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상담을 했던 스물 네 살의 여성이 있었다. 상담 며칠 전 언니가 경미한 교통사고를 당했음에도 병원으로 가는 내내 패닉 상태로 온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고 했다. 열네 살 때 아빠가 공사장에서 일하다 추락사고로 돌아가셨고 이듬해에는 조카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견디기 힘든 일이 일어나면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눈물도 나오자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남겨진 사람에게 죽음은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라고 토로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까 두렵고, 인간은 누구나 죽지만 더 이상 너무 이른 죽음 앞에서 무기력해지고 싶지는 않으며,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다고도 했다.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낸 이후 친구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왜 내 주변 사람들만 떠나지?”하는 원망과 “혹시 나 때문에?”하는 터무니없는 죄책감마저 든다고 했다. 상주의 심정을 알기에 장례식장은 물론 발인까지 참석해야 마음이 편해진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피해의식이라는 건 알지만 앞으로 살면서 더 많은 죽음을 겪게 될 텐데 그때마다 자신을 어떻게 다독여야 할지 모르겠다고 호소했다.
죽음에 대한 심리반응의 교과서적 콘텐츠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의 ‘5단계 반응론’을 들 수 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로스 박사는 ‘인간과 죽음’이라는 책에서 임종환자의 심리를 5단계로 구분했다.
“암입니다. 1년을 못 넘기실 거예요”라는 통지를 받게 되면 우리는 일단 ‘부정’의 시기를 겪게 된다. ‘진단이 잘못됐을 거야. 더 큰 병원을 찾아가봐야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분노’의 단계가 찾아오는데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긴 거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등의 원망과 한의 감정이 배출된다. 뒤이어 자식이 결혼할 때 까지만 살 수 있다면 하는 ‘타협’의 단계가 찾아오고, 다음에는 슬픔과 비통에 젖는 ‘우울’의 단계를 겪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시기가 찾아온다.
현실에서는 이런 단계들이 동시에 나타날 수도, 전후 단계를 여러 번 반복해 경험할 수도 있다. 가장 슬픈 경우는 현실을 수용하지 못하고 우울과 분노로 점철된 채 삶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죽음을 수용하고 받아들인다. 인간의 감성시스템은 엄청 강한 자극에 직면했을 때 놀라운 수용 능력을 발휘하도록 설계돼 있다. 건강한 사람이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막상 닥치면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여 남은 시간을 최대한 의미 있게 살고자 노력한다.
사실 우리는 모두 시한부 환자들이다. 언젠가는 죽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죽음은 심리학적으로 모두 피해갈 수 없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다. 그러나 현대인의 문제는 죽음을 너무 피하려고만 한다는 사실이다. 죽음을 피하려 할수록 죽음의 공포에 쫓기게 되고 감성 시스템이 미친 듯이 불안한 시그널을 생산해 공황장애서부터 강박장애, 건강염려증까지 수많은 감성장애들을 초래하게 된다.
상담을 청한 여성의 경우 죽음에 예민한, 즉 감성 시스템이 예민한 사람이다.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불필요한 죄의식에 휩싸인다면 그것은 좀비 같은 인생이지만 오히려 그 감성적 성숙을 자기 동력으로 만든다면 삶을 한층 풍성하고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다.
‘오늘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날이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소중한 죽음을 활용한 의미치료법이다. 사람은 죽음을 전제로 했을 때 가장 솔직하고 감성적인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사랑과 일, 죽음 중에서 사랑과 일은 상대적 가치인 것 같지만 사실 죽음과 마찬가지로 절대적 가치다. 사랑과 일에서 느끼는 만족은 이성이 아닌 감성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감성은 타협하기보다 더 순수한 것을 갈망한다. 생각이 복잡한 사람보다 단선적인 애완동물을 좋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반대로 물질, 명예, 지위를 위한 타협의 연속이 되면 노년에 100% 외롭고 슬퍼진다.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느끼는 사별반응은 사람이 겪는 스트레스 중 가장 크다. 실제로 사별반응 후 3∼6개월 사이에는 아무리 힘들어해도 정상적인 우울증으로 보며 우울장애 진단을 내리지 않는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사람이 아닌 반려동물의 죽음에 깊은 사별반응을 느끼는 사람들이 꽤 있다. 남편과 사별하고 한 달 후 반려견이 죽었는데 반려견의 죽음을 더 슬퍼하고 깊은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남편 입장에서 보면 서글픈 일이지만 지나친 자유추구와 독립의지 때문에 남남이 돼버린 현대인들에게 소박하고 절절한 반려견의 애정반응이 깊은 애착을 형성할 수 있다. 어쩌면 이제는 사별반응의 정의가 바뀌어야 할지도 모른다. 배우자가 아닌 가까운 사람이나 반려동물이 죽었을 경우로.
따라서 우리 모두는 죽음을 하루 앞둔, 그래서 누구보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깊은 갈망을 갖는 사람인 것처럼 하루를 보낼 필요가 있다. 사람과 함께 할 때 느끼는 따뜻한 정서적 스킨십만큼 행복하고 좋은 게 있을까?
상담을 청한 여성은 진짜 오지랖이 슈퍼울트라급인 듯하다. 남의 죽음까지 다 걱정하고 감내하려고 하니 말이다. 자기 에너지 함량 이상으로 주변을 걱정하다 스스로 좌절하는 사람처럼 중증 환자는 없다. 지나친 오지랖은 매우 중요한 심리적 문제로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주위를 챙기는 것은 곧 위선적인 특성을 띠게 된다. 언젠가는 자신의 마음의 만족이 아닌 상대방에 대한 분노로 돌변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스스로의 섬세한 감성 시스템에서 비롯된 것으로 내 자신의 감성에 대고 얘기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내 주위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과 행복하게 살아갈 거야. 하지만 남 걱정하는 데 내 삶을 쓰기는 싫어. 나도 언젠가는 죽는 시한부 인생이니까. 대신 내 하루하루에 의미를 부여하며 충실하게 살아갈 거야”라고. 그리고 오늘 꼭 내가 하고픈 일 하나를 하도록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