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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투어
주자의 이상향을 담으려 한 화천의 곡운구곡
  • 변영숙 여행작가
  • 등록 2021-10-19 17:05:13
  • 수정 2021-10-25 2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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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선비 김수증의 은신처, 김시습 들르고 정약용 참관기 남겨

화천군의 숨은 비경에는 곡운구곡(谷雲九曲)이 있다. 화천군 사내면의 15km에 이르는 아홉 구비는 제각각 이름이 있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따서 우리나라에서도 강원도 동해시 무릉구곡이나 충북 괴산군 화양구곡 등 이른 바 구곡으로 이름붙은 곳이 6곳이나 있고 곡운구곡도 그 중 하나다. 


송나라 말 주자는 무이산 깊은 계곡에 배를 띄워 감상했다. 자연이 곧 정원이었고 도가에서 말하는 무릉도원이란 선경을 구곡으로 의념화하면서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입신(入神)의 길을 꿈꾸었다. 


곡운구곡은 안동김씨이자 서인인 곡운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1670년에 만들었다. 그보다 2년 전 강원도 평강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춘천을 거쳐 이곳을 지나가던 김수증은 일찍이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렀던 화악산 자락에 아름다운 계곡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본래 시비를 꺼리고 산수를 좋아하는 김수증은 평강현감을 그만두고 다시 찾아와 농수정사를 짓고 머무르면서 빼어난 경치 9곳에 이름을 붙인 게 곡운구곡이 됐다. 1675년 겨울에는 아예 서울의 가족들까지 이주시켜, 띠집을 짓고 곡운정사(화음동정사의 이칭) 현판을 달았다. 


김수증은 숙종 재위 당시의 당파싸움에 환멸을 느꼈다. 당시 양대 정파였던 서인과 남인은 갑인예송(甲寅禮訟, 며느리상에 대비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느냐)으로 치열하게 대립했으나, 현종은 남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서인은 실각했고, 성천부사였던 김수증은 벼슬을 내놓고 곡운구곡으로 은둔한다. 


하지만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 남인인 영의정 허적이 허락없이 왕실의 장막을 사용한 문제)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김수증은 화양부사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게 되고 가끔 곡운구곡에 들른다. 그러나 권불십년이라고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지정하려는데 남인은 찬성하고 서인은 반대)으로 다시 남인이 집권하면서 서인의 거두 송시열과 김수증의 두 동생 김수흥 김수항이 죽게 된다.


피를 부르는 정쟁과 끝없이 물고 물리는 정치 현실에 염증을 느낀 김수증은 곡운구곡으로 돌아가 화음동정사(華陰洞精舍)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은둔한다. 이후 숙종이 지난날을 후회하며 폐비된 인현왕후를 복위하고 서인 역시 재집권 했으나, 김수증은 벼슬을 마다하고 곡운구곡을 떠나지 않았다. ‘나아가서는 백성을 다스리고, 물러나서는 학문의 도야에 힘쓰고 가르치는’ 성리학자의 길을 실현하고자 했던 김수증에게 곡운구곡은 은둔처요, 보금자리며, 이상향이었다.


12세기 주자는 중국 무이산 아홉 굽이의 절경을 이루는 곳에 구곡을 설정하고, 무이정사를 지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쳤다. 고려 말에 들어온 성리학은 조선시대 통치 이념으로 자리잡아, 선비들은 주자의 생활을 교과서로 삼았다. 그래서 풍광이 좋은 곳에서 구곡을 설정해 음미하기를  즐겼다. 


김수증 역시 곡운구곡을 설정한 뒤 곡운정사기를 송시열에게 부탁하여 쓰고, 화가 조세걸에게는 곡운구곡과 농수정을 포함한 실경을 열 폭 비단 위에 담채로 그리게 했다. 김수증은 조세걸과 일일이 계곡을 답사하면서 어떻게 그릴지 지도했다고 한다. 이는 조선 후기 겸재 정선으로 대표되는 진경산수화의 토대가 됐다. 이전의 그림은 중국의 산수화를 보고 그린 모사로 진정 우리의 산수는 아니었다. 곡운구곡의 지금 위치를 찾은 것도  곡운구곡도를 참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곡운구곡도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다가 지금은 춘천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300년전의 풍광을 그림으로 보며 지금의 모습과 비교할 수도 있고 자연세서 구원을 찾으려는 옛사람의 향취를 느낄 수 있다. 


곡운구곡은 방화계(傍花溪 1곡), 청옥협(靑玉峽 2곡), 신녀협(神女峽 3곡), 백운담(白雲潭 4곡), 명옥뢰((鳴玉瀨 5곡), 와룡담(臥龍潭 6곡), 명월계((明月溪 7곡), 융의연(隆義淵 8곡), 첩석대(疊石臺 9곡)으로 이뤄져 있다.


곡운구곡의 풍경. 화천군 홈페이지

방화계는 춘천시 사북면 신포리에서 화천군 사내면 삼일리로 진입하는 56번 국도 초입해 있다. 꽃이 만발하는 계곡이란 뜻이다. 청옥협은 깊은 물이 옥색처럼 푸른 골짜기란 뜻이다. 높게 솟은 봉우리에 계곡물이 흐른다. 신녀협은 하곡의 딸 신려의 골짜기란 의미다. 계류는 잔잔히 흐르며 얕고 넓게 드러난 평탄한 바위와 벼랑의 소나무가 높다. 당시 신녀협 언덕인 수운대(水雲臺)를 매월대(梅月臺)라고 마을사람들이 부르는 것을 보고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렀던 것을 확신했다고 한다.


곡운구곡의 백운담(白雲潭 4곡)의 곡운정사지. 홍천군 홈페이지

백운담은 비온 뒤 물이 많아지면 물안개 흰구름처럼 부서지는 것을 말한다.  돌빛은 청색에 아주 깨끗하고 반석이 넓게 깔려 1000명이 앉을 수 있다고 다산 정약용은 묘사했다. 곡운구곡 중 가장 기관(奇觀)이라고 평했다. 지금도 일반인의 눈길을 가장 많이 끄는 곳이다. 화음동정사가 있었던 곳이 백운담 인근이다. 여행객은 군부대 앞 4곡(백운담)으로부터 3곡, 2곡, 1곡으로 관람할 수 있다. 또는 4곡에서 5곡부터 9곡까지 답사하게 돼 있다. 


명옥뢰는 옥비 부서지는 듯한 소리를 내는 여율 또는 작은 폭포를 말한다. 백운담보다 못하고 맑고 온화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정약용은 ‘곡운기’에 적었다.  용이 숨은 깊은 물이란 뜻의 와룡담(臥龍潭)은 김수증이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지었던 구곡의  중심 되는 곳이다. 농수정사는 시끄러운 여울물로 세속의 번거로움을 피하는 선비의 집을 말한다. 김수증은 농사정사를 완성하고 농수정도 지었다. 지금은 민가가 들어서 있어 농수정사나 농수정을 복원하는 게 쉽지 않은 상태다. 


곡운구곡의 풍경. 화천군 홈페이지

명월계는 계류가 잔잔히 흐르는 평탄한 지형이다. 융의연은 제갈량의 김시습의 절의를 기리는 깊은 물이다. 지금은 산 아래 식당이 자리잡아 경관을 해치고 있다. 첩석대는 바위들이 층층히 쌓여 있어 수석의 아름다움이 빼어난 곡이다. 특이한 모양의 바위가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나 지금은 큼직한 몇 개의 바위만 남아 근대에 들어와 무분별하게 자행된 채석으로 인해 옛 경관이 망가진 것으로 보인다.  


북한강과 화천읍이 한눈에 보이는 화천향교와 칠성루


화천의 파로호, 평화의 댐, 곡운구곡까지 섭렵했다면 화천읍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화천읍 시외버스터미널에 서서 고개를 둘러보면 화천을 둘러싸고 있는 자그마한 동산 같은 서화산(西華山)이 눈에 들어온다. 


화천읍내 전망. 변영숙 여행작가

서화산 기슭에 화천향교와 칠성루(화천읍 상승로1길 48-16)가 세워져 있다.  읍내 마을에서 서화산 방향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이내 향교 홍살문이 보이고, 뒤를 돌아보면 북한강과 화천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풍광에 복권이라도 당첨된 것 마냥 즐겁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마을 앞쪽으로 푸르디푸른 북한강이 넉넉한 품처럼 흐른다. 지금껏 본 향교 중에 최고의 전망이다. 홍살문에서 향교 입구까지 벚나무 터널이 이어진다. 벚꽃 명소로 이미 명성이 높은 곳으로 벚꽃이 날리는 봄날 다시 찾고 싶은 생각이 절로 나는 곳이다.


향교 바로 옆에 향교지기 집이 있고 향교지기 집을 통해 향교로 들어갈 수 있다. 마침 김칫거리를 다듬고 있는 향교지기에게 양해를 구하고 향교로 들어선다. 명륜당 앞에 서니 입구에서 봤던 풍경이 더 시원하게 펼쳐진다. 강을 따라 산 쪽으로 오목하게 파인 작은 분지에 자리 잡은 화천읍의 모습이 참 정겹게 보인다.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선현에 대한 제사와 후대를 위한 교육공간을 만든 화천읍 사람들의 정성이 돋보이는 위치가 아닐 수 없다.


화천향교는 유감스럽게도 6.25전쟁 중에 모두 파괴돼 자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1960년 대성전과 내삼문이 세워진데 이어 1974년 전교 박제묵의 주관하에 명륜당과 외삼문이 세워졌다. 그 후로도 단청 작업과 보수 작업이 이어졌고 1982년에 홍살문이 세워졌다.


대성전의 문을 살짝 열어보니 중앙에 중국 5성의 위패가 있고 양옆으로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나뉘어 세워져 있다. 얼마 전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돗자리가 돌돌 말려 있다. 지금도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는 등 이 두메산골에도 유교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그렇다 해도 마을 어디쯤에 이렇게 느리게 시간이 흐르는 장소가 한 곳쯤 있어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향교에서 내려오다 보면 병사들을 위한 사찰이 있으니 가볍게 둘러보면 좋다.


화천시장에서 메밀전을 부치는 상인. 변영숙 여행작가

화천읍에 위치한 화천시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최북단에 위치한 시장이다. 북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화천군 지역에 머물러 살게 되면서 1953년 개설됐다. 


화천시장의 역사는 길다. 이미 조선 시대에 화천읍에 ‘읍내장’이 개설되었다는 기록이 ‘동국문헌비고’에 등장한다. 그러나 상권이 크지 않아 폐지됐다가 일제강점기에 다시 개설됐다. 1940년대 광산 개발과 화천댐 완공 등으로 인구가 증가하면서 잠시 활기를 띠지만 6.25전쟁으로 다시 폐지됐다. 전쟁이 끝난 후 피란민들을 중심으로 새로 개설된 화천시장은 1959년 상설시장이 됐다. 상설장 외에도 3, 8일엔 오일장이 겹쳐서 열린다. 


화천시장은 인근 장에서도 규모가 가장 큰 시장답게 제법 북적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었건만 화천읍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해 오일장이 열리지 않는다는 현수막이 나붙어 있었다.


현대화된 화천시장은 다른 지역의 재래시장과 외관상 큰 차이점이 없어 보인다. 특별한 기대를 안고 찾는다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화천시장의 명물인 옥수수로 만든 음식들- 올챙이국수, 올챙이 묵, 옥수수 인절미-도 눈에 띄지 않아 한 상인에게 물어보니 오일장이나 서야 인근 지역 할머니들이 집에서 만들어 나와 파는 정도라고 한다.


옥수수 인절미와 옥수수 국수를 먹지 못한 아쉬움을 메밀전을 만들어 파는 할머니가 달래준다. TV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면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메밀전을 잘 만드는 사람이라고 입담이 대단하다. 색색으로 만든 메밀전과 할머니의 입담에 넘어가 냉큼 한 팩을 집어 들었다. 평소 메밀전을 즐기지 않아 맛을 극찬할 수는 없고 메밀전병 피의 고운 빛깔과 얇게 부친 솜씨는 인정하고도 남을 솜씨였다. 화천시장에 가면 옥수수 국수가 없다고 실망하지 말고 ‘대한민국 최고의 메밀전 명장’에게서 메밀전을 사 드시라. 강원도 특산품인 취떡 수리취떡도 한 번쯤은 먹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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