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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투어
정조의 효심 찾아나서는 ‘화성행궁’과 ‘융건릉’ 거닐기
  • 변영숙 여행작가
  • 등록 2021-07-15 01:32:21
  • 수정 2021-07-15 02: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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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도세자 자주 뵈려 행궁 조성 … 사후 27년만에 서울 배봉산서 수원 화산으로 능 이전

전국의 한낮의 기온이 30도를 오락가락하던 지난 7월초, 홍살문 하나가 전부인 화성행궁(華城行宮) 앞 광장엔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없었다. 간혹 오가는 사람들도 양산 아래 숨거나 연신 팔을 놀려 부채질을 하며 걷고 있었다. 세 시가 넘었지만 한여름의 땡볕은 수그러들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관람객들로 늘 북적거리던 행궁 신풍루(新豐樓) 앞도 조용했다.  


한 여름 땡볕이 내리 쬐는 날 그늘 한 점 없는 고궁을 관람하는 일은 고문에 가깝다. 그러나 잡다한 소음과 동선의 방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특혜가 주어진다면 뜨거운 햇살의 고문조차도 능히 견딜만하다.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앞에는 거대한 느티나무 노거수 세 그루가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정조가 처음 행궁을 건립하기 시작한 것은 1789년(정조 13년)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을 다녀올 때 머물기 위한 궁이 필요해서다.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 정식 명칭은 장헌세자 莊獻世子)는 정치적 모략으로 뒤주에 갇혀 죽었다. 정조가 열한 살 때였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정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정조는 1752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759년(8살) 때 세손에 책봉됐다. 1762년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격했다. 이어 죄인의 아들이 왕이 될 수 없다는 명분 아래 영조의 요절한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후에 진종(眞宗)으로 추존)의 양아들로 입적됐다. 


1775년부터 1776년까지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다가 1776년 영조가 승하하자 25살에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정조의 일성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李祘)이다”였다. 이 한 마디에는 정조의 아버지를 향한 연민과 사랑과 그리움, 죄책감 그리고 회한 등 모든 심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제일 먼저 경기도 양주(지금은 동대문구) 배봉산(拜峯山)에 있던 아버지의 수은묘(垂恩墓)를 영우원(永祐園)으로 개칭하고 아버지를 모신 사당인 수은묘(垂恩廟)을 경모궁(景慕宮)으로 격상했다. 


경모궁은 지금의 대학로(연건동) 서울대 의대 교내에 있다. 서울대병원을 별칭 함춘원(含春苑)으로 부른다. 1493년(성종 24년)에 창경궁의 동쪽인 이곳에 풍수지리설을 따라 후원(後苑)을 조성하고 잡인들의 출입을 막은 게 바로 함춘원이다. 


함춘원엔 일제 강점기 경성제국대학(서울대의 전신)이 들어섰으나 한국전쟁 때 거의 소실됐다. 함춘원의 일부인 함춘문(含春門)과 경모궁의 일부였던 석단(石壇)만이 흔적으로 남아 있다. 정조는 함춘원의 일부에 경모궁을 조성한 것이었다. 


영조는 1762년 아들을 추도한다며 사도묘(思悼墓)라고 했다가 자신의 허물을 자인하는 느낌이 들었는지 1764년 수은묘로 바꿨다. 수은은 은혜를 후대에 길이길이 전한다는 의미다. 


묘(墓)는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을 모신 무덤을 말한다. 반면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가 묻힌 곳이다. 또 묘(廟)는 위패를 모신 사당을 말하는데 주로 묘 근처에 비각이나 작은 집처럼 세워져 있다. 廟는 혼(魂)을 모신 사당을, 墓는 백(魄)을 모신 무덤을 뜻한다. 혼은 정신적 에너지이고, 백은 육체적 기본물질을 말한다.


예컨대 효창원(孝昌園)은 5살 어린 나이에 죽은 정조의 첫째 아들 문효세자와 몇 달 후 죽은 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의 무덤이었으나 나중에 경기도 고양의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당하며 지금은 효창공원이 됐고 김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독립 애국지사들이 안장돼 있다.   


한편 조치원, 장호원, 이태원 등에 쓰이는 원(院)은 관리들이 지방 출장을 다니거나 서울로 공무를 보러왔을 때 머물던 역원(驛院)으로서 숙박시설이자 교통수단인 말을 갈아타는 곳이었다. 


정조는 즉위한 지 13년째인 1789년에 배봉산의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관아가 있던 지명)으로 옮겨 새 단장한 후 현륭원으로 이름을 바꿔 격상했다. 1899년 장헌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됨에 따라 현륭원은 융릉(隆陵)으로 추증됐다. 


이 때문에 당시 인근에 살던 주민들은 팔달산 자락으로 이주해야 했고 수원 화성행궁과 화성의 건설이 시작됐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한을 풀어드리는 동시에 정조의 꿈인 개혁정치를 펼치려는 첫 걸음이었다. 


건립 당시 576칸으로 지어진 화성행궁은 조선시대 행궁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답다고 일컬어진다. 정조는 행궁이 완성되자 “이제 화성은 나의 새로운 고향이다. 행궁의 정문은 신풍루라고 하여라”고 교지를 내렸다. 신풍이란 임금님의 새로운 고향이란 뜻이다. 정조의 수원 화성에 얼마나 애정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행궁은 평상시에는 수원부 관아로 사용되었고 임금의 원행(園行)이 있을 때에는 왕의 거처로 사용됐다. 그러나 정조의 꿈이 담긴 행궁은 일제강점기 민족 문화 말살 정책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됐다.


행궁의 정전이자 동헌의 중심인 봉수당. 자료 수원시

일제는 정조의 어진을 모시는 화령전(華寧殿) 건물에 자혜의원을 열었고 행궁의 정전이자 동헌의 중심인 봉수당(奉壽堂)을 병원 본관으로 사용했다. 1925년에는 봉수당을 허물고 2층짜리 벽돌건물을 세우고 병원 이름도 자혜의원에서 경기도립수원의원으로 고쳤다. 그나마 정조 당시 공식 행사나 연회장으로 쓰였고 이후 수원군청이 들어선 낙남헌(洛南軒)만이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았다.


1789년 첫 삽을 뜬 화성행궁은 200년 후인 1989년에 복원이 시작됐다.  복원은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을 토대로 진행됐다. 1단계 복원사업(1995년~2003년) 당시엔 전체 576칸 중 왕의 처소 등 482칸만 복원됐다. 올해 3월부터 2단계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 관리들이 묵던 우화관(于華館)과 융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물품을 관리하던 별주(別廚) 등 94칸이 건설된다. 2022년에 공사가 마무리되므로 완벽 복원에 무려 33년이 걸린 셈이다.


수원시는 2030년까지 도시개발로 끊어진 화성 성곽도 모두 이을 계획이다. 창룡문(동문)에서 동남각루에 이르는 성벽을 복원·정비한다. 2013년에 지정된  지동문화재보호구역(1만3520㎡)와 연계해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축성 당시 지형을 복원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한옥 체험마을도 조성한다. 체험활동이 가능한 공공 한옥과 60여명이 숙박할 수 있는 한옥 13개 동을 지을 계획이다. 한옥 건축·수선 지원사업도 펼친다. 수원화성지구단위계획구역(2.24㎢) 내에 한옥을 신축하는 시민에겐 8000만원, 한옥촉진지역인 신풍동, 장안동 일대에 한옥을 지으면 최대 1억5000만원을 지원한다. 한옥 건축물 전면 수선비용도 최대 1억1000만원을 지원한다. 수원시는 2013년부터 지금까지 22채의 한옥에 보조금을 지원했다.

 

화성·화성행궁 복원은 수원시의 숙원 사업 중 하나다. 시는 1989년부터 지금까지 행궁 자리에 수원의료원을 지으려다 다른 곳으로 계획을 바꿨고, 116년 전통의 신풍초등학교를 동문과 학부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광교신도시로 옮겼으며, 행궁 주변 주민들에 대한 보상도 마쳤다. 

 

2003년에 1차 복원이 끝났으니 복원된 지 20여 년이 지난 행궁에서는 제법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신풍루를 들어서니 차례로 좌익문(左翊門)과 중양문(中陽門)이 나온다. 


정조가 행궁에서 신하를 접견하고 보고를 받던 유여택. 자료 수원시

좌익은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內三門 궁궐, 읍성, 관아 등의 안쪽에 있는 정면 3칸짜리 출입문)인 중양문을 도와 행궁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좌익문 왼편에는 정조가 행궁에 머물 때 신하들을 접견하던 유여택(維與宅)이 있다. 평소에는 수원 유수가 거처하였으나 임금이 행차하면 신하들을 접견하고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듣는 곳이었다. 


중양문을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봉수당과 장락당(長樂堂), 복내당(福內堂)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화성행궁의 정전이라고 할 수 있는 봉수당은 정조가 수원 행차시 머물렀던 곳이다. 


정조는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정궁에 봉수당이란 이름을 붙이고 이곳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베풀었다. 봉수당에는 회갑상을 받은 어머니에게 절을 올리기 위해 정조와 왕비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재현돼 있다. 비록 모형이지만 늙고 지친 홀어머니와 그 앞에 선 정조 내외를 보니 한 나라의 국왕이기 전에 아들 이산으로서의 삶이 애잔해보인다. 


혜경궁 홍씨(1735~1816)는 10세에 세자빈이 되었고 28세에 지아비를 잃었다.  정조는 성대한 회갑연을 베풀어서라도 위로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남편을 앞세운 혜경궁 홍씨는 아들마저도 앞세우고(1800년 정조 승하) 한 많은 세월을 마감했다. 홍씨는 고종 때 헌경왕후로, 다시 황후로 추존됐다. 


봉수당에서 화령전으로 가는 길목에 노래당과 낙남헌이 있다. 노래당(老來堂)은 정조가 노후를 보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늙음이 찾아온다’라는 뜻의 당호다. 출입문에는 젊음이 오래 가라는 의미로 난로문(難老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정조는 아들이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화성에서 노후 생활을 할 꿈을 꿨으나 1800년 6월 49세에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노래당에 잇대어 있는 낙남헌은 화성행궁에서 유일하게 원형이 보존된 건물이다. 과거시험(별시)과 같은 공식 행사나 연회가 열렸던 곳이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때는 61세 이상 수원부 백성들을 위한 양로 잔치가 열리기도 했다. 일제의 폭압을 견뎌낸 낙남헌 기둥을 감싸 안으면 좋은 기운을 받게 된다는 속설이 전한다. 


화령전에 보관된 정조 어진

낙남헌을 지나면 화령전이 나온다. 순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난 정조를 위해 1801년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고 어진을 봉안했다. 정조의 초상화를 모신 운한각과 이안청, 복도각으로 구성된 국내 유일의 영전(影殿) 건축물이다. 


행궁 신풍루 앞마당에는 ‘무예 24기’ 공연이 펼쳐진다. 매주 화요일~일요일, 오전 11시부터 30분간 진행된다. 무예 24기는 조선 전통의 무예와 중국, 일본의 우수한 무예로서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돼 있다. 조선의 최정예 부대인 장용영 외영 군사들이 익혔던 24가지의 실전 무예이다. 


화성행궁을 지키는 장용영의 수위의식(守衛儀式, 경계병 교대)과 장용영 군사들의 훈련을 보여주는 공연도 이곳에서 진행된다. 수위의식은 매주 일요일 오후 2시부터 30분간(4~10월)에 펼쳐진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훈련 장면을 보여주는 공연은 저녁 시간에 한 차례만 열린다. 


어둠이 내리면 행궁 일대는 어둠과 빛의 향연이 펼쳐진다. 깜깜한 밤하늘 아래 은은한 불빛을 따라 궁궐 뜰을 사부작사부작 걷는 즐거움은 여름밤에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팔달산 중턱에서는 서장대가 빛을 발하며 날렵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문득 내가 서 있는 곳이 21세기 수원 한복판인지, 18세기 정조가 살아 있는 세상인지 헷갈린다. 


아버지 향한 정조의 효심 그윽한 ‘융릉’ … 그 곁에 묻힌 아들의 ‘건릉’ 


조선시대 왕족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사도세자(1735~1762)라 할 것이다. 한편으로 가장 효심이 지극했던 왕을 꼽으라면 그 아들이 정조라 할 수 있다.


사도세자 부부를 합장한 융릉과 정조대왕(1752~1800)과 효의왕후 김씨가 같이 묻힌 건릉(健陵)은 붙어 있다. 합쳐서 융건릉으로 부르는데 융릉은 오른쪽(동쪽), 건릉은 왼쪽(서쪽)에 있다.


왕릉 중 아버지와 아들의 능이 같이 있는 것은 융건릉과 홍유릉(고종과 순종) 두 곳이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지도 못한 아버지 근처에 묻히길 원했던 것은 그만큼 효심이 극진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장조 추존)을 모신 융릉. 자료 수원시

사도세자의 묘는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 다시 말해 지금의 서울시립대 뒷산에 있었다. 사도세자는 당파싸움의 희생양이 돼 아버지 영조의 명에 따라 무더운 여름날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굶어 죽었다. 비운의 아버지를 둔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성군으로서 자질을 키워나갔다.


할아버지 생전에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공공연하게 말하지 못했던 정조는 왕이 되자마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며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혼백을 달래기 위해 당대 최고의 명당이라던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왕릉 사방 4㎞에는 큰 건물이 없어야 하는데 당시 이곳에는 수원부 관아와 마을이 있었다.  정조는 관아와 마을을 지금의 수원화성으로 옮겼다. 


사도세자 내외의 묘는 정조 때 현륭원이 됐다가 고종 때 이르러 융릉으로 승격됐다. 또 고종 때에 비로소 사도세자는 장조로 추존됐다. 정조는 아버지의 능을 모란과 연꽃 무늬 병풍석과 기와 모양의 와첨석 등을 사용해 정성으로 아름답게 만들었어요. 물론 정조 당대가 문화가 빛나는 시절이기도 했지만,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무덤을 그 어떤 왕의 무덤보다 잘 만들고 싶었던 정조의 효심이 담겨졌다.


융릉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정조는 아버지 능을 꾸미면서 소나무 45만그루를 심었다. 하지만 당시에 소나무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사그리 베어 가 지금 자라는 나무들은 이후에 심긴 것이다. 


보물 1942호인 용주사 대웅보전. 자료 경기문화재연구원

정조는 아버지 능을 이곳으로 옮기고 가까운 곳에 원찰(願刹)인 용주사(龍珠寺)를 중창해 하루 6번씩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 절은 신라 말기인 854년에 廉巨和尙(염거화상)이 지었고, 원래 이름은 갈양사(葛陽寺)였다. 고려 때인 10세기에 확장됐다.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동종과 보물 1754호인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판(佛說大報父母恩重經版), 보물 1942호인 용주사 대웅보전이 있다. 


건릉은 원래 융릉의 동쪽에 조성됐다. 그러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건릉이 불길하다는 설이 제기됐고 순조 21년(1821년)에 효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지금처럼 융릉의 서쪽에 이장돼 합장릉으로 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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