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강릉으로 부임해 오던 벼슬아치들이 대관령을 넘으며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서러움이 복받쳐 눈물이 날 정도로 강릉 땅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는 얘기다.
또 도착해서는 웃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고 한다. 산과 바다에 둘러싸인 강릉 땅의 아름다움과 그 땅에 사는 이들의 소박한 인심과 선한 성정에 마음이 즐거워졌다는 이야기이다.
비록 지금은 반나절 만에도 다녀올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강릉 땅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아름다우면서도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미지의 땅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과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시인 허난설헌, 초충도로 유명한 여류 화가 신사임당 및 그의 아들로 조선시대 최고 유학자인 율곡 이이가 태어난 문향의 도시가 바로 강릉이다.
강릉 영동지방의 중심지 … 놀기 좋아하고 과거급제도 제법
강원도의 이름은 강릉의 ‘강’자와 원주의 ‘원’자를 따서 지었다. 그만큼 강릉은 예부터 영동지방의 역사와 문화, 행정, 경제의 중심지였다. 서울에서 강릉 땅을 밟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관령을 넘어야 했다.
대관령을 기점으로 강원도는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으로 나뉘는데 대관령을 과거에는 단대령이라고도 불렸다. 대관령을 처음 개척한 이는 조선 중종 때 고형산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강원관찰사로 부임하면서 백성을 동원하지 않고 관의 힘만으로 대관령 고개를 열었다고 전한다.
강릉 사람들은 ‘살면서 대관령을 한 번도 넘을 일이 없으면 복 받은 삶’이라고 했다는데 이는 대관령의 험준함을 빗댄 말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강릉에서의 삶이 윤택하고 만족스럽다는 것을 뜻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강릉은 고려시대 대도호부가 있던 곳으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강릉 즉 명주(溟州)는 본시 예(濊)의 고국(古國)으로 철국(鐵國) 혹은 예국(蘂國)이라고도 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땅이었다가 신라 진흥왕 때 신라 땅이 됐다. 고려 공양왕 때 대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조선시대에 강릉부가 되었고 1955년 강릉시로 승격되었다.
강릉사람들에 대한 택리지의 기록이 흥미롭다. ‘강릉 사람들은 학문하는 것보다는 놀이하는 것을 좋아하고, 노인들이 기악(妓樂)과 술과 고기를 싣고 호수와 산을 찾아 흥겹게 놀며 이것을 큰일로 여긴다. 때문에 이름을 날린 사람이 적은데 오직 강릉에서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제법 나왔다.’라고 적은 것을 보면 강릉 사람들은 속된 말로 강원도 사람을 일컫는 ‘감자 바위’의 삶과는 다르게 생활 정도가 윤택하고 학문과 풍류를 즐겼던 듯싶다. ‘문향의 도시’ 강릉은 이미 오래전부터 싹을 틔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경포대, 관동 8경의 최고 명승지 … 맑은 호수에 백두대간이 비쳐
강릉에는 가없이 넓고 멀리 펼쳐지는 푸른 바다와 울창한 소나무 숲, 바다와 맞닿은 듯한 호수 등 곳곳에 기이하고 훌륭한 경치가 많았다. 그런 곳에는 어김없이 정자를 세웠다. 경포대, 한송정, 석조, 석지, 문수대, 운금루 등이 강릉 최고의 명승지에 있던 정자들이다.
이중에서도 관동 8경에 속하는 경포대(鏡浦臺)는 오늘날까지 남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경포호 옆 야트막한 야산을 오르면 우거진 소나무와 벚나무 사이에서 경포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의 경포대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크다.
경포호 방향으로 단을 높여 마루를 만들고, 좌우로 한 단을 높여 누마루를 만들어 전체적으로 내부를 3단으로 구성한 점 등 일반 누정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내부에는 율곡이 열 살 때 지었다는 ‘경포대부’와 숙종의 ‘어제시’, 숙종~영조 때 문장가인 강릉부사를 지내며 경포대를 중수했다는 조하망(曺夏望)의 상량문 등 여러 명사들의 글이 걸려 있다.
누에 오르니 지척에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잔잔한 경포호 위로 백두대간의 연봉이 구름처럼 소리 없이 흘러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동양화’이다. 경포대는 물이 거울처럼 맑아 경포라 불린다.
경포대에서는 네 개의 달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하늘에 뜬 달이 하나요, 바다에 비친 달이 둘이요, 호수에 비친 달이 셋이요, 술잔에 뜬 달이 네 번째 달이다.
호수 한가운데 작은 바위섬 위에 또 하나의 정자가 보인다. 1958년에 지어진 월파정(月波亭)이다. 경포호수에 비친 달빛이 물결이 흔들리는 모습을 비유해 월파정이라 지었다.
경포대가 언제 누구에 의해 지어졌는지는 모른다. 다만 고려 명종 때 문신 김극기가 남긴 ‘팔영’이라는 문헌에 처음으로 경포대에 관한 기록이 전할 뿐이다. 원래 있었던 경포대는 낡고 허물어져 고려 충숙왕 13년에 현 방해정(放海亭) 뒷산 인월사 옛터에 새로 건립됐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고쳐 지었다.
경포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포은 정몽주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 전충사(全忠祠)가 있다. 후손 정기용이 1934년 개성 숭양서원에 봉안된 진영을 모사하여 강릉시 왕산리에 사당을 건립하고 봉향 다례를 행하다가 1968년 후손들과 강릉 지역 유림들이 함께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이전 진영은 퇴색해 환봉하였고 현재 전충사 진영은 1969년 충렬서원에 있는 진영을 서울대 교수 서세옥이 모사한 것이다.
경포대에서 내려와 스카이베이호텔 방향으로 걷다 보면 아담한 누각 한 채가 보인다. 호숫가 평지에 있어 누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인 방해정은 원래는 삼국시대 ‘인월사’라는 절터에 조선 후기 문신 이봉구가 세운 누정이다. 조선 철종 10년 통천군수를 지낸 이봉구가 관직에서 물러난 후 객사의 일부를 헐어다 선교장의 부속 별장으로 지었다고 한다.
방해정은 온돌방과 마루방, 부엌 등을 갖추고 있어 살림집으로도 사용하였다. 옛날에는 집 앞까지 호수여서 대청마루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놀기도 하였으며 배를 이용해 출입하였다고 한다.
방해정 옆에는 금란정(金蘭亭)이라는 정자도 있다. 조선 후기 선비인 김형진이 지은 집으로, 경포호가 바라보이는 경포대 북쪽 시루봉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방해정 도로 건너 호숫가에는 관찰사 박신과 기생 홍장의 사랑 얘기가 전하는 ‘홍장암’과 두 사람의 조형물들이 늘어서 있다. 강릉 지역에 순찰을 온 순찰사 박신은 기생 홍장을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다른 지역의 순찰을 마치고 강릉에 돌아와 홍장을 찾으니 홍장이 보이지 않았다.
당시 강릉부사였던 그의 친구 조운흘이 그를 골려 주기 위해 일부러 홍장이 죽은 것처럼 일을 꾸민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박신은 병이 나 시름시름 앓아 누었다. 조 부사는 슬퍼하는 박신을 위해 경포대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경포호에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배 한 척이 홀연히 나타났다. 노인이 노를 젓고 배 안에서 한 여인이 춤을 추고 있었는데 영락없는 홍장이었다. 그제야 친구가 자신을 놀린 것을 깨닫고 두 사람은 재회의 기쁨을 만끽했다. 훗날 박신은 이날을 떠올리며 시 한수를 읊었다.
‘젊었을 때 관동의 관찰사 되어 경포대의 맑은 물 꿈속에 아련하네. 생각하니 경포대 및 아름답게 꾸민 배는 또 뜨련만, 홍장은 이 몸 보고 늙었다고 비웃겠지’
홍장암에 서서 호수를 바라보니 호수 한 가운데 둥둥 떠 있는 월파정과 물결치는 연봉이 참으로 아름답다. 경포호 앞에 우뚝 선 스카이베이에 오르면 바다와 호수가 한 번에 내려다보이는 것을 보면 지하에 묻힌 옛 사람들은 무엇이라 할 지 궁금하다.
선교장, 한국전통 가옥의 백미
경포대에서 경포동 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조선 후기 전형적인 상류층 양반 가옥인 선교장(船橋莊)이 있다. 선교장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한옥 중에 가장 원형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곳이다.
선교장은 효령대군의 11세손인 이내번(李乃蕃 1703~1781)이 1703년도에 지은 99칸의 사대부 상류 주택이다. 그 후 10대에 이르도록 300년 이상을 그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동생에게 왕위를 내어준 효령대군은 ‘당상관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고, 하루빨리 한양을 떠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내번이 한양에서 강릉지방에 내려와 터를 잡았으니 조상의 유언을 잘 받든 것.
과거 경포호의 둘레는 지금의 4km보다 훨씬 넓어서 약 12km에 달하고 수량도 훨씬 많아 배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 다녔다고 한다. 선교장이란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선교장은 안채를 비롯해 동별당, 서별당, 연지당, 외별당, 사랑채, 중사랑, 행랑채 및 사당들로 이뤄져 있다. 지정구역 8399㎡, 보호구역 1만4970㎡에 달한다. 큰대문을 비롯해 총 12개 대문이 그대로 간직돼 있다. 솟을대문과 일자로 늘어선 행랑채가 23칸에 방이 20개나 있다. 길이로 치면 60여 m에 달한다. 이밖에 광 6개, 부엌 2개, 대문 2개가 딸려 있다. 규모 면에서나 가옥의 아름다움에서 한국 최고의 전통 가옥으로 손색이 없다.
선교장에 들어서면 오른편에 연지(蓮池)와 이 곳에서 가장 멋스러운 활래정(活來亭)이 보인다. 1816년(순조 16년)에 이후가 지은 활래정은 조선 후기 정자 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후에 증손인 이근우가 중건했다. 네모난 모양의 연못 속에 잠긴 돌기둥이 누마루와 팔작 기와지붕을 떠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연못에 연꽃이 한창 피어나고 붉은 배롱나무가 흐드러지게 필 무렵이면 활래정은 한 폭의 그림이 된다. 모양 좋은 소나무 한 그루는 사계절 활래정에 운치를 더한다. 활래정은 서쪽 태장봉에서 흘러나온 맑은 물이 연못을 거쳐 경포호로 빠져나가는 활수라는 의미라고 한다.
남자 주인이 전용하는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은 1815년(순조 15년) 이후(李厚)가 건립했다. 열화당’이라는 당우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삼형제(전주 이씨 집안사람끼리)가 늘 열화당에 모여 정담을 나누자’는 뜻을 담고 있다.
대청, 사랑방, 침방,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고 대청 앞에는 반 칸 정도의 툇마루가 있다. 정면에는 차양 시설(테라스)이 설치되어 있는데 러시아의 궁중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해 준 것이라 한다.
선교장 안채는 안주인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1748년 배다리(선교)에 전주 이씨 가의 삶의 터전으로 정하면서 처음 지어진 건물이다. 동별당과 서별당과 연결되어 있으며 안채로 통하는 별도의 일각문이 있고, 안으로 들어서면 안뜰과 부엌 등이 있다.
선교장의 곳간으로 사용되었던 곳간채는 1908년 영동지방 최초의 사립학교인 동진학교로 개조됐으나 몽양 여운형 선생이 영어선생으로 재직할 당시 일제에 의해 폐교됐다.
그에 앞서 선교장에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관련된 이야기도 전한다. 당시 강릉 관아를 점령하고 있던 동학군이 선교장으로 쳐들어 올 것이라는 정보를 들은 선교장 주인 이희원은 쌀과 돈을 동학군에 보내 안심시킨 후 민보군을 조직하여 강릉 관아로 쳐들어갔다. 이에 동학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고 대관령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그 후 이희원은 강릉부사로 임명돼 동학군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선교장 뒤쪽으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과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선교장을 중심으로 좌청룡 길, 우백호 길로 나뉘어 있으며 밤에는 조명이 어우러져 은은한 멋을 풍긴다. 주변 숲과 어우러진 한옥의 아름다움의 정수를 볼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