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사람들은 ‘도갑사(道岬寺)에서 보는 월출산(月出山)은 밋밋하고 강진 쪽에서 바라보면 부드러우면서도 아름답고 영암 읍내에서 보면 웅장하다.’라고 한대요.”
도갑사 템플스테이에서 쪽잠을 자고 이른 아침에 만난 도갑사 종무소 직원이 잘 잤냐는 인사말과 함께 건넨 말이다. 도갑사에서 바라본 월출산이 하도 잘 생기고 웅장하여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느라 벌써 목이 뻣뻣했지만 다시 한번 월출산을 바라보게 된다. 전날 늦은 오후 도갑사를 찾아 영암 땅을 밟으면서 느꼈던 첫 감흥이 지금도 생생하다.
제주 사람들이 한라산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들판에서 일하다 한라산이 잘 있나 한번 쳐다보고 하루를 마감하듯, 전남 영암(靈巖) 사람들도 월출산을 보면서 그리하는 듯하다. 그리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리할 수밖에 없다. 영암 어디를 가건 우뚝 솟아 있으니 말이다. ‘영암’이라는 지명이 월출산에서 유래했으니 영암이 월출산이고, 월출산이 영암이 아닐는지.
월출산은 서해에 접해 있어 달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는 데서 유래했다. 달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월출산이 유달리 인상적인 것은 흙산으로 이루어진 남도의 안온하고 부드러운 산들과 달리 얼핏 보기에도 태반이 암반으로 이루어진 뾰족뾰족한 바위산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일부러 흙을 다 걷어내 버린 것 같이 흙 속의 바위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모습은 강인해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남도의 척박하고 절박한 현실과 닮아서 안쓰럽기도 하다. 그런 감정은 동백보다도 붉은 영암의 흙을 보면서도 드는 감정이다.
신라 때는 월나산(月奈山)이라 불렸고 고려 때는 월생산(月生山)이라 불리기도 한 월출산은 정상의 천왕봉을 비롯해 구정봉, 향로봉, 장군봉, 매봉, 주지봉, 죽순봉 등 삐죽삐죽한 봉우리들이 하늘로 솟았다. 그 모양새가 하도 기이하고 절묘하여 종종 설악산과 비교되고 일찍부터 작은 금강산이라 불렸다. 고려 명종조의 문인 김극기(金克己)는 월출산에 대해 “서쪽 봉우리 높고 높아 우뚝 솟은 모양인데 사나운 범이 노하여 걸터 앉았고 물소가 달려가는 양하여라. 나그네의 흥이 기이함을 탐내어 험난함을 잊고 뱀 서리듯 몸을 굽히면서도 피로한 줄 모르겠네. 신령스럽고 기이한 것 어찌 근원을 찾을 수 있으랴” 라고 적었다.
영암이라는 명칭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월출산 구정봉 아래 동석(動石, 흔들바위)이 있다. 이 돌의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된다. 서쪽으로는 산마루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다. 그 무게는 비록 천 백인이 동원해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사람이 움직이면 떨어뜨릴 것 같으면서도 떨어뜨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영암이라 칭하고 군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1973년 1월 29일에 도립공원, 1988년 6월 11일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월출산은 경관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난대와 온대가 공존하는 생태학적으로도 보존가치가 높은 식생을 보유하고 있다. 산림청 선정 한국의 100대 명산이다.
월출산은 영암군과 강진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영암은 북으로는 나주시와 화순군, 서로는 무안반도에서 뻗어나온 무안군과 목포시, 남서쪽으로는 해남군, 남동쪽으로는 강진군 및 장흥군과 인접하고 있다. 영암군은 잠시 나주부에 속하기도 했다. 월출산은 호남정맥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지만 기실 백두대간의 한 맥을 이루고 있다고 말하기 무색할 정도로 독립된 산군을 이루고 있다.
월출산은 동서남북 어느 쪽에서도 이채로운 흥취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월출산 등산로의 대부분은 상수원 보호구역과 자연휴식년제로 묶여 있어 천황사에서 시루봉을 거쳐 천황봉으로 오르는 루트, 도갑사에서 미왕재-향로봉-천황봉으로 이어지는 코스, 강진에서 금릉경포대계곡을 통해 오르는 길만 산행이 가능하다.
가장 일반적인 산행로는 영암읍 개신리 천황사다. 월출산의 명물 구름다리는 시루봉과 매봉 사이에 걸려있다. 매봉에 올라서면 길은 연실봉, 사자봉을 지나 주릉(主綾)에 올라서게 된다. 여기서 기암괴석으로 가득찬 월출산의 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지막 관문인 통천문을 빠져나가면 천황봉이 바로 눈앞이다. 여기서 천황봉까지는 300m에 불과하다. 계곡 코스로는 바람골을 따라 오르면 20분 만에 바람폭포와 만난다. 쇠난간을 붙잡고 바람폭포 위로 조심스럽게 오르면 무인 대피소를 지나 계곡 따라 계속 오르면 천황봉이다.
밤새 몰아치던 바람이 잦아든 이른 아침 산사의 풍경은 더없이 맑고 안온하다. 역시 산사의 그윽하고 깊은 정취를 느끼려면 이른 아침과 늦은 오후가 제격이다. 비구름이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월출산 봉우리 턱 밑에 하얀 운해가 연기처럼 아스라이 퍼져 나가는 모습이 ‘전설의 고향’ 속 신선이 머무는 곳 같다.
신선의 장난인지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가 요망스럽기 그지없다. 금방 해가 났다 싶으면 어느새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비를 뿌린다. 빗줄기는 가늘어졌다 거세졌다 하면서 농간을 부린다. 세찬 빗줄기를 피하느라 소동을 벌이는 중에 다시 말간 해가 얼굴을 디민다. 날씨가 이렇게 변덕스러울 수가 있나. 나그네의 발길을 잡아 두려는 월출산의 계략인지도 모르겠다. 그 탓에 도갑사에서 계획했던 시간보다 훨씬 머무르게 되었으니 말이다.
‘호랑이가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산자락 아래’ 자리 잡은 군서면 도갑리의 도갑사는 통일 신라시대의 4대 고승으로 추앙받는 영암 출신의 도선국사가 헌강왕 6년(877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그 후 역시 영암 출신으로 도갑사에서 출가한 수미왕사가 조선 세조 2년에 중창했다. 정유재란과 6.25전쟁 통에 대부분이 파괴돼 복원 불사를 하였으나 1977년 한 신도의 불찰로 인한 화재로 명부전과 해탈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불에 타버렸다. 현재 전각들은 화재 이후 새로 지었다. 이 때문에 연혁은 오래됐으나 고졸한 멋은 느껴지지 않는다. 월출산 산신령의 가호인지 부처님의 불력인지 다행히 국보 50호로 지정된 해탈문과 보물 1433호인 5층석탑 등이 해를 입지 않았다.
도갑사 해탈문은 그야말로 고졸하다. 10년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어 반가웠다. 정면에는 ‘월출산일주문’, 후면에는 ‘국중제일선종대찰’이라는 현판이 현판이 걸려 있다. 도갑사 해탈문은 1960년 해체 복원할 때 나온 상량문에 따르면 조선 성종 4년에 다시 세웠다. 중앙칸은 통로가 되고, 좌우에는 사천왕상을 안치했다. 배흘림 기둥을 사용하였고 주심포 양식과 다포식 양식이 혼합돼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나타나는 건축양식으로 유사한 예로 경북 영주 부석사 조사당을 꼽을 수 있다. 전문적인 건축학적 의미와는 별도로 도갑사 해탈문은 보면 볼수록 단출하고 소박한 멋이 묻어나 오래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해탈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절 마당과 5층석탑을 비롯해 대웅보전, 명부전 등의 전각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압권은 역시나 뒤편에 호위무사처럼 버티고 있는 월출산이다. 10월말~11월초 영암에서는 국화축제가 벌어지는 데 도갑사에도 국화가 가득하다. 탐스러운 국화로 장식된 ‘도갑사 5층석탑’도 여느 때보다 화사하게 보인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이 탑은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몸체들이 낮아져서 안정감이 느껴진다. 석가모니 부처와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을 모신 대웅보전과 도선국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조사전 등이 있다.
도갑사의 다른 문화재들은 내키지 않아도 다리품을 팔아야 볼 수 있다. 대웅전을 지나 숲길로 접어들면 홀연 폭포가 나타난다. 폭포라고 하기에는 조금 민망한 수준이지만 용수폭포가 자리한다. 이무기가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용수폭포에서 미륵전으로 가는 돌다리 근처는 타오르는 불길처럼 붉은 단풍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단풍 구경에 한 세월 걸려 돌다리를 건너면 돌계단으로 이어지는 미륵전이 나온다. 이곳에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이 모셔져 있다. 살짝 문을 여니 몸체와 광배(光背)가 하나의 돌로 조각된 돌부처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앉아 있다. 열린 문틈으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부처의 얼굴을 환하게 비춘다. 응시하는 순간 비좁게 느껴졌던 미륵전 법당이 갑자기 천하가 굽어보이는 사방이 탁 트인 월출산 어느 산마루로 변하는 신기한 느낌에 빠지게 된다.
미륵전에서 다시 숲길로 조금 더 올라가면 부도전과 도갑사 도선수미비(보물 1395호)가 나온다. 1635년에 건립된 이 석비는 조성 기간만 18년이나 걸렸다. 높이가 517cm에 달하며 석재를 전북 익산시 여산면에서 가져왔다. 비의 규모와 표현 양식에서 다른 것들과 차별성을 지닌다. 여의주를 문 거북이 고개를 왼쪽으로 치켜 든 자세가 이채롭다. 비석(4.8m) 윗부분(이수부, 螭首部)의 용 조각이 정교하다. 비석의 하단인 귀부(龜趺)는 귀갑문(龜甲文) 대신 평행 사선문으로 되어 있고, 비신의 좌우 양옆에 조각된 운룡문(雲龍文)은 넘치는 기상과 율동감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당대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또 대부분 비들이 한 사람의 공적을 기록한 것에 비해 도선수미비는 명칭처럼 도선과 수미선사를 동시에 다루고 있는 점 역시 매우 특이하다. 비문이 세 개의 독립된 부분으로 구성돼 있고 천자(穿字)와 각자(刻字)를 한 사람도 서로 다른 이유는 건립부터 완성까지 걸린 기간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탑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도 도선수미비 앞에서는 감탄을 금할 수 없을 수 정도로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다. 조사전 옆에 있는 수미왕사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52호)와 비교해 보면 좋을 것이다.
도선수미비부터 월출산 생태탐방로가 시작된다. 나무데크를 따라 천천히 월출산의 속살로 들어가는 길은 마치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원시림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