 경안천에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몽환적인 모습과 겨울철 눈 내리는 풍경은 가히 환상적이다. 겨울철에는 겨우살이를 위해 날아든 고니를 비롯한 철새들을 촬영하려는 사진가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경안천은 참으로 고요하다. 여름날 해질 무렵 경안천변에 나가 물새가 차올리는 물소리에 귀 기울여 봐도 좋을 만큼 말이다. 높은 산을 온 몸으로 품고도 넉넉하게 흘러가는 강기슭에서 잠시 눈물을 흘리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얻을 수 있다. 팍팍한 삶에 지친 마음에 휴식이 필요할 때, 넉넉한 자연의 품에서 힐링하고 싶을 때 계절과 상관없이 경안천생태공원은 따스한 안식처가 될 것이다.
공원 입구에 주차장과 화장실 및 탐방객을 위한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카페나 레스토랑 등 휴게시설은 없으니 음료나 돗자리 등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곤지암 소머리국밥거리 … 깊은 국물 자랑하는 40년 전통의 노포들 운집
‘소머리국밥’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곳이 곤지암이다. 삼도와 한양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광주, 특히 곤지암은 삼도 지방에서 올라오는 물산이나 과것길에 오른 선비들은 반드시 거쳐 가야 했던 길목이었다. 그 길목에 자연스럽게 하나둘 국밥집이 생겨 나중에는 주막거리가 됐다. 실제로 해동지도 광주부에는 곤지암이 곤지암 주막으로 표기돼 있을 정도로 국밥집이 많았다고 한다.
오늘날 ‘곤지암 소머리국밥거리’에는 10여 개의 국밥집들이 영업 중이다. 곤지암에 지금의 국밥거리가 생겨난 것은 1980년대 이후 곤지바위 일대에 최미자 국밥이 문을 열면서부터이다. 배연정 국밥, 최미자 국밥, 원조골목집국밥 등이 유명하다.
배연정 국밥은 홈쇼핑 진출과 해외 진출까지 모색했지만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는 모양새다. 식당 간판마다 ‘원조’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그만큼 맛에 자신감이 있다는 뜻일 거다. 국밥거리에 있는 식당들은 대부분 40년 전통을 자랑한다. 어느 식당을 들어서더라도 깊은 국물 맛과 쫄깃한 식감의 고기가 듬뿍 들어간 국밥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소머리국밥은 가마솥에 밤새 한우 사골을 우린 국물에 소머리 고기를 넣고 한 번 더 진하게 끓여 내는 전통적인 서민음식이다. 사용하는 고기의 부위나 조리시간 등에 따라 국밥의 맛이 달라진다. 고기의 누린내와 잡내를 제거하는 것이 맛의 관건으로 인삼이나 무를 넣기도 한다. 밤새 사골을 우려내고 기름기를 걷어내는 국밥은 정성이 없으면 만들 수 없는 음식이다. 쉬운 듯 보이지만 손이 많이 간다. 점점 입맛은 패스트푸드화되고 고깃값은 치솟는 요즘 국밥이 언제까지 서민의 음식으로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앞으로 힘든 국밥 장사를 하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다행히 아직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맛난 국밥을 먹을 수 있다.
뜨근한 곤지암 소머리국밥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면 곤지암의 유래가 되는 곤지바위와 ‘신립 장군의 묘’가 인근에 있으니 함께 둘러보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