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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투어
호젓한 부여 여행지 3곳 정림사지, 궁남지, 능산리고분군
  • 변영숙 여행작가
  • 등록 2021-07-23 11:42:46
  • 수정 2021-07-23 12: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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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궁남지는 경주 안압지(월지), 일본 인공정원의 오리진 … 백제탑의 원형, 정림사 5층석탑

부여 여행에서 낙화암과 부소산성 일대가 제1의 포인트라면 정림사지, 궁남지, 능산리고분군은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명소들이다. 망국의 한이 조금은 덜 느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광활한 대지 위에 우뚝 선 정림사지 5층 석탑


넓은 대지 위에 자리잡은 정림사지 5층석탑

국보 제9호이자 세계 유네스코문화유산인 부여읍 동남리의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 석탑은 목탑의 섬세함과 유려함을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한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시원으로 평가받는다. 백제 시대의 탑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탑이기도 하다.


입구를 들어서면 굳이 설명문을 읽지 않아도 정림사지 석탑의 완벽한 구조미와 세련된 형식미에 압도당하게 된다. 광활한 대지 위에 우뚝 선 정림사지 5층석탑은 홀로 왜소해 보일 법도 한데 당당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부여읍 군수리 정림사지 5층석탑 주변에는 금당터와 중문지, 강당지, 동편 건물지, 서편 건물지 등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다. 석탑 뒤편의 전각에는 커다란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석불은 온존하지 못한 거대한 몸통과 제짝이 아닌 듯한 잘려나간 팔다리들을 모아 놓은 듯 괴이하다. 일그러진 입술 또한 자비로운 부처님 상하고는 거리가 멀게 보인다. 보물로 지정돼 있다.


정림사는 백제 성왕이 538년 봄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궁, 관청, 사찰 등을 건립할 때 나성의 한 가운데에 지은 왕실 사찰이다. 북위(北魏)가 낙양성(洛陽城)에 황궁과 영녕사(永寧寺)를 조성한 것과 유사하다. 당시의 절 이름은 지금 알 수 없고 1942년 일본인 후지사와 가즈오(藤澤一夫)가 절터 발굴조사 중에 발굴한 기와조각에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란 명문이 적혀 있어, 태평 8년인 고려 현종 19년에 정림사로 불리웠음을 알게 됐다. 이후 정림사지라 부르고 있다.


국보 제9호 정림사지 5층석탑

그러나 정림사지 5층석탑에는 아픈 백제 역사의 상처도 남아 있다. 1층 탑신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정립사탑의 탑신마다 치욕적인 글귀를 새겨 놓은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공을 기념하는 대당평백제국비명을 새겨 넣었다. 그래서 과거엔 평제탑’(平濟塔)으로 부르기도 했다.


11면에 24, 2면에 29, 3면에 28, 4면에 36행 등 총 117행의 비문에는 당 고종이 신라 문무왕과 힘을 합쳐 백제를 쳐서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 31대 의자왕, 왕자 융, 효 등 13인과 대좌평 사타천복, 국변성 이하 7백여 명을 중국에 압송했고 당나라는 백제 멸망 후에 5도독과 37250현을 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옆의 정림사지 박물관에서 탁본과 한역본을 볼 수 있다.


이밖에 박물관에는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이 전시돼 있다. 특히 사비백제 창건기의 삼존불입상과 소조불, 도용 등 불교 유물을 만나 볼 수 있다. 첨단 IT기술과 영상기술을 접목해 제작한 VCR 영상자료 역시 훌륭한 볼거리이다.


궁남지, 최고(最古)의 인공 연못 정원


궁남지에 함박 핀 연꽃

부여읍 동남리 궁남지(宮南池)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조성된 인공연못과 정원이다.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고 부른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왕 35(634)에 궁 남쪽에 못을 파고 20리 떨어진 곳에서 물을 끌어 오고 못 언덕에는 수양버들을 심고 못 가운데는 방장선산(方丈仙山, 도교의 신선이 산다는 산)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 는 글귀가 나온다. 바로 궁남지를 이른 글이다.


무왕은 일명 서동왕자로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결혼했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무왕은 41년의 재위 기간 왕권을 안정시키고 신라 쪽으로 영토를 넓혔다. 그러나 말년에는 궁남지 등을 찾아다니며 풍류를 즐겼고 이는 백제 멸망의 단초가 됐다. 그의 아들이 바로 백제의 마지막 31대왕, 의자왕이다.


궁남지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정원문화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멀리서 물을 끌여 인공연못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는 신라 경주 안압지 조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백제를 점령한 신라왕자 김법민은 신라로 돌아가 궁남지를 떠올리면 월지라는 연못을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의 안압지다. 궁남지는 또 일본 조경문화의 시원이 되기도 했다. 다소 인공적인 일본 정원문화가 백제에 원형을 두고 있다는 게 새삼스럽다.


궁남지는 이제 국내 최대 연꽃 서식지로도 이름을 알리고 있다. 백제시대에도 연밭이었는지는 알 수 없고 무왕이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남아 있다. 궁남지는 정비하기 전에는 수만평의 늪지대였다가 1965년부터 1967년까지 진행된 정비사업을 통해 지금의 13772평 규모의 우리나라 대표 연못으로 자리잡았다. 지금의 다리와 누각(抱龍亭)1971년에 세운 것이다.


해마다 7~8월이면 연꽃들이 피어 올라 장관을 이루고 연꽃 축제가 열린다. 2001년 지금은 퇴직한 이계영 전 부여군 고도문화사업소 팀장이 홍수련 300촉을 심은 것을 시작으로 홍련, 백련, 황금련, 수련, 빅토리아연꽃(여왕꽃) 50가지가 넘은 연이 1000만송이 넘게 심어져 있다. 이제 궁남지는 백제역사 유적이라기보다는 연꽃 관광지로 더 이름을 얻고 있다. 2000년 이후 궁남지 일대의 논이 연못으로 편입되면서 지금은 116000평의 거대한 연못으로 변해 있다. 무왕이 서동인 까닭에 그 주변을 서동공원이라 부른다.

 

백제 왕릉원과 능산리 고분군과 나성


능산리 고분군

부소산성에서 10여분 떨어진 부여읍 능산리에는 백제 왕들의 무덤군인 능산리 고분군과 능산리사지 및 나성이 있다.


능산리 고분군은 해발 121m의 능산리산 남쪽 경사면 중턱에 위치한 7기의 백제시대 무덤이다. 백제 무덤들 가운데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위치와 규모로 보아 왕이나 왕족 혹은 상류층의 분묘로 보인다. 7기 고분 중 가장 아래 동쪽에 있어 동하총이라고 불리는 1호분의 벽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고분군에는 안전철책이 둘러쳐 있어 출입이 불가하다.


고분군에서 산책로를 따라 옆으로 가면 의자왕과 그의 아들 융의 가묘가 나온다. 그 옆 능산리사지에서는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 287)와 부여능산리 사지석조사리감(국보 제 288)가 출토됐다. 


부여 나성

능산리사지를 따라 나성(羅城)이 복원됐다. 사비성의 방어를 위해 쌓은 나성은 수도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동시에 삶과 죽음의 경계이기도 했다. 사비성으로 천도한 538년경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벽은 부소산성 동문으로 시작해 사비성 전체 약 8km를 감쌌다. 흙과 돌로 쌓았으며 높이는 낮게는 1m, 높게는 3~5m에 이른다.


백제나성은 평양나성과 함께 가장 오래된 나성 중 하나다. 부여나성은 청산성, 청마산성과 함께 백제의 수도 보호를 위한 외곽 방어시설로 중요했다.


어느 시기부터는 왕릉도 나성 밖에 조성했는데 능산리 고분이 그것이다. 이밖에 1호분을 모방한 고분과 가상 증강현실 기술을 접목해 꾸며 놓은 역사체험 공간 아트뮤지엄이 조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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