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사와 온양온천으로 기억되는 충남 아산은 이제 고속철도 개통으로 30분이면 도착하고 전자산업단지가 들어선 도시가 돼버렸다.
아산은 진산(鎭山)인 영인산과 설화산, 망경산, 배방산, 광덕산 등 수많은 봉우리에 둘러 싸여 있고 삽교천에서 갈라진 무한천과 곡교천이 좌우로 흐르고 그 중간에 탕정(湯井)평야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해발 699.3m의 남쪽 광덕산(廣德山)은 아산시와 천안시 두 도시에 걸쳐 있다. 정상은 아산시에, 그 아래는 천안시에 속해 있다. 장존동에 솟은 해발 447m의 설화산(雪華山)은 붓꽃 같은 봉우리가 솟아 예부터 기세가 대단했다. 이 산이 비치는 곳에서 영특하고 큰 인물들이 많이 태어났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아산군은 동쪽으로 천안군 경계까지 40리이며, 남쪽으로는 신창현 경계까지 16리, 온양군 경계까지 18리이며, 서쪽으로는 임천군(지금은 부여) 경계까지 32리이며, 북쪽으로는 평택현 경계까지 4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24리’라고 적혀 있다. 이 때 아산군은 지금 아산시의 동북부를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아산시는 백제 때에는 아술현(牙述縣), 신라 때에는 음봉(陰峯)이라 불렸다. 그후 조선 태종 13년에 지금의 아산(牙山)으로 고치고 현감을 내려보냈다.
세조 5년에 현을 줄여서 온양, 평택, 신창 등 세 고을에 나누어 붙였다가 11년에 복구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아산에 대한 기록을 보면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기후가 차다’라고 기록돼 있다.
1914년 행정개편으로 인해 아산군, 온양군, 신창군이 합해져 아산군이 됐다. 1986년 온양읍이 온양시로 승격돼 아산군에서 분리됐다가 1995년 다시 온양시와 아산군을 통합해 도농복합의 아산시가 됐다. 지금도 아산의 가운데를 차지하는 온양의 옛사람들은 온양이 아산에 흡수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현충사
아산시 온양온천동 북쪽에 인접한 염치읍 백암리 방화산 기슭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현충사가 조성돼 있다. 아산은 충무공의 외가이다.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난 충무공은 할아버지 대에서 가세가 기울며 외가인 아산으로 이사 와서 벼슬길에 오르기 전까지 살았다.
아산 현충사 말고도 이순신 장군을 모시는 사당은 통영 충렬사를 비롯해 전국에 34곳이나 되는데, 건립 시기로는 충렬사가 가장 먼저다.
아산 현충사는 충무공 순국 후 108년 후인 1706년 숙종 32년에 세워졌고 1707년 숙종이 현충사라는 사액을 내렸다. 그러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당이 훼절됐다. 그 후 1932년 일제 강점기 때 성금을 거두고 다시 사당을 세워 명맥을 이어왔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가 여전한 6월 중순 평일 낮 현충사는 한산했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평일에도 수 천명의 방문객이 찾는 곳이다. 현충사 입구인 충무문으로 들어서니 신작로처럼 넓은 길이 쭉 뻗어 있다. 방문할 때마다 충무공을 참배하러 가는 길이 참 멀다는 생각이 든다.
사당 가는 길 왼편에 거대한 왕릉처럼 생긴 충무공 이순신기념관에는 이순신 장군의 칼을 비롯한 유품들과 이순신 장군에게 내려진 각종 교지와 난중일기, 거북선을 비롯한 각종 총포와 전쟁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기념관을 나와 신작로를 걷다보면 거대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반송(盤松)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식수한 나무인데 원산지가 일본이라 해서 많은 구설수에 오르내린 바 있다. 반송을 지나 양 옆으로 사열하듯 서 있는 울창한 소나무들 사이를 걸으면 이내 충무공의 사당을 알리는 홍살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다시 높은 계단을 올라 입구인 ‘충의문’을 지나면 비로소 사당에 닿는다.
사당에는 마침 관리인이 피워 놓은 향 냄새가 가득했다. 짧은 묵념을 올리고 주변을 살피니 앞쪽으로 설화산과 정감어린 옛 마을과 최근에 지어진 아파트가 어색한 모습으로 펼쳐진다.
지금의 현충사가 조성되기 전 이곳은 작은 마을이었다. 충의문을 나서면 바로 첫 번째 집이 있었다고 한다. 조상대대로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던 주민들은 현충사 건립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집을 빼앗기고 다른 지역으로 강제이주 당해야만 했다. 현충사 건립에 숨겨진 이야기이다.
현충사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6~1974년 사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진행한 성역화 이후다. 군사 독재정권 시절 많은 문화재와 유적지가 복원되거나 재정비됐는데 전문가들의 세밀한 연구와 고증에 의한 복원이 아닌 군사 정권식의 안목으로 진행된 사업이 많다. 광화문, 석굴암, 불국사, 천마총 등의 복원이 대표적인 예로 그 폐해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현충사 성역화 사업도 그 중 하나다.
현충사는 18만평이라는 어마어마한 부지에 영정을 모신 사당과 이순신기념관 외에도 충무공 집안의 네 명의 충신과 한 명의 효자를 표창한 정려, 옛 사당, 고택, 연지 등이 들어서 있다.
충무공 고택은 충무공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부터 살던 집으로 종손이 대대로 살았으며 개보수를 거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집 뒤편에 충무공의 위패를 모신 가묘가 있어 해마다 기일(11월 19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원래 이 집은 상주 방씨가 살던 집인데 사위인 충무공에게 물려준 것이다. 충무공 가묘 옆에는 활터가 있다. 현충사는 2012년부터 전면 무료로 개방되고 있다.
현충사를 나와 동남쪽 배방읍으로 차로 5분 정도 이동하면 곡교천(曲橋川)이 나온다. 곡교천을 따라 1.5km정도 이어지는 둑방길은 ‘곡교천 은행나무길’로 유명하다.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갈 즈음 수많은 인파가 몰리고 은행나무 축제가 열린다. 둑방 아래쪽 천변에는 코스모스 밭이 화사함을 더해 준다.
500년전 전통마을 간직한 외암 … 20채의 양반가 기와고택과 60채의 초가집
아산시의 최남단 송악면에는 시간이 멈추어진 듯 수백 년 전의 마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 있다. 마을 뒤쪽에 진산인 설화산이 든든히 받쳐주고 그 옆으로 월라산, 면잠산, 봉수산이 감싸고 있다. 마을 앞쪽으로 외암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일찍이 마을이 형성될 조건을 갖춘 이 곳은 500년 전에 형성돼 처음에는 강씨와 목씨가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 후 조선 명종 때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이정 일가가 낙향해 정착하면서 충남 지역에서 제법 권세를 누린 예안(禮安, 지금의 안동) 이씨의 집성촌이 됐다. 이후 이정의 6세손이자 학자인 이간이 설화산의 우뚝 솟은 형상을 따서 외암(外巖)이라 호를 짓고 마을 이름도 외암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래 이곳엔 일정 거리마마 역마가 대기하는 역말이 자리잡았고 ‘외양간’을 뜻하는 ‘오양골’, ‘오야골’을 거쳐 ‘외암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외암민속마을은 전통적인 한국의 마을 모습이 잘 보존돼 2000년 1월 중요민속문화자료 제236호로 지정됐다. 아산시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2021년 1월 한국관광공사가 뽑은 ‘한국 관광 100선’에 선정됐다.
동서로 긴 타원형의 외암마을에는 영암군수를 지낸 군수댁, 성균관 교수를 지낸 교수댁, 외암 종가댁, 송화댁, 참판댁, 병사댁, 감찰댁, 참봉댁, 신창댁, 영암댁, 교수댁 등 규모가 제법 큰 20여채의 반가와 60여채의 작은 기와집이나 초가집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 13명이나 배출돼 벼슬이름이나 벼슬을 지낸 곳을 따서 택호를 붙인 게 특징이다.
지금도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현재 외암마을에는 60여 가구 16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10여 년 전보다 몇 가구가 줄고 20여명이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2013년 처음 방문한 이후 거의 10년 만에 다시 찾은 외암마을은 거의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마을 앞을 흐르는 외암천과 그 위에 놓인 섶다리도 여전했다.
섶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서니 한쪽에서는 튼실한 벼가 자라고, 새로 조성된 것인지 전에는 보지 못했던 연밭에서 커다란 연잎이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서니 예전에 어린 조카들에게 태워주었던 나무 그네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 떠나왔던 고향을 다시 찾은 느낌이다. 외암마을은 그런 곳이다.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는.
마침 농사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마을 주민이 있어 말을 걸었다. 귀찮을 법도 한데 내치지 않고 묻는 말에 일일이 응대를 해 주고 시원한 ‘배즙’까지 내민다. 외암마을 사람들은 옛 조상들처럼 넉넉한 마음 씀씀이까지 그대로 이어받은 모양이다. 배즙을 마시니 더위도 어느 정도 가라 앉는다.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나와 본격적인 마을 산책에 나섰다.
수백 년은 족히 되는 아름드리 고목들 사이로 햇살과 바람을 벗 삼아 구불구불 나지막한 돌담길을 걷자니 마치 비밀스러운 시간 여행을 떠나온 것만 같다. 정겨움과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비슷한 돌담길이 이어지지만 지루할 틈이 없다. 돌담 너머로 장독대도 훔쳐 보고 담벼락 아래 가지런히 핀 달맞이꽃 구경도 하며 걷다 보면 참판댁에 이어 건재고택이 나온다.
건재고택(영암댁)은 영암군수를 지낸 건재(建齋) 이상익(李相翼, 1848∼1897)이 고종 때 지금의 모습으로 지었다. 호서학맥을 이어온 외암(巍巖) 이간(李柬)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5세손이 이상익이다. 회화나무와 수석이 어우러진 정원이 아름답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 등이 보존돼 있다. 참판댁은 조선시대 이조참판을 지낸 퇴호(退湖) 이정렬(李貞烈)이 고종으로부터 하사 받은 집이다.
고택들은 설화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계곡물을 집들 사이로 끌어들였다. 물길과 정원이 어우러져 민가의 정원으로는 한층 멋스럽다. 건재고택, 송화댁, 교수댁 등의 정원이 그러하다.
특히 건재고택은 물길을 따라 소나무, 향나무, 단풍나무 등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졌다. 국내 민가의 정원으로는 최고라는 극찬을 받고 있다. 그래서 영화 ‘취화선’에서 오언 장승업(최민식 분)이 건재고택 기와 위에 걸터앉아 술을 마시는 장면이 촬영되기도 했다.
외암마을에는 방문객들을 위한 다양한 체험행사가 열린다. 부채 만들기, 한지 만들기, 전통 거울 만들기, 떡방아 찧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몇몇 집에서는 카페 겸 민박을 운영하고 있으며 집에서 직접 만든 식혜나 수정과를 맛볼 수도 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예전처럼 체험 행사 등이 열리지 않아 마을에는 적막감이 감돈다.
맹사성 고택과 맹씨행단 … 청렴과 절의의 상징
외암마을에서 멀지 않은 배방읍 중리 마을은 신창 맹씨가 주로 살아가는 마을로 조선시대 맹희도와 그의 아들 맹사성이 살았던 고택이 남아 있다.
맹희도(孟希道)는 고려 공민왕 때 과거에 합격하고 우의정까지 올랐다. 고려가 망하자 어지러운 정계를 개탄하고 관직을 버렸다. 온양 오봉산(五峯山)에서 은거하면서 조선의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문정(文貞) 맹사성(孟思誠)은 고려 우왕 때에 과거에 합격하고 세종 13년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평생 재물을 탐하지 않고 청백으로 절조를 지켰던 인물로 유명하다. 맹사성 고택은 원래 최영 장군의 집이었으나 손녀사위인 맹희도에게 물려줌으로써 맹씨 고택이 되었다. 고택 마당에는 맹사성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와 주위에 단을 쌓고 공부를 했다는 행단(杏壇)이 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