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에 다니는 박모 씨(35)는 얼마 전 직장상사로부터 거의 30분간 정신교육을 받아야 했다. 불과 세 시간 전 회의 때 상사가 지시했던 자료 제출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주일 전에는 매일 사용하는 회사 업무사이트 아이디와 비번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아 한참을 헤매야 했다. 최 씨는 ‘설마 벌써부터 치매인가’라는 걱정에 인근 신경과 병원을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최근 사람 이름이나 얼굴이 갑자기 기억나지 않거나, 매일 쓰는 전화번호 또는 비밀번호를 잊어버리는 등의 증상을 겪어 정신과나 신경과를 찾는 젊은층이 적잖다. 이들은 ‘아버지가 치매이셨는데 혹시 유전일까’, ‘몇 년 전부터 회식이 잦아 술을 많이 마셔 건망증이 심해진 것 같다’며 전전긍긍하기 일쑤다.
젊은 나이인데도 기억력이 부쩍 나빠졌다면 ‘디지털 건망증’을 의심해볼 수 있다. 디지털 건망증이란 무의식적으로 디지털기기에 의존한 나머지 기억력과 계산 능력이 저하되고 각종 건망증 증세를 보이는 상태를 말한다. 뇌에 들어온 정보는 단기 기억으로 있다가 해마를 통해 대뇌 피질에 저장되면서 장기 기억으로 변한다. 하지만 저장되기 전 새로운 정보나 더 재미있는 정보가 들어오면 기존 정보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이때 몇 분 전에 본 내용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디지털 건망증이 발생하게 된다
아직 나이가 젊으면서 평소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장시간 사용하고 얼마 전부터 무엇인가를 갑자기 잃어버리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증상이 반복되면 ‘디지털치매(digital dementia)’를 의심해볼 수 있다. 디지털기억상실증(digital amnesia)으로도 불리는 디지털치매는 스마트폰 등 정보통신(IT) 전자기기의 과도한 사용과 의존으로 뇌기능이 손상돼 기억력 등이 눈에 띄게 저하되는 증상이다. 2013년 독일의 뇌신경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인 만프레드 슈피처(Manfred Spitzer)가 저서 ‘디지털치매(머리를 쓰지 않는 똑똑한 바보들)’에서 ‘디지털치매는 곧 정신적 추락’이라고 언급해 사회적 이슈가 됐다. 공식 질병으로 분류되진 않았지만 전화번호, 사람 이름 등에 대한 암기력이 떨어지고 간단한 계산조차 어려워져 직장 업무에 심각한 지장이 생길 수 있으며 차후 실제 치매 발생 위험을 높이는 요인으로 꼽힌다. 디지털치매는 문명의 이기가 주는 편리함에서부터 시작됐다. 스마트폰 등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이 스스로 기억하고, 생각하며, 고민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아도 바로 확인할 수 있고 대화 중 필요한 정보가 생겼을 땐 검색에서 찾으면 그만이다. 길이나 지명도 외울 필요 없이 앱으로 확인하면 된다. 결론적으로 정보와 지식을 기억하지 않고 디지털기기에 저장 혹은 즐겨찾기 해두는 셈이다. 이처럼 지식과 정보 자체보다는 이를 어떻게,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지에만 관심을 갖고 기억하는 것을 ‘구글 효과(Google effects)’라고 한다. 이런 경향은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 언어와 장비를 자유롭게 다루는 40세 미만의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그들은 디지털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 일상생활에서 디지털기기를 떼어 놓고는 삶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최정석 서울시 보라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스마트폰 사용으로 인해 지식과 정보가 뇌가 아닌 디지털기기에 저장되면 기억력을 관장하는 대뇌 해마의 부피가 감소하고 대뇌피질 두께가 얇아지면서 기억력이 감퇴될 가능성이 높다”며 “처음엔 단기기억이 먼저 떨어지고 점차 장기기억과 뇌의 전반적인 기능이 감소해 노년기 치매 발생을 앞당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정보가 너무 빠르게 뇌로 밀려 들어오는 것도 문제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면 손가락질 몇번 만으로 수많은 텍스트와 정보가 뇌로 들어오는데, 한정된 두뇌 용량에 들어오는 정보가 많으니 컴퓨터가 ‘랙(lack)’ 걸리듯 뇌도 과부하에 걸린다. 이전에 들어온 정보가 정리되지 않으면 그동안의 정보와 경험을 저장할 공간이 축소돼 기억을 저장하기가 어려워진다. 정신이 ‘깜박깜박’하고 좀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터넷은 인간의 뇌를 얇고 가볍게 만들다, 온라인에 쏟아지는 정보를 훑어보는 습관을 들여 호흡이 긴 글을 인내심 있게 읽거나 깊게 사고할 수 없게 뇌를 변형시킨다’는 세계적인 경영컨설턴트 니콜라스 카의 경고는 과학적 근거가 있는 셈이다. 만약 자신이 △외우는 번호가 회사번호와 집번호뿐이다 △애창곡 가사를 보지 않으면 노래를 부를 수 없다 △전날 먹은 메뉴가 생각나지 않는다 △자꾸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없으면 길을 찾아가지 못한다 △손글씨를 거의 쓰지 않는다 △처음 만났다고 생각한 사람이 사실은 만났던 경험이 있던 사람이다 △집 전화번호나 현관 비밀번호가 갑자기 떠오르지 않은 적이 있다 △아는 한자나 영어 단어가 기억나지 않은 적이 있다 △전체 대화의 80%를 문자나 메신저로 한다 △평소 말할 때 ‘아 그거 있잖아, 그거’라며 대명사만 머릿 속에 맴돌고 뚜렷한 대상을 못 떠올린다 중 2개 이상에 해당되면 디지털치매를 의심해보는 게 좋다. 디지털치매를 예방 및 개선하려면 전자기기에 대한 의존도부터 줄여야 한다. 세계 각국에선 스마트폰 사용을 줄여 여유를 찾자는 ‘디지털 디톡스(Digital Detox)’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디톡스는 해독, 인체 내 축적된 독소를 빼낸다는 의미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일상생활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디지털 디톡스 5가지 방법으로 △침대로 스마트폰 갖고 가지 않기 △이메일계정 수시 확인 금지 및 로그아웃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모바일 메신저 ‘알림’ 기능 끄기 △스마트폰 및 컴퓨터 화면 대신 종이책 보기 △온라인 접속 시간 통제하기 등을 제안하고 있다. 중국에선 전국 곳곳에 디지털중독 치료캠프가 생겨나고 있다. 캠프 참가 비용이 월 1만위안(약 169만원)에 달하지만 호응이 크다. 프랑스는 14세 이하 어린이의 스마트폰 사용을 제한하는 등 정부가 스마트폰 디톡스에 적극 나서고 있다. 최정석 교수는 “스마트폰 등 디지털기기를 과도하게 사용하고, 특히 여러 기기를 동시에 사용하는 경향이 클수록 뇌의 구조적 변화로 기억력, 인지기능, 감정조절기능 등이 떨어질 수 있다”며 “하루 30분 정도 야외에 나가 가볍게 달리거나 걸으면 뇌 신경세포의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고 심리적 안정감을 줘 디지털치매 증상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어 “간단한 계산은 암산으로 하고, 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보는 습관을 들이면 치매 예방에 효과적”이라고 강조했다.
김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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