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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투어
물따라 길따라 굽이굽이 천년 … 나주읍성 성곽따라 느릿느릿 타임머신 여행
  • 변영숙 여행작가
  • 등록 2021-11-12 16:27:16
  • 수정 2021-11-17 15: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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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건의 후백제 흡수에 기여 … 4대 성문 복원 … 향교, 동헌, 객사로 이어져 … 배와 쌀, 곰탕·홍어·장어 3대 별미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에서 유래했다. 나주는 흔히들 ‘천년 목사(牧使)의 고을’이라고 부른다. 지방 행정 단위의 하나인 목(牧)은 고려시대에 12곳, 조선시대에 20곳이다. 고려 성종 2년에(983년) 전국에 12목을 두었는데 전라도에는 전주와 나주밖에 없었다. 나주목을 다스리던 직책이 나주목사로 지금으로 치면 도지사와 군수의 중간쯤되는 벼슬이다. 


남도 여행은 묘하게 이국적인 분위기가 풍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역을 감싸고 있는 높고 낮은 산들 대신에 막막하다 싶을 만큼 광대한 들판과 논들이 줄곧 이어지기 때문이다.  


광주를 지나 나주로 향하는 길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로를 따라 펼쳐지는 나주시의 모습은 영락없는 대평원을 연상시킨다. 마치 꽁꽁 싸매고 있던 보자기가 일순 확 풀어진 것처럼 어디 하나 굴곡도 없는 편평한 땅이 펼쳐지는 것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에서 썰렁함이 묻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나주평야의 풍요로움을 덮지는 못했다. 이상하게도 텅 빈 논들조차도 황금빛으로 빛나 보이는 곳이 나주땅이다. 


나주는 우리나라의 평야지대 중에서도 중심지로 꼽히는 곳이다. 벼농사는 물론이고 과수농업과 원예농업도 함께 발달했다. 호남 제일의 쌀로 친다는 나주쌀과 영산강변의 비옥한 땅과 남도의 풍요로운 햇살, 잔잔한 바람이 기른 나주배를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주는 동쪽으로는 화순군, 서쪽으로는 무안군과 함평군, 남쪽으로는 영암군, 북쪽으로는 광주 광산구와 맞닿아 있다. 과거 호남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중심지였다. 


나주의 서북쪽에는 나주의 진산이라 불리는 금성산(錦城山)이 위치해 있고 남쪽으로는 영산강이 흐른다. 호남정맥 입암산(笠岩山, 641m, 장성과 정읍의 경계)에서 시작해 방장산(고창과 장성의 경계), 금수산을 거쳐 영광 태청산(太淸山, 영광과 장성의 경계)에서 곁가지를 타고 내려오다가 우뚝 솟은 산이 금성산이다. 


나주를 관통하는 영산강은 길이 139km, 유역 면적 2798㎢의 강으로 전남 담양군 월산면 용흥리 병풍산 자락에서 발원해 장성군, 광주직할시, 나주, 함평, 무안, 영암 등을 돌아 서해로 흘러든다. 


영산도 사람들이 뭍에 개척한 영산포 따라 강이름도 영산강


영산강은 원래는 통일신라 때 나주의 옛 이름인 금성(錦城)을 따서 ‘금천’ 또는 ‘감강’이라 불렸으며 나루터는 금강진(錦江津) 또는 하항(河港), 남포(南浦) 등으로 불렸다. 그러다 전남 신안군 영산도(永山島, 흑산도의 부속섬) 사람들이 왜구를 피해 나주 근처의 포구에 개척한 영산포의 이름을 따서 영산강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나주는 백제 때는  발라군(發羅郡) 또는 통의(通義)라 불렸고 신라 때는 금성이라 했다. 원래는 후백제의 땅이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이 함락한 뒤 지금의 이름인 나주로 고쳤다. 왕건은 나주의 지방 토호였던 오다련(吳多憐, 856~944년, 나주오씨의 시조)의 딸과 정략결혼해 낳은 아들이 왕건의 뒤를 이은 혜종이다. 고려 현종 때 목이 됐다. 영산포읍과 나주읍은 합병해 1981년 금성시가 됐다가 1986년 나주시로 환원됐다. 


고려 말 학자로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기여한 혁명가 정도전은 고려왕조에 반발하다 나주 회진면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정도전은 자신의 여러 저서에서 나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유부로서’에서 나주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우리 태조(왕건)가 삼한을 평정할 적에 온 나라가 차례차례 평정됐으나 오직 후백제만이 그 지역이 험하고 멀어 믿고 복종하지 않았는데 나주 사람은 반역과 순종을 밝히 알아 솔선해서 귀순했다.”


태조가 후백제를 취하는 데에 나주 사람의 힘이 컸다 하겠다. 왕건과의 인연으로 1896년 전라남도의 관찰부가 광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900여 년에 걸쳐 나주는 전라남도 일원을 호령했다.


정도전은 또 ‘소재동기’에서는 “금성산은 단중하고 기이해 동북에 웅거했으니 나주의 진산”이라며 “사람들이 순박해 다른 생각이 없이 농업에 힘씀을 업으로 한다”고 적었다. 정도전이 유배를 왔던 회진현(會津縣) 소재동(消災洞)은 지금의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백동마을이다. 그러나 정도전은 권문세가의 횡포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비참한 삶을 목도하면서 농민을 향한 애정을 싹틔우고 신왕조 개국의 의지를 다지게 된다.   


조선 세종~성종 때의 문신 이예(李芮 1419~1480)는 “가게를 벌여 놓고 물건을 사고판다. 백성들의 풍속이 순박하다”라고 적었다. ‘택리지’에는 “나주는 노령 아래 있는 한 도회인데 북쪽에는 금성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영산강에 임했다. 고을 관아의 판세가 한양과 흡사해 예부터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이 많다”고 기록돼 있다. 


같은 시대의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동국여지승람에 “나주는 전라도에서 가장 커서 땅이 넓고 만물이 번성한다. 또한 벼가 많이 나고 바닷가라서 물산이 풍부해 전라도의 조세가 모이는 곳이라 상인들이 이곳저곳에서 몰려 든다”라고 적었다. 


이처럼 기름지고 넓은 평야와 영산강을 끼고 있는 나주는 예부터 문평, 함평 등 이웃 고을의 평야와 바다에서 오는 물자 교역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근현대를 거치며 발전 동력을 잃고 낙후된 소도시에 머물러 있었다. 21세기 들어 나주는 혁신도시의 기치를 앞세워 변화와 도약을 모색하는 동시에 과거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고려시대에 축조, 조선시대에 완성한 나주읍성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나주’에서 가장 먼저 들러볼 것은 성북동과 교동 일대의 나주읍성과 사대문이다. 필자가 기억하는 나주의 모습은 20년 전 옹색한 시골 백반식당에서 먹었던 나주곰탕이 전부였다. 그 기억 속에는 호남의 중심지이니 역사와 문화니 하는 개념은 일절 없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비로소 나주에 대한 편견을 씻어내고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었다. 


읍성 일대에는 사대문과 향교, 금성관 등 과거 나주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유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거나 복원돼 있다. 성곽을 따라 느릿느릿 걷다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나주로 시간이동을 한 듯한 착각 속에 빠져 들게 된다. 읍성과 향교 등을 복원한 도시는 많지만 나주만큼 옛 분위기마저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은 드물다. 


나주읍성의 동문인 동점문. 변영숙 제공

나주읍성은 고려시대부터 축조하기 시작해 조선시대 세조 3년(1457)에 성을 확장했고, 임진왜란 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했다. 둘레가 약 3.7km, 면적은 약 30만평에 달하며 동서남북에 동점문(東漸門), 영금문(暎錦門), 남고문(南顧門), 북망문(北望門) 등 네 개의 성문이 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두 훼철됐으나 2000년대에 들어 복원했다. 읍성의 주 출입구인 남고문이 1993년 가장 먼저 복원됐고 2005년에 추가 보수됐다. 동문인 동점문은 삼봉 정도전의 흔적이 깃든 곳으로 2006년 복원됐다. 


임금님이 있는 북쪽을 바라본다는 북망문은 2018년 가장 늦게 회복됐다. 나주향교, 사직단 등이 있는 서쪽으로 나갈 때 사용했던 서성문은 동학농민혁명 때 동학군이 서성벽을 넘지 못하고 전멸했다는 사연을 담고 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이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53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했으나 나주와 남원, 운봉 세 곳은 집강소 설치를 반대했다. 곧바로 남원은 김개남 부대가, 운봉은 김봉득이 내려가 점령했지만 나주는 끝내 점령에 실패하고 만다. 1894년 음력 7월 1일 나주 접주 오권선과 30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끈 태인 접주 최경선이 함께 나주성을 공격했으나 나주성을 손에 넣지 못하고 퇴각했다. 


같은 해 음력 8월 13일 전봉준과 소수의 휘하 부하들이 영금문(서성문)으로 찾아와 나주목사 민종렬(閔種烈)에게 집강소 설치와 폐정 개혁안 단행을 요구했으나 민종렬이 제안을 거부하면서 협상은 결렬됐다. 


양반과 부호 세력 및 향리들로 조직된 민보군은 돌아가는 전봉준 일행을 죽이려 했다. 이때 전봉준은 자신과 부하가 입었던 옷을 벗어서 주며 옷의 세탁을 부탁하고 영암을 돌아보고 오겠으니 그때 돌려달라고 한다. 민보군은 그때 죽여도 늦지 않다고 판단해 전봉준 일행을 놓아주었으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동학농민혁명은 진압됐고 전봉준은 전북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避老里)에서 잡혀 운명의 장난처럼 나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됐다. 


영금문 성벽이 복원돼 있어 성벽을 따라 천천히 걸어볼 수 있다. 성벽 끝까지 걸어가면 보호수와 포토존이 설치돼 있어 예쁜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다. 


금계동의 나주목사내아(琴鶴軒)은 목사와 가족들이 기거하고 집무를 보던 곳이다. ‘ㄷ’자 구조로 단출하고도 아름답다. 방에 놓인 침구와 가구들은 옛집에 걸맞게 고풍스럽다. 넓은 대청마루는 담소를 나누기에도 좋다. 여기서 하룻밤 묵는 일도 추억에 남을 만하다. 


일년에 딱 2번 개방하는 나주향교 외삼문과 내삼문


서성문에서 나지막한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이내 나주향교(금계동)가 나온다. 돌담 너머로 은행나무잎이 노랗게 물들어가고 낙엽들이 수북하게 쌓인 골목길에는 가을 정취가 가득하다. 나주향교의 정문인 외삼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옆쪽에 난 협문을 통해 출입할 수 있다. 향교지기의 말을 따르면 나주향교의 외삼문과 내삼문은 일 년에 딱 2번 봄가을에 지내는 석전대제 때에만 개방된다고 한다. 


나주향교는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의 한 자락인 장원봉이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 금성산의 기운을 흠뻑 받는 터에 위치하고 있다. 향교 자리에 고려시대에는 큰 절이 있었다고도 하고, 파주 염씨가 살던 집터였다고도 전해진다. 여느 고을과 마찬가지로 서성문 밖 향교 일대는 교동이라 불렸다. 


나주향교 명륜당과 그 앞의 수령 500년된 비자나무. 변영숙 제공

나주향교는 일단 규모면에서 압도적이다.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500년 이상된 비자나무와 은행나무들이 더하는 연륜이 남다르다. 강릉향교, 장수향교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향교에 속하는 나주향교의 정확한 건립 시기는 전하지 않으나 고려 성종 6년(987년) 8월에 전국 12목에 향교를 설치할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중수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부분의 향교가 높은 언덕이나 경사진 곳에 전학후묘 양식으로 세워진 것과 달리 나주향교는 평지에 전묘후학 양식으로 지어졌다. 어쨌든 협문을 통해 향교로 들어서면 먼저 명륜당과 마주하게 되는 것은 다른 향교들과 같다. 


학문공간은 명륜당 및 기숙사 건물인 동재와 서재로 구성돼 있다. 동재 옆으로 세 개의 협문이 있어 교직사(校直舍 또는 庫直舍), 충효관, 서책을 보관하는 보전각으로 이어진다. 또 하나 협문은 향교 밖으로 나 있는데 문밖에는 여러 개의 비석과 사마재(司馬齋) 건물이 있다. 오늘날 향교 출입문으로 이용되는 문이 바로 이 협문이다. 


명륜당과 대성전 사이에 난 협문은 평소에는 굳게 닫혀 있어 향교지기의 허가가 있어야 출입이 가능하다.  대성전은 중국의 4성과 송조4현과 우리나라 18현 등 모두 27위의 위패를 모신 공간이다. 규모가 웅장하고 건축 양식이 뛰어나 조선 후기 향교 건축을 대표하며 보물 제394호로 지정돼 있다. 


대성전의 벽흙은 공자의 고향에서 가져온 것이라 전하며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성균관 건물을 다시 지을 때 나주향교의 대성전을 참조해 지었다고 한다. 대성전으로 오르는 양쪽의 계단 소맷돌에 새겨진 용머리 문양과 주춧돌에 새겨진 복련(覆蓮 연꽃이 뒤집어진 모양) 무늬 등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명륜당 앞마당에는 500년 된 비자나무가, 대성전 앞뜰에는 6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서 있다. 과거 약이 귀했던 시절 구충제 역할을 하는 비자나무 열매는 배앓이를 하는 유생들의 약재로 사용됐고 지금도 석전대제를 지낼 때 제수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은행나무는 이성계가 심었다고 전한다. 나주향교에 연지(蓮池)가 있는 점도 특이하다. 금성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가두어 연못을 만들고 화재 시에는 소화수로도 사용됐다. 


핫플레이스 난파정과 카페 ‘마중 3917’ 


나주향교 옆 일제시대 적산가옥을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며내 랜드마크가 된 ‘마중3917’ 카페.

향교와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중3917’이라는 복합문화공간 겸 카페가 있다. 적산가옥을 개조해 만든 곳으로 카페, 게스트하우스, 공연장, 야외테라스 등 다양한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최근 드라마 ‘알고 있지만’과 항일 음악가 정율성(鄭律成 1914~1976, 중국 및 북한에서 활동하다 1950년 중국에 귀화)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경계인’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난파정의 가을 풍경

아름다운 한옥 건물과 특색 있게 꾸며진 공간으로 최근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는 곳이다. 나주 특산물인 나주배로 만든 음료와 쿠키도 인기다. 카페 마중에서 언덕 쪽으로 올라가면 ‘난파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조선 중기부터 금성산 장원봉 끝자락 언덕에 위치한 난파정은 나주에서 동학농민군을 민종렬과 함께 진압하고 그 공으로 해남군수에 올랐으며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나 을미의병을 일으킨 난파 정석진(蘭坡 鄭夕珍 1851~1896)이 자주 사용하던 정자다. 큰아들 정우찬이 1915년 재건축했다. 


5.18민주화 운동 중심지이기도 한 나주객사 금성관


나주향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옛 나주목의 객사인 금성관(錦城館)이 복원돼 있다. 객사는 고려~조선 시대의 일종의 지방 궁실로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 또는 궐패를 모셔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를 올리고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들이 유숙하던 곳이다. 1470년 나주목사 이유인(李有仁 ?~1492)이 건립했다. 


객관 남쪽에 위치한 금성관의 정문 망화루(望華樓, 外三門에 해당) 앞 광장은 나주인들의 의향(義鄕) 정신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임진왜란 당시 김천일 의병장의 출병식이 있었고, 영조 때에는 나주괘서사건, 구한말 단발령의거, 일제 강점기 항일학생운동 등이 모두 망화루 앞에서 있었다. 


5.18민주화 운동 당시에는 나주군청이 있던 곳으로 전남 지역에서 모여든 시위대의 집결지로 민주화운동의 중심지였다. 금성관 좌측에는 나주 관아 정문 정수루(正綏樓)가 서 있다. 1603년(선조 36년)에 나주목사로 부임한 우복룡이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망화루 앞 나주 곰탕거리 40년의 역사


나주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음식이 나주배와 나주곰탕이다. 추운 겨울로 접어드는 요즘엔 뜨끈한 나주곰탕 한 그릇이 절로 생각난다. 망화루 앞 나주곰탕거리에는 하얀집, 남평할매집, 노안집 등 원조집이 즐비하다. 


삼시 세끼를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이 나주 곰탕이다.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른 곰탕 맛이 일품이다. 따로 날을 잡아 곰탕 투어를 해도 좋다. 어느 식당이건 특별한 맛이 있으니 선택에 고민할 필요도 없다.


 나주곰탕의 시작은 약 40년 전인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시장이 성행했던 나주에서 소를 잡을 때 부산물로 나오는 머리고기, 뼈, 내장 등을 넣고 푹 고은 장터국밥이 나주 곰탕의 시작이다. 소뼈를 고아낸 물에 소고기 양지와 내장 등을 넣고 푹 고아낸 맑은 국물에 윤기가 잘잘 흐르는 쌀밥이 말아서 나오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면 모락모락 김이 나는 대형 가마솥 단지만 봐도 벌써 침이 꿀꺽 넘어간다. 나주에 가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나주곰탕은 먹어 봐야 한다. 식당 앞에는 나주곰탕 한 그릇을 먹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대형버스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나주의 삼미는 최근 나주곰탕, 홍어, 장어로 바뀌었다. 흑산도에서 건너와 영산포를 개척한 사람들은 홍어를 싣고 나주에 도착했을 땐 홍어가 삭혀져 있었다. 흑산도에서는 회로 홍어를 먹었지만 버리기가 아까워 삭힌 홍어를 먹기 시작했다. 삭혀도 부패하지 않는 생선은 홍어뿐이다. 삭힌 홍어는 암모니아 냄새가 코감기에 걸린 사람의 코를 뚫어줄 정도로 강하다. 이를 즐길 줄 안다면 삭힌 회뿐만 아니라 홍어애나 홍어전, 홍어튀김에도 도전해볼 만하다. 이렇게 삭힌 홍어는 영상포를 상징하는 별미로 자리잡아 ‘홍어의 거리’가 조성됐고 새로운 랜드마크가 됐다. 


옛날 영산강 하굿둑이 들어서기 전에는 구진포에 조수와 민물이 섞이면서 장어가 많이 잡혔고 맛있기로 유명했다. 다시면 가운리와 동강면 수문리 일대에는 장어거리가 들어 서 있다. 50년 전 국내서 장어구이를 상품화해서 처음 알린 곳이 여기다. 민물장어를 깨끗이 씻어 뼈와 살을 발라내고, 추려낸 뼈와 머리를 고아낸 물에 갖가지 양념을 넣고 양념국을 만든다. 장어살에 끓여놓은 양념국을 약 10회 반복해 묻혀가면서 약한 숯불에 구워내 얇게 썬 생강채와 곁들여 내면 구진포 장어구이가 완성된다. 


1970~80년대 거리 풍경 고스란히 구도심의 정감


뱃속이 든든하면 마음도 여유로워진다. 소화도 시킬 겸 천천히 읍성을 거닐어 보자.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옛 읍성의 느낌이 고스란히 살아나는 듯하다. 금성관, 망화루, 향교 등에 은은한 조명이 밝혀지고 거리는 조용해진다. 70~80년대 거리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구시가지 산책도 해 볼만하다.


현재 도시재생 문화센터로 활용되고 있는 옛 나주정미소, 지금은 병원이 된 일제강점기에 수탈 목적으로 만들어진 ‘금남금융협동조합’ 건물 등도 만나볼 수 있다. 나주 정미소는 호남 최초의 정미소로 나주에서 생산된 쌀을 정미하는 대표적인 정미소이자 정부양곡창고였다. 나주 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이 모여 회의를 했던 항일정신이 숨 쉬는 근대산업유산이기도 하다. 


현재 읍성 일대는 대대적인 나주목 관아 복원 및 정비 계획에 따라 공사가 진행 중이다. 나주목 동헌, 나주목 향청 등이 복원되고 천년공원 등이 조성될 예정이다. 곰탕집 한 곳도 조만간 인근의 다른 곳으로 이전할 예정이다. 옛 거리의 향취를 느끼고 싶다면 나주 여행을 서둘러야 한다.

나주시 교동 나주천의 정겨운 거리. 변영숙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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