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적어도 나물에 관한 한 대단한 애정과 혜안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콩을 먹는 민족은 많지만 싹을 틔워 콩나물로 먹는 민족은 드물다. 1960년대 파독 광부, 간호사들은 고사리를 먹지 않는 독일의 산속에서 고사리를 발견하고 환호성을 질렀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처럼 나물 문화는 우리 핏속에 녹아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마다 봄이 오면 어김없이 바구니를 끼고 들로 산으로 나가 나물을 채취하러 이가 적잖다. 나물은 우리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찬거리다. 더욱이 궁핍했던 시절엔 배고픈 속을 채울 수 있게 해준 구황식품으로서, 부족한 비타민과 미네랄을 채워주는 식재료로서 진가를 발휘한 고마운 식재료다. 좀체로 흔하지 않아 쉽게 맛보기 어려운 울릉도의 봄의 전령사로 불리는 전호나물을 소개한다.
울릉도 봄의 전령사 ‘전호나물’ … 눈 속에서 자라고 눈 속에서 채취
전호나물(학명 Anthriscus sylvestris)은 미나리과(Apiaceae)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로 바디나물·나귀채(羅鬼菜)·수전호(水前胡)·야근채(野芹菜)·전호(全胡) 등의 이름으로도 불렸다. 예전에는 울릉도와 경북 영양군·봉화군 일부 지역에서만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울릉도에서 자생하는 전호나물이 가장 많고 귀한 상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경북 영양군과 봉화군에서 채취되는 전호나물도 울릉도 전호나물과 버금가는 것으로 손꼽힌다. 실제로 영양 면에서 산채비빔밥에 전호나물이 들어가지 않으면 비빔밥으로 쳐주지 않았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국외에선 시베리아·중앙아시아·동유럽 등지에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울의 찬바람을 견디고 울릉도에서 제일 먼저 봄을 알려주는 약초나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전호나물은 1m 정도의 높이로 곧게 자라고 줄기는 곧게 서서 여러 개의 가지를 치며 온 몸이 밋밋하고 털이 없다. 언뜻 당근 이파리나 쑥갓과 비슷한 모양의 잎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깊은 산속 또는 산기슭의 따뜻한 곳에 군락을 지어 살아 산속의 미나리로도 불린다.
전호나물은 다른 식물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특징을 갖고 있는 묘한 나물이기도 하다. 다른 식물들이 모두 잎을 거두는 시기인 10월경에 싹을 틔우고 잎을 내뻗는다. 차가운 겨우내 잎을 달고 지낸다. 그야말로 계절을 거꾸로 사는 셈이다. ‘눈 속에서 자라고 눈 속에서 채취하는 나물’로 불리는 전호나물은 보통 눈이 녹기 시작하는 2월경이면 채취해 먹을 수 있다. 다른 나물들과 달리 잠깐 동안만 맛볼 수 있어 미식가들 사이에서는 나름 ‘귀하신 몸’으로 불리는 식재료 중 하나로 손꼽힌다.
대개 산나물은 대부분 질기다는 선입견이 있지만 적어도 전호나물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전호나물의 어린잎과 줄기는 매우 부드럽다. 뿌리 근처의 줄기까지 채취해야 그 향과 맛이 더 진하므로 채취하는 순간부터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 나물이다. 미나리과에 속한 덕분인지 아삭하게 씹히는 식감과 특유의 향이 풍미를 더해준다.
칼슘·칼륨·비타민C 함유 건강 식재료 … 생채·무침·샐러드·부침 등 모든 요리서 뛰어난 풍미
씀바귀처럼 쌉쌀한 맛에 데치면 약간 단맛이 나고 아삭함을 느낄 수 있는 전호나물은 줄기·잎사귀에 칼슘·칼륨·비타민C를 다량 함유하고 있어 피를 맑게 해준다. 미나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특유의 향이 풍미를 더해 여러 가지 요리에 식재료로 활용될 수 있다.
전호나물은 삶아서 데치는 것보다 생채로 양념해 먹으면 특유의 진한 향을 맛볼 수 있다. 깨끗하게 씻어 된장 양념에 생으로 무쳐 먹어도 좋고 집간장으로 마늘을 넣지 않고 무쳐 먹어도 그 향과 맛이 일품이다. 기호에 따라 초고추장에 살짝 무쳐 먹어도 독특한 맛을 즐길 수 있다. 간장·식초·설탕·고추가루·깨소금으로 맛을 낸 소스에 샐러드 타입으로 먹어도 신선한 전호나물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송송 썰어 밀가루 반죽에 소금과 후추만 넣어 전을 부쳐도 그만이다. 특히 전호나물은 혈액을 맑게 해주는 작용이 있어 돼지고기 쌈 채소 또는 고기를 구워먹을 때 함께 먹어도 그만이다.
이처럼 귀한 식재료로 사용돼왔던 전호나물은 먹거리로만 사용되지 않고 민간요법과 한의학에서 각종 질병을 치료하는 약재로도 사용돼왔다. 전호나물은 맛은 쓰고 매우며 성질은 약간 차갑고 폐 기능을 강화시키는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민간에서는 가래와 담을 없애고 기침이 잦은 초기 감기에 사용해왔다. 폐열을 내리고 흉협부에 생긴 담으로 인한 답답함이나 거북한 속을 풀어주는 작용이 있어 증상 개선에 활용해왔다. 두통 또는 노인의 야뇨증에도 이용됐다.
한의학에서는 전호나물의 뿌리를 아삼(蛾蔘)이란 약재명으로 사용했다. 해열·거담·진해·진정 등의 효능이 있어 감기를 비롯해 기침을 하거나 열이 나는 증세, 천식 등을 다스리는 데 썼다. 이밖에 구역질이 심하거나, 가슴과 겨드랑이 밑이 붓고 거북한 증세를 보일 때에도 사용했다.