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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투어
사도세자의 恨, 정조의 孝 그윽한 화성 ‘융건릉’ … 원찰 용주사
  • 변영숙 여행작가
  • 등록 2021-11-04 02:33:37
  • 수정 2021-11-04 02:5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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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 풍경이 아름다운 효행 기행 … 정조가 송충이 씹어먹은 사연은?

화성의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융건릉과 용주사를 꼽을 수 있다. 융릉(隆陵)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합장묘이고, 건릉(健陵)은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이다. 합쳐서 융건릉이라 부르며 화성시 안녕동과 화산동에 나란히 붙어 있다. 


내밀하고 지엄한 왕실 공간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왕릉은 조성부터 관리까지 철저하고 엄격한 규율과 법도에 따라 이뤄져왔다. 지금이야 편안하게 관람하러 다니지만 조선 왕조 500년간 일반인의 출입은 엄격하게 통제됐다.


조선왕릉은 국왕과 왕비 등 왕실의 무덤은 ‘궁궐에서 100리 안에 두어야 한다’는 왕실 규범집 <국조오례의>의 규정에 따라 조성됐다. 오늘날 조선왕릉들이 서울의 외곽지역인 고양, 남양주, 구리, 화성 등 경기도 일대에 분포돼 있는 이유다. 다만 폐위돼 유배지에서 죽음을 당한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만 예외로 강원도 영월에 있다.


현존하는 조선왕릉은 모두 42기로 태조 이성계의 원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능인 제릉(齊陵)과 정종과 정인왕후의 능인 후릉(厚陵) 2기가 북한 땅 개성에 있고, 나머지 40기는 모두 남한 땅에 있다. 40기는 일괄적으로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500년간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됐던 덕에 조선왕릉은 어디라 할 것 없이 주변의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오랜 세월이 빚은 명품 숲에 둘러싸여 있다. 울창한 숲과 붉은 홍살문과 정자각과 재실 같은 전통적인 목조 건축물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한편의 사극에서 으레 보는 풍경을 연출한다. 가을철엔 단풍 여행 코스로 조선왕릉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문화재청은 해마다 가을이 되면 통제되고 있던 왕릉 숲길을 한시적으로 개방하고 있어 조선왕릉의 명품 숲길을 탐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올해도 어김없이 10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조선왕릉 숲길 9개소가 개방된다. 개방되는 숲에는 화성 융릉과 건릉 숲길도 포함돼 있다.


정조의 효심 덕분에 사도묘→수은묘→영우원→현륭원→융릉으로 격상 


융릉에서 전주이씨 종친들이 사도세자로 알려진 장조의 제향을 지내고 있다.

융건릉 매표소를 지나 능역으로 들어서면 두 개의 갈림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가면 융릉이고 왼쪽으로 가면 건릉이다. 10월 말 융건릉 숲은 이미 가을빛이 완연하다. 누런빛이 감도는 소나무와 전나무 숲길을 따라 융릉으로 향한다. 숲속에는 상수리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들이 그대로 수북하게 쌓여 있어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긴다. 숲속 벤치에서 도란 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시민들의 모습에서도 고즈넉함이 묻어나고 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묻혀 있는 융릉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려면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한 맺힌 그리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가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나는 것도 억울한데, 눈앞에서 뒤주에 갇혀 죽었으니 그 한이 오죽했으랴.


영조는 1762년 아들을 추도한다며 사도묘(思悼墓)라고 했다가 자신의 허물을 자인하는 느낌이 들었는지 1764년 수은묘(垂恩墓)로 바꿨다.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는 제일 먼저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추상하고, 경기도 양주 배봉산(拜峯山, 현 서울시 동대문구 서울시립대 뒷산)에 있던 아버지의 수은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개칭하고 아버지를 모신 사당인 수은묘(垂恩廟)을 경모궁(景慕宮)으로 격상했다. 경모궁은 지금의 대학로(연건동) 서울대 의대 교내에 있다. 


참고로 묘(墓)는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을 모신 무덤을 말한다. 반면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가 묻힌 곳이다. 또 묘(廟)는 위패를 모신 사당을 말하는데 주로 묘 근처에 비각이나 작은 집처럼 세워져 있다. 廟는 혼(魂)을 모신 사당을, 墓는 백(魄)을 모신 무덤을 뜻한다. 혼은 정신적 에너지이고, 백은 육체적 기본물질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부족했든지 정조는 즉위 13년 째인 1789년 영우원을 수원부 용복면에 있는 화산(수원부 관아가 있던 곳, 지금의 화성시 안녕동)으로 천장하고 현륭원(顯隆園)으로 격상했다. 1815년(순조 15년) 혜경궁 홍씨가 사망하자 이듬해인 1816년 합장했다. 1899년(광무 3년)에 장헌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됨에 따라 현륭원은 융릉으로 추증됐다. 


화산은 원래는 풍수에 능했던 윤선도가 조선 17대 왕인 효종의 묫자리로 추천했던 길지인데다 지명까지 용이 엎드린 형상이란 뜻의 ‘용복’이어서 정조는 주저 없이 이곳을 아버지의 새 안식처로 결정했다고 한다. 양주 배봉산에서 이 장식을 지켜보던 정조는 신하들 앞에서 ‘이제야 제사 음식을 드리고 의장에 필요한 물건을 갖추는 데 성의를 보일 수 있게 됐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조성하기 위해 수원부 관아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고 행궁을 설치했다. 또 화산 인근에 살던 주민들을 팔달산 자락으로 옮기게 했다. 이주인에게는 10년 동안, 수원부 백성에게는 1년 동안 부역을 면해 줬다고 한다.


화산과 관련하여 ‘송충이’에 얽힌 유명한 얘기가 전한다. 아버지 묘역을 조성하고 화산(花山)을 둘러 본 정조는 이름에 걸맞게 꽃나무를 많이 심는 것이 좋겠다 하여 융릉 주변 40리에 걸쳐 대량으로 나무와 꽃을 심게 했다. 그런데 나무가 많다 보니 송충이가 극성이었다. 송충이로 인해 피해가 커지자 나라에서는 송충이를 잡아오는 자에게는 포상금을 주고 잡아 온 송충이들은 화산에서 30리 정도 떨어진 서쪽 바다에 있는 빈정포(濱汀浦, 지금의 매송면 야목 4리)에 갖다 버리게 했다고 한다. 그 후로는 ‘빈정포’라고 적힌 부적만 붙여도 송충이가 죽었다고 한다.


융릉에 도착하니 홍살문 입구에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마침 제향을 올리고 있는 중이다. 융릉의 제향일은 4월 둘째 주이지만 올해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연기돼 지난 10월 26일 거행됐다.


조선왕릉 융릉 제향은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융건릉 봉향회 주관으로 열리는 행사로 이번 제례는 장조의 259주기,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 홍씨) 206주기가 되는 해라고 한다. 뜻밖의 행운에 좋아했던 것도 잠시. 행사 관계자들이 홍살문에서 출입을 제한하는 통에 행사 참관을 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제향에 종헌관으로 참석한 화성시 의장의 ‘화성시민 모두가 참여하는 전통 문화행사가 돼 자라나는 어린 세대에게 우리의 귀중한 정신문화인 효를 배우고 실천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발언과는 다른 현실에 씁쓸함을 느끼며 건릉으로 향했다. 11월 25일에는 건릉의 제향이 열리며 융릉 제향과 달리 시민들의 참관도 가능하다고 한다.


융릉의 동쪽에 있다가 풍수지리 이유로 서쪽에 옮겨진 건릉


정조대왕이 잠들어 있는 화성 건릉 묘역

융릉에서 건릉으로 이르는 길은 완만한 산의 경사를 따라 다양한 모습의 숲 길이 조성돼 있다. 100년 이상 된 향나무, 소나무 등이 어우러진 숲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 것.


건릉은 정조대왕과 효의왕후가 묻혀 있는 능이다. 살아생전에 ‘내가 죽거든 현륭원 근처에 묻어 달라’고 한 정조의 뜻에 따라 현륭원 근처에 묻혔다. 건릉은 처음에는 현륭원의 동쪽에 조성됐다. 그러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건릉이 풍수지리 상 불길하다는 설이 제기됐고 순조 21년(1821년)에 효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지금처럼 융릉의 서쪽에 이장돼 합장릉으로 조성됐다.  


사도세자 위패 모신 원찰, 용주사 … 정조 때 중창


융건릉에서 5분 정도 떨어진 화성시 송산동에는 융릉의 원찰(願刹)인 용주사(龍珠寺)가 자리하고 있다.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때 염거화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병자호란 때 불이 타 폐사가 된 것을 1790년(정조 4년)에 중창불사하고 용주사로 부르기 시작했다. 낙성식 전날 밤 정조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해서 절 이름이 용주사가 됐다.


용주사에도 송충이와 관련된 일화가 전한다. 융릉 참배를 마친 정조가 능역 주변을 거닐다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는 것을 보고 송충이마저도 아버지를 괴롭힌다고 생각하여 송충이를 잡아 이빨로 깨물어 죽였다고 한다. 그 후 송충이 구제 작업을 벌여 용주사 일대의 송충이를 모두 없앴다고 한다.


용주사의 특이함은 절집 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천왕문을 지나서 특이하게 홍살문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원래 왕릉이나 서원 또는 관아나 향교에 세우는 홍살문이 용주사에 있는 까닭은 용주사 내에 호성전(護聖殿)을 짓고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시고 재를 올렸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용주사에서는 일 년에 여섯 번의 제를 지냈으나 1907년 이후로 중단됐다고 한다. 


2008년 100년 만에 사도세자 246주기 제향을 모시면서 홍살문을 복원하고 호성전의 현판을 제막했다. 그러나 호성전은 작년 8월 20일 전소돼 탄 목재만 남아 현재 복원에 난항을 겪고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삼문이 나온다. 삼문 네 기둥의 상단부는 목재를, 하단부에는 석재를 사용했다. 네 기둥에는 용주사불을 첫 글자로 한 글귀들이 적혀 있다. 정면 도리 위에는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근대 서화가 죽농 안순환(竹濃 安淳煥 1871~1942)이 쓴 ‘용주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은 창건 당시의 것으로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른다. 삼문 앞에는 화마를 물리친다는 해태상이 놓여 있다.


화성 용주사 오층석탑

삼문을 통해 절집 마당에 들어서면 웅장한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천보루와 오층석탑, 그리고 마당 한 켠에 종각이 서 있다. 용주사 오층석탑은 1702년 숙종 2년에 고승 성정이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탑이다.


화성 용주사 대웅전의 가을 풍경

천보루를 지나면 대웅보전이 나온다. 용주사 대웅보전에는 석가여래와 함께 동방 약사여래, 서방아미타여래 등 목조 삼세불 좌상이 모셔져 있으며, 정조가 직접 쓴 현판이 남아 있다. 


삼세불의 후불탱화는 한때 일반적인 불화 기법이 아닌 음영법과 원근법 등 서양화법이 적용된 불화로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라 했으나 대웅보전 닫집에서 발견된 원문에 의해 민관 등 25인이 그렸다는 게 밝혀졌다. 대웅보전은 현재 보물 제1942호로 지정돼 있다.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동종은 고려 전기에 제작된 동종으로 신라시대 동종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종신은 하늘로 승천하는 비천상과 결가부좌한 채 두광을 갖추고 합장해 승천하는 3존상으로 장식했다.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보호각을 세워 자세히 볼 수 없는 점이 아쉽다.


용주사 효행박물관에는 정조가 하사한 부모은중경판이 보관되어 있으나 현재는 코로나19로 휴관 중이다. 용주사 들머리 길에는 조지훈의 ‘승무’시비가 있다. 10월에 용주사에서는 승무제가 열리는데 조지훈의 시 ‘승무’의 배경이 됐다고 한다.


시멘트벽 활용, 범상찮은 문화 재생공간 시립 ‘소다미술관’ 


화성 시립 소다미술관

융건릉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화성시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소다미술관이 있다. 오랫동안 방치돼 왔던 찜질방 건물을 리모델링해 디자인 및 건축 미술관으로 문을 연 문화재생공간이다. 회색빛 시멘트 벽을 그대로 드러낸 벽면을 활용한 디자인 감각이 눈에 띈다. 새로운 시도를 담은 작가들의 전시회가 꾸준하게 열린다. 


정원사와 조경 전문가들이 정성껏 꾸민 야외 정원 역시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정원만을 보러 방문하는 사람도 꽤 많다. 창문처럼 뻥 뚫린 시멘트 벽면과 그 벽면들이 만들어 낸 공간 속에 오롯이 전시돼 있는 예술 작품들, 하늘이 훤히 올려다 보이는, 그러나 넝쿨과 나무로 뒤덮인 천장이 모두 예사롭지 않다. 미술관은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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