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이란 지명이 고군산도(지금의 선유도)에서 유래했듯이 유인도 16개섬, 무인도 47개섬 등 63개 섬들이 모여 있는 고군산군도는 군산 여행의 한 축이다. 군산시 옥도면에 배속된 고군산군도와 몇 개의 섬들은 다른 서해안 남해안 동해안의 섬들과 달리 다정다감한 느낌을 준다.
새만금방조제 축조로 뭍이 된 신시도 … 선유도 4종세트와 연결하는 축
고군산군도 중 가장 큰 규모가 큰 게 신시도(新侍島)다. ‘새로 오는 귀인을 모신다’라는 뜻을 지닌 겸손한 기다림의 섬이었다. 어쩌면 신시도는 오랜 세월 육지가 되는 것을 기다려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신시도는 육지가 됐다. 군산시에서 남쪽으로 40km 떨어져 있는 새만금방조제를 달리면 신시도에 도착한다.
신시도에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라시대부터다. 김해김씨 성을 가진 자가 신시도 근방에 풍부한 청어를 잡기 위하여 섬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이 시초다. 신라시대에는 문창현 심리(深里) 혹은 신치(新峙)로 불렸다. 깊은금에서 유래돼 해풍을 막아주는 아늑한 섬이란 의미를 겸해 주민들이 모여사는 포구를 지금도 지풍금(止風金)이라고 한다. 금이란 평상시에는 주민들이 포구로 사용하는 U자형의 만(灣) 같은 곳으로 외적들이 침입하기도 쉽다. 이 때문에 수군들은 이들 지역에 식량을 자급하면서 경계할 수 있도록 경작지와 초소를 조성했다. 수산물이 많이 잡혀 돈이 몰려서 금(金)자를 쓴다는 얘기도 있다.
신시도 북서쪽 앞바다의 횡경도가 신시도에 이르는 많은 풍랑을 막아준다. 신시도 바로 서쪽이 선유도 4종세트(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대장도)다. 신시도는 무녀도서 선유도로 이어진다. 선유도에서 다시 서쪽으로 장자도, 대장도로 연결된다. 고군산선유도 인근 섬들은 다 연륙교로 이어져 있다.
무녀도가 2016년 7월 5일에 무녀교를 통해 새만금방조제와 연결됐고 2017년 12월 28일에 왕복 2차선의 고군산로가 완전 개통돼 육지와 신시도, 선유도 4종세트가 모두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신시도로 불렸다. 신시도 북서쪽에는 해발 187m의 대각산(大角山)이 있고 남동쪽에 해발 142m의 신치산(新峙山)과 해발 198m 월영봉(月影峰)이 있다. 섬이 크지 않아 한나절 트래킹을 즐기기에 좋다. 신시도 주차장에서 시작해 월영재와 월영봉을 넘고 몽돌해수욕장을 지나 대각산 전망대에 올랐다 다시 신시도 마을로 회귀하는 총 6km의 노을길을 추천한다. 대략 3시간 정도 소요된다.
월영봉에는 신라 대학자 최치원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월영봉의 자태에 반한 최치원이 월영봉에 돌담을 두르고 책을 읽으며 한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최치원의 책 읽는 소리가 중국에서까지 들렸다고 한다. 그만큼 중국과의 거리가 가깝다는 비유이기도 하다. 월영재와 월영봉으로 오르는 길은 길은 좁고 가파른 편이다. 월영봉에 오르면 시야가 확 트이고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새만금방조제와 무녀도, 선유도와 장자도로 이어지는 섬들이 바다 위로 봉긋봉긋 솟아 있는 것이 보인다.
물 맑은 바다, 푸른 등대의 꿈 ‘어청도’ … 일제시대 번성, 200명 사는 무인도 같은 유인도
곽재구 시인은 어청도를 ‘푸른 고기떼들이 푸른빛의 꿈을 꾸며 사는 섬’이라고 했다. 서해 영해기선 기점에 위치한 어청도는 중국과 우리나라 서북단 한계선에 있는 섬이다. 군산항에서 뱃길로 72km, 중국 산둥반도와는 300km 떨어져 있으며 뱃길로 2시간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어청도(於靑島)는 물의 맑기가 거울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한자로는 맑을청(淸)이 아닌 푸른청(靑)을 쓴다. 이런 이유로 곽재구 시인은 어청도를 푸른빛의 꿈을 꾸며 사는 섬이라고 한 것 같다.
어청도에는 이미 19세기 말부터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1885년에는 일본 잠수부들이 고래를 잡기 위해 기항했고, 1898년에는 인천에 살던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일본촌을 만들기도 했다. 1907년경에는 40가구 약 200명의 일본인들이 정착했다. 일제통감부가 1908년 발행한 ‘한국수산지’에는 당시 어청도의 조선 사람들은 대개 어업에 종사했던 반면 일본인들은 어업뿐만 아니라 교육자, 목욕탕, 약국, 두부제조업 등에 종사했으며 일본 청주를 제조하는 술도가와 일본식 유곽까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12년 청일전쟁 이후 중국으로 가는 항로의 중요성을 인식한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어청도 등대가 축조됐고 1930년대에는 선착장과 축대가 세워졌다.
일본인들이 어청도를 일찌감치 탐낸 이유는 분명하다. 어청도 인근의 풍부한 어장과 중국으로 향하는 항로에 위치한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에 어청도는 일본 오사카에서 중국의 다롄(大連)까지 운항하는 정기여객선이 다녔고 오사카(大阪)와 신의주 간 우편선의 기항지였다.
해산물을 비롯한 해상자원의 수탈은 조직적으로 행해졌으며 거대자본과 법적, 인적 자원을 동원한 수탈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1930년대 일본의 정어리 어획고는 세계 1위를 달성했으며, 1940년대 초에는 정어리 씨가 마를 정도로 무자비하게 포획해갔다. 이렇게 포획한 정어리는 일본의 화학공업을 비롯한 군수산업에 사용됐다. 섬에는 현재도 일본식 가옥과 금 채굴을 위해 파놓은 동굴들이 남아 있다. 특히 어청초등학교 앞 해군전용성당 입구 동굴에 금 채굴 흔적이 남아 있다.
한 때 유동인구가 2000명에 달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고작 200명 남짓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을 뿐이다. 어업을 생업으로 하고 선착장 중심으로 몇 개의 식당과 민박집, 슈퍼 등이 늘어서 있다. 군부대가 있어 군인과 군속들도 거주하고 있다.
여행객들이 어청도를 찾아오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어청도 등대를 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군사적, 수탈적 목적으로 세워졌으나 의도와는 달리 너무 아름답다. 하늘이 맑은 날 푸른 물결을 배경으로 서 있는 하얀색 등대는 마치 동화 속 풍경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등대를 보기 위해서는 시멘트가 깔린 산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섬 특유의 빨간, 파란색 지붕을 한 집들이 이국적이다. 담장 밑에 핀 보라색 망초와 접시꽃들이 뜨거운 햇살 아래 힘겹게 펴 있을 뿐 인적이 없는 어청도는 흡사 무인도 같다.
활짝 열린 대문 사이로 빨랫줄에 널린 옷가지들이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강변하듯 펄럭인다. 중간에 파출소, 보건소, 어청초등학교를 지난다. 1925년 4월 1일 개교한 어청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적어 지난해 폐교됐다. 서로 엉켜 붙어 있는 향나무들만이 쓸쓸한 교정을 지키고 서 있다. 산 정상 능선에 서 있는 팔각정을 지나니 이내 등대의 모습이 보인다.
새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하얀 몸통 위에 빨간색 지붕이 얹혀 있는 어청도 등대는 작은 집처럼 생겼다. 1층의 현관문과 2층의 창문 그리고 전망대… . 등대 주변에는 반원형의 돌담이 둘러져 있다. 등대 아래로는 깎아지른 절벽이고 바다다. 유명 관광지 기념엽서에 등장할 법한 풍경이다. 많은 이들이 먼 뱃길을 달려 어청도로 향하는 이유다.
어청도 등대의 불빛은 100년 전에 그랬듯이 오늘 밤에도 어두운 바닷길을 밝힐 것이다. 소슬한 가을 바람이 불고 밤하늘에 별이 총총 빛나는 밤 푸른 어청도를 다시 찾아오고 싶다. 해안가를 따라 해안데크길이 조성되어 있고, 등대에서 보는 낙조가 일품이다. 볼거리로 치동묘, 봉수대, 당산 등이 있다. 치동묘는 중국 제나라 사람 전횡을 모시는 사당으로 치동은 담양전씨(潭陽田氏)의 뿌리라는 설이 전해진다.
‘신선이 노닐던 섬’ 선유도 … 자태 고운 명사십리 해수욕장, 호젓한 옥돌해변
선유도(仙遊島)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무녀도(巫女島), 서쪽으로는 장자도(壯子島)와 대장도(大長島)가 있다. 선유도는 신설이 노닐던 섬이란 지명처럼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표현이 알맞은 섬이다. 명사십리 해수욕장, 갯벌, 산(망주봉과 대봉), 염전이 있고 낙조가 아름다우며 생선회의 육질이 쫄깃쫄깃하고 고소한 맛이 난다.
포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명사십리해수욕장은 십리(4km)가 못 되고 실제로는 1.2km 남짓한 해안사구 해수욕장이다. 백사장 모래가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맨발로 모래사장을 뛰어다녀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곱다.
선유도 본섬에서 명사십리를 건너 북쪽 전월리 남악리 방면으로 올라가면 망주봉(望主峰)이 나온다. 옛날 선유도에 유배된 충신이 임금을 그리며 매일 이곳에 올라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얀 바위산에 매달린 낙락장송이 절개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슬퍼보인다. 여름철에 큰 비가 내리면 망주봉에서 7~8개의 물줄기가 망주폭포를 연출하기도 한다.
망주봉을 지난 남악리에 닿으면 선유도 최고봉이 대봉(해발 152m)과 마주한다. 등산로에서 정상까지 20분 정도 걸리며 선유도 일대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시인 곽재구는 “섬이 섬에게 편지를 썼나 보다”라고 적었는데 아마도 대봉에서 바라본 명사십리의 풍경일 듯 싶다. 남악리 맨 서편의 몽돌해수욕장은 100m 남짓한 자갈밭이다. 연인들이 몰래 숨어 데이트하기 좋은 장소다. 남악리에서 남쪽 전월리로 향하는 길에는 갈대밭, 기도하는 손 모양의 빨간색 기도등대(선유도 북서편 방파제 등대)가 소소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선유도 본섬 남서쪽의 선유봉(해발 112m)에서 바라보는 동편의 옥돌해변이 숨은 비경이다. 맑은 물이 넘실대는 자태가 곱다. 옥돌해변의 해변데크산책로는 호젓하게 걷기 좋은 길로 추천된다. 선유도 서쪽의 장자대교를 넘으면 장자도다. 장자도는 과거에 멸치잡이가 번성해 고군산군도 16개 유인도 중 가장 풍요로웠다고 전해진다. 장자도 남쪽 끝에 낙조대가 있다.
장자도에서 장자교를 건너면 대장도다.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이 낙조를 촬영하는 포인트로 유명하다. 대장도 대장봉(142m)에 오르면 고군산군도를 잇는 길과 다리, 섬과 포구가 한눈에 다가선다. 대장봉 8부 능선에는 서울 간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는 여인이 바위가 됐다는 할매바위가 있다.
선유도 동편의 무녀도는 무녀가 제사상을 차리고 춤을 추는 모습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무녀도와 선유도를 잇는 선유대교를 건너면 멸치젓, 까나리액젓 익는 냄새가 자욱하다. 무녀도는 30~40년 전만해도 염전이 섬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넓었지만 지금은 수십평짜리 소금밭만 예닐곱개만 흔적을 남기고 있다. 마른 동풍이 불고 햇볕이 쨍쨍하면 타일 바닥 위에 핀 소금꽃이 예쁘다. 인근 갯벌은 어촌체험하기에 좋은 장소다. 무녀도의 쥐똥섬은 간조 때 길이 열리며 갯벌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